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88)
88 화 미소공(微笑公).
미소공(微笑公).
“젠장!!!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 빌어먹을 마르낙 개자식!”
바티스가 내던진 베개가 훨훨 날아 벽에 처박히고는 툭 하고 떨어졌다. 그는 이불 위에서 버둥대며 끊임없이 분노를 터뜨렸다.
“그냥 그 자리에서 아주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는 건데! 아니, 그래야만 했어!!! 날 왜 말린 거냐고!!! 힐덴!!!”
일레흐의 전(前) 동부 지부장 힐덴은 의자에 앉아서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어제 그 자리에서 날뛰셨다간, 바티스 왕자님이 원하시는 결과는 영영 얻지 못했을 테니 말린 겁니다.”
그는 수도에서 바티스에게 구해진 뒤로 이 싸가지 없는 왕자 놈이 완전히 글러 먹은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아주, 아주아주 철이 없는 자식에 불과했을 뿐. 거기다 한 번 목숨을 구해진 이상, 어떻게든 목숨값을 갚아야 직성이 풀렸다.
힐덴은 이르멜가에서 준비해 준 쿠키를 집어서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먹으며 말했다.
“애초에 왕자님께선 다키아 공녀한테는 별 관심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저 그녀의 지위가 가져다줄 명분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러니 어제는 더욱 날뛰시지 않는 게 맞았습니다. 어제 그 술집은 베아투스의 상류층들이 무척이나 즐겨 찾는 곳입니다. 거기서 왕자님이 그 마르낙이라는 사제와 드잡이질을 했다간, 다키아 공녀의 치부가 베아투스 상류층에 널리 널리 퍼져나갔을 테고, 바티스 왕자님께선 체면 때문에 공녀와의 약혼을 파하셔야만 했을 겁니다.”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힐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어제는 그렇게 대처하는 게 맞았습니다. 왕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니 지금 이렇게 애꿎은 베개에 화풀이나 하시고 있는 거고요.”
그 통렬한 일침에 바티스가 힐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알아! 그래 나도 안다고! 근데 말이지! 이게 직접 두 눈으로 보니까 왠지 모르게 엄청나게 열이 받더라 이거야! 응? 난 분명 아무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약혼녀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서 칭얼대고 있는 꼴을 보자니 속이 뒤집혔다고!!!”
힐덴은 분노하는 바티스를 보며 이와 비슷한 경우를 떠올렸다. 자신이 전혀 관심 없던 장난감이라도 다른 아이가 멋대로 가지고 노는 꼴을 보면 소유욕이 들끓어 올라 그걸 빼앗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전형적인 아이의 모습을. 마치 동부 지부에 두고 온 자신의 자식들이 그랬던 것처럼.
막상 자식 생각을 하니, 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당장 떠날 수는 없었다. 중앙의 괴멸로 위태로워진 자신의 일레흐 동부 지부장 자리를 보전할 수 있도록 이 용왕국 삼 왕자가 힘을 써 준 덕에 그 빚도 갚아야만 했다.
언제쯤 다 갚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힐덴은 일단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보고 떠날 작정이었다.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셔야 합니다. 무조건 참으셔야 해요. 옛말에 참는 자에게 복이 절로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침대 위에서 격렬하게 버둥대던 바티스가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참다간 내 복장이 먼저 터질 거 같은데? 그냥 지금 당장 찾아가서 그 마르낙 놈을 조져 버릴까? 응? 아무도 모르게 조져 버리면 되잖아!”
‘그게 불가능해 보이니까 그러지!’
저 도마뱀 왕자는 일을 직접 처리한 적이 없어서 감을 잡질 못하고 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힐덴은 그간 마르낙과 관련된 일들을 일선에서 지휘한 결과, 그가 결코 호락호락한 인간상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성격 측면이든, 실력 측면에서든. 힐덴은 저 용왕자가 용인족으로서 강한 건 인정했지만, 설령 바티스가 정말 마르낙보다 강하다고 하더라도 용왕자의 말처럼 조용히 처리해 버리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바티스가 쳐들어가면 마르낙과 드잡이질하느라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말 게 분명했다. 그러면 당연히 다키아 공녀의 치부가 명명백백히 베아투스 전역에 드러나게 될 테고, 자신이 용왕자에게 빚을 갚을 날도 아주아주 멀어질 게 분명했다.
힐덴이 이번에는 무슨 말로 바티스를 달랠지 고민하던 그때.
똑똑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르멜가의 하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티스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하인은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또박또박 대답했다.
“전에 다키아 공녀님께서 저택으로 돌아오거든 알려 달라고 하셨기에, 다키아 공녀님이 저택에 돌아오셨음을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바티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하인을 향해 소리쳤다.
“뭐? 다키아 공녀가 저택에 왔다고?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키아 공녀는 지금 어디 있는데?”
“공녀님께선 곧장 더글렉 마틴 경의 집무실로 향하셨습니다.”
“하여튼 다키아 공녀가 지금 이 저택에 있다 이거지.”
바티스는 재빨리 옷걸이에 걸린 자신의 겉옷을 챙겨 입었다. 힐덴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물었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뭐긴 뭐야! 내 약혼녀를 보러 가는 거지. 아직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눠 본 적이 없으니까!”
힐덴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가 봤자 좋은 꼴은 못 볼 텐데요.”
“어째서?”
바티스의 되물음에 힐덴이 슬쩍 고개를 돌려 하인에게 물었다.
“공녀님께선 혼자 오셨습니까?”
하인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마르낙이라는 이름의 사제분과 같이 마틴 경의 집무실로 가셨습니다.”
하인의 대답을 들은 바티스가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그 빌어먹을 자식은 대체 왜 남의 약혼녀랑 그렇게 찰싹 붙어 다니는 건데!!! 대체 왜!!!”
***
반짝이는 머리.
더글렉 마틴은 노년과 중년 사이에 걸쳐있는 건장한 사내였다. 서류 위에 사인을 하는 그의 굵은 손가락과 팔뚝 위로 선명히 도드라진 핏줄들과 힘줄들은 그가 아직 충분히 현역에서 날뛸 수 있음을 주장하듯이 끊임없이 꿈틀댔다.
그는 대머리였지만, 그의 턱에는 원래 모발로 갔어야 할 털들이 턱에서 자라난 것처럼 턱수염이 아주 풍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다키아와 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더글렉 마틴은 자신의 코 위에 얹어진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다키아 공녀님. 가출은 즐거우셨습니까? 얼굴이 훤하신 게 그간 잘 지내신 것 같아 보여 제 마음이 조금은 편하군요.”
다키아는 더글렉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마틴 경.”
더글렉 마틴은 자신의 안경을 천으로 닦으며 대답했다.
“왠지 공녀님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 있는 것 같습니다만?”
다키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더글렉을 노려보았다.
“제가 마틴 경에게요? 저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마틴 경께서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건 마틴 경께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녀는 우아하게 에둘러서 ‘네가 내 개인 금고를 막아 뒀지!’라고 타박했다.
‘살해!!!’
내 품속에선 어머니가 ‘내 황금 내놔!!! 이 늙다리야!!!’라고 거칠게 소리치셨고. 이럴 때면 어머니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어찌 보면 축복이 아닐까 싶었다. 어머니의 말뜻을 다른 이들이 다 이해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겪은 애로사항이 적어도 두 배는 늘어났을 테니.
더글렉은 지극히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마치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아, 설마 제가 다키아 공녀님의 개인 금고 접근을 막아 둔 것 때문에 이렇게 찾아오신 겁니까?”
다키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대답했다.
“어째서 그런 조치를 해 두신 거죠?”
“그거야 아주 간단합니다.”
더글렉은 다 닦은 안경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제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공녀님께선 이 저택에 다신 되돌아오지 않으실지도 모르니까요.”
“…”
다키아가 잠깐 말문을 잃어버린 사이, 더글렉이 다키아에게서 눈을 떼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쪽의 훤칠하신 분이 바로 마르낙이라는 성함의 사제님입니까?”
나는 고개를 가볍게 꾸벅 숙이고는 대답했다.
“예. 매일의 삶을 수호하는 유지(維持)의 여신님을 모시고 있는 마르낙이라고 합니다.”
“그뿐입니까?”
더글렉은 종이 한 장을 들고서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귀스의 악마 도살자, 켈톤의 악신의 대적자, 그리고 에라디코의 구원자.”
그는 종이를 덮으며 나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이거 알아보니 아주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시더군요.”
나는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전부 과장된 소문일 뿐입니다. 애초에 소문이란 게 사람의 입을 타고 전해지면 잔뜩 숨을 불어넣어 제 몸집을 키우기 마련이지요. 제가 진짜로 한 일은 아마 전해 들으신 것보다 훨씬 적을 겁니다.”
“크든 작든 모두 선(善)을 위해 행하신 일이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더글렉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소공(微笑公)께서 마르낙 사제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네?”
그 말에 다키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그래, 노망이 났지. 노망 난 가주가 나를 보고자 한다니. 대체 왜?
다키아의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더글렉이 다키아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공녀님.”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한마디에는 가문의 일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 있었다. 늙은 기사가 뿜어내는 압박감에 다키아는 일순 말을 삼켰다.
다키아가 침묵하자, 그는 그제야 인자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공녀님과 금고 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테니, 마르낙 사제님께서는 미소공을 잠깐 찾아뵙고 오시지요.”
노망난 사람이랑은 대화해 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 내가 미소공의 초대를 거절하는 건, 예의를 밥 말아 먹은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다키아를 혼자 남겨 두고 하인을 따라 미소공의 방으로 향했다.
저택의 가장 높은 층.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안내한 하인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말했다.
“미소공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저는 이 안에 들어가는 게 허락되지 않았으니, 여기서부터는 홀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아, 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하자, 하인은 내게 마주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떠나갔다.
나는 거대한 문을 열고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두꺼운 커튼으로 모든 창문을 막아 놓은 거대한 방 안은 대낮임에도 무척이나 어두컴컴했다.
일렁이는 촛불들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에서 뿜어나오는 빛. 그 불빛들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미소공(微笑公) 칼토 이르멜은 흔들의자에 앉아 벽난로 앞에서 몸을 까딱이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반짝이는 은발. 얼굴에는 주름이 한가득임에도 그 주름 또한 그의 멋을 더하는 부속물에 불과했다.
세월이 깃든 미(美)란 이런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잘생긴 얼굴은 이 남자에게 왜 미소공(微笑公)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나를 단박에 이해시켰다.
그는 찬란한 금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만나서 반갑네.”
현기까지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나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몸이 편찮으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그는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근에 우연히 정신을 차렸네. 이리 와서 앉지. 내 자네에게 해 줄 말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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