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8)
8 화 기어다니는 기다림.
기어다니는 기다림.
교화교(敎化敎)의 사제.
응징의 천칭을 모시는 저들은 흔히들 성기사하면 떠오르는 복장을 하고 다녔다. 두꺼운 철갑옷과 커다란 전투망치.
교화교의 사제는 이 게임에서 난이도가 낮기로 손에 꼽는 직업이었다.
얼핏 보면 움직이기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 저 두터운 갑옷은 입고 있는 사제의 믿음의 깊이가 깊을수록 가벼워지는 가호가 걸린 물건이며, 적당한 무게의 저 전투 망치는 적대하는 자를 향하는 순간 믿음의 깊이만큼 무게가 더해지는 가호가 걸려있었다.
그야말로 근접전에 특화된 직업.
먼저 입을 연 건, 얼굴 곳곳에 흉터가 새겨진 중년의 교화교 사제였다. 그 흉터 하나하나에서 세월의 노련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얼굴 맞대고 싸우는 건 최대한 피해야겠네.
“옳은 삶을 위한 헌신을. 이런 곳에서 유지(維持)의 신을 모시는 사제분을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응징의 천칭에 올려진 추(錘)인 오브스라고 합니다. 제 뒤에 서 있는 이들 또한 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며, 저 덩치 큰 친구의 이름은 코르누, 또 이쪽은 페티나라고 합니다.”
셋 중 리더격으로 보이는 오브스의 소개에 코르누와 페티나라고 불린 교화교의 사제가 내게 고개를 숙여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페티나는 평범한 체구의 여성으로 옅은 갈색 단발이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코르누와 페티나 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코르누였다.
건장한 성인 남성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몸집. 그리고 이마 한가운데에 자라난 크고 굵은 뿔 하나. 코르누는 인간 중심의 북부 왕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외뿔족이었다.
“저도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외뿔족에 대한 흥미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들은 부패의 사제의 치명적 약점인 신성을 품은 공격을 할 수 있는 자들.
나는 다른 신의 가호가 걸린 물건들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다른 신의 사제로 위장할 수 있었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내 정체가 이들에게 들키게 되면,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들과 우호적으로 지낼 수 없었다.
약점은 아주 명확한데, 그 약점이 되는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 조성의 가능성이 완전히 틀어막힌 직업. 그것이 바로 부패의 사제였다.
나와 교화교 사제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으려던 찰나. 에린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어 왔다.
“교화교 사제님들도 아마 한동안 여기서 용병 일을 도우시면서 지내실 거래요. 마르낙 사제님처럼요!”
그건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내가 찾고 있던 성물을 탈취할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는 소식이었으니까.
결국, 어느 정도 친분을 만들어둬야 하나?
따지고 보면 굳이 성물을 훔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해당 성물과 접촉해서 부패의 신성을 흡수한 다음 되돌려 놓기만 해도 괜찮았다.
문제는 성물에서 신성을 흡수할 때, 어쩔 수 없이 잠시동안 부패의 신성이 흘러나와버린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내겐 총 세 가지 과정이 필요했다.
1. 어떻게든 성물을 탈취.
2. 저 사제들과 최대한 멀어져서 신성을 흡수.
3. 다시 되돌려놓기.
머리가 복잡했다.
막무가내로 가지고 있는 성물을 잠시만 만져보게 해달라고 하면 미친놈 취급받을 건 당연하고도 자명한 사실.
또 도둑질을 해야 하나? 이건 뭐, 부패의 사제가 아니라 부패의 도적인 거 같은데.
“마르낙 사제님?”
생각이 너무 길었다. 흉터의 사내, 오브스가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저희는 아무래도 이 뒤에 일정이 있어서 지금은 잠시 짐을 풀러 가봐야 할 것 같군요. 허심탄회한 대화는 다음 기회로 미루지요.”
그래. 나도 좀 더 계획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다음 만남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교화교 사제 셋은 자연스럽게 용병 길드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안쪽?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라도 했는지, 걸어가는 사제들의 등을 보며 에린이 입을 열었다.
“교화교 사제님들은 여기서 지내시는 동안 용병 길드에서 묵으시기로 했어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원래 저희 용병 길드는 찾아오시는 사제님들에게 약간의 대가를 받고 숙소를 제공해주기도 해요. 아무래도 사제님들이시니까요.”
설마···?
“그럼 어제 저를 여기에 재워주신 것도?”
에린이 배시시 웃었다.
“네! 당연히 사제님이라 재워드린 거죠!”
밖에서 부는 겨울바람이 잠깐이나마 따뜻했던 내 마음에 불어닥쳤다. 그래,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밝은 연녹빛 눈망울이 내 앞에서 깜빡였다.
“설마? 사제님은 혹시 제가 사제님한테 관심이 있어서 제가 재워드렸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전혀 아닙니다.”
완전히 맞았다. 나는 이 고운 아가씨가 마음속에 나를 향한 앙큼한 흑심을 품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마치 연필처럼.
“그런데 사실, 제가 사제님한테 관심이 있어서 호의를 베풀어 드린 것도 맞긴 해요.”
“네?”
주변을 힐끔힐끔 살핀 에린이 슬쩍 다가와서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따뜻한 숨결이 내 귀를 간질였다.
“내일 밤에 식료품이 대량으로 들어올 예정인데, 혹시 식료품들이 오래 안 상하도록 유지의 가호를 걸어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나는 슬쩍 물러나서 내 귀를 매만졌다.
“왜 그런 이야기를 굳이 귀에 대고 속삭이시는 겁니까?”
에린은 개구쟁이처럼 빙글빙글 웃었다.
“왤까요?”
그 아찔한 목소리에 내 가슴주머니가 격렬하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살해! 살해! 살해! 살해! 살해!’
나는 재빨리 가슴을 부여잡고서 경건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가호 정도야 얼마든지 걸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여기 용병 길드에 한동안 묵어도 괜찮을까요?”
간단한 부패의 가호를 교화교의 사제 눈에 띄지 않게 거는 건 내게 일도 아니었다.
“사제님이 계속 여기 있어 주신다면야 저는 좋죠!”
좋아? 좋아…?! 나는 더욱 거세게 꿈틀거리는 가슴주머니를 부드럽게 누르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럼 감사히 며칠 더 묵겠습니다.”
“네. 방에 있으시다 가끔 심심하시면 나오셔서 제 말 상대나 해주세요. 그럼 일단 전 해야 할 업무가 좀 있어서 실례할게요.”
에린이 종종걸음으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떠나고, 나는 금화 두 닢과 함께 방으로 되돌아왔다.
‘살해!!!’
“어머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조금 더 밝고 고운 단어들을 사용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살해! 살해! 살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저 순수하게 성물을 회수하기 위해서 여기 남은 겁니다. 저 붉은 머리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아가씨를 향한 흑심 같은 건 티끌만치도 없습니다. 정말로요.”
‘살해…?’
“정말정말입니다. 지난 오 년 동안 절 봐오셨으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하, 이거 정말 안 되겠군요! 이 순수한 제 마음을 직접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어머니의 손바닥을 꾸욱꾸욱 눌러가며 마사지해드렸다. 정성을 담아.
‘사…ㄹ…ㅎ…ㅐ…’
무어라 말을 전하려던 부패의 어머니는 마사지에 푹 취하셔서 제 말을 끝내 완성하시지 못하셨다.
***
어머니의 기분을 충분히 풀어드리고 용병 길드 1층으로 다시 내려오니, 외뿔족 사내 하나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외뿔족 코르누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반갑게 웃었다.
“오, 이거 마르낙 사제님 아니십니까?”
성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필요를 느낀 나는 자연스럽게 코르누의 앞으로 가서 앉았다.
“이렇게 일찍 다시 만나 뵙게 될 줄이야. 참으로 반갑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제분들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오브스 사제님과 페티나라면 귀스의 영주님께 인사드리러 갔습니다.”
“어쩐 일로 함께 안 가셨습니까?”
코르누는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제 종족이 종족이다 보니, 북부 왕국의 영주님들 중에는 꺼리시는 분들이 있는지라···.”
대부분의 인구가 인간인 북부 왕국의 귀족들 중에는 이종족과 얼굴을 맞대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이 꽤 있었다.
“트레돈 영주님은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쓰실 걸요?”
어느새 다가온 에린이 의자 하나를 잡아당겨 앉아 대화에 끼어들었다. 코르누는 인심 좋게 웃으며 에린에게 답했다.
“그렇습니까? 이거 다른 사제분들과 같이 찾아뵐 걸 그랬군요.”
“저희 트레돈 영주님은 성격이 굉장히 딱딱하고, 사람 대하는 게 냉랭하기는 해도 일은 엄청 잘하시는 분이거든요. 공과 사도 칼같이 구분하시고요. 귀스 내에는 트레돈 영주님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꽤 많으니까 밖에서 혹시나 영주님 험담을 하시려거든 조심해서 하시는 게 좋아요.”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슬쩍 내 의문을 꺼냈다.
“그런데 다른 사제분들은 왜 영주님을 찾아뵈러 가신 겁니까?”
사제들이 도시에 들어오면 영주한테 무조건 인사를 해야 한다는 법 같은 건 없었다. 영주를 만나러 갔다는 건, 분명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
코르누는 에린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는 순례를 하면서 십 년 전 있었던 예언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오브스 사제님은 생명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종말이 바로 ‘악마’를 뜻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시고요.”
악마? 미친! 상황이 굉장히 안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해서 물었다.
“설마 영주님이 악마라고 생각하셔서 찾아가신 겁니까?”
코르누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 커다란 손으로 손사래 쳤다.
“어휴, 전혀 아닙니다. 정말 트레돈 영주님이 악마라고 생각했다면 제가 여기 남아 있었겠습니까? 그저 오브스 사제님은 매번 도시에 들를 때마다 하는 확인을 하러 가신 겁니다. 사제님은 상대가 악마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성물’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최악. 최악이다. 이보다 나쁠 수 없었다. 이대론 정말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것이 분명했다.
트레돈이 빙의된 지 얼마 안 된 악마였다면 교화교 사제 둘이서 쉽게 처리했겠지만, 그는 그 몸으로 마흔 번의 겨울을 지낸 악마였다.
잔뜩 애착이 붙었을 그 몸을 대가로 힘을 사용한다면 세계 저편에 있을 본신의 일부를 이 땅에 끌어올 수 있었다.
콰아아앙!
흔들리는 대지. 터져나가는 폭음. 도시에 울려 퍼지는 비명.
나와 코르누는 다급하게 용병 길드 뛰쳐나왔다.
그리고 보았다.
영주의 저택을 무너뜨리고 현세에 강림한 악마의 일부를.
– 가아아아아아!
전신을 뒤덮은 새카만 가죽은 그 어떤 창칼도 뚫을 수 없을 만큼 두꺼웠으며, 크게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들은 그 하나하나가 인간의 머리통만 했다.
쾅!
거대한 악마의 머리 위로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망치가 떨어져 내렸다.
교화교 사제의 대표적 권능 중 하나인 ‘징벌의 망치’였다.
코르누는 나를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도우러 가야 합니다!”
나는 얼굴을 굳힌 채, 저 멀리서 날뛰는 거대한 검은 악어의 모습을 한 악마를 보며 말했다.
“먼저 가십시오.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교화교 사제 셋이 악마를 잠시나마 저지하는 동안,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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