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89)
89 화 제안.
제안.
미소공은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까딱이며 내가 앉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살해?’
저거 그냥 노망 난 건데, 멀쩡한 척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어머니의 번뜩이는 추리.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내가 그의 옆자리에 준비된 의자에 앉자, 미소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틴의 힘을 빌려서 자네에 대해 조금 알아봤네.”
내가 네 뒷조사를 했다는 당당한 선언. 미소공은 느릿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해서 온갖 선한 일들을 해 왔다지? 일을 처리하자마자 바삐 떠난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자네가 지나온 길 위에 남겨진 이들 중에는 자네의 이름을 칭송하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다네.”
‘살해살해.’
‘그렇지. 그렇지.’ 하며 어머니가 마치 제 이야기인 것처럼 기뻐하시는 사이, 나는 빙그레 웃으며 미소공에게 대답했다.
“그저 해야만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원래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순간에 한 걸음 내딛는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대단한 거라네. 거기에…”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한 걸음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대단한 걸 넘어서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지. 사람이란 자신을 위한 걸음조차 쉽게 내딛지 못하는 법이거든.”
“그렇게 숭고한 뜻을 품고서 행한 게 아닙니다.”
‘살해!!!’
숭고한 거 완전 맞다는 외침.
‘살해살해!’
외침 뒤에는 매번 그렇게 적당히 빠지라니까 굳이 귀찮은 길을 자처한다는 투덜거림이 뒤따랐다.
내가 가슴 주머니를 토닥거리는 사이, 미소공이 나를 향해 툭 하고 말을 던져 왔다.
“내 딸하고 꽤나 깊은 사이라고 들었네.”
“쿨럭.”
짧게 헛기침한 나는 이 오해가 커지기 전에 재빨리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해 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전부 착각이십니다. 공녀님하고 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미소공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이 커튼으로 칭칭 둘러싸인 방에서 가장 커다랗게 빛나는 불빛을.
그는 한참이나 불꽃을 바라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다키아. 그 아이가 밤마다 자네 방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아주 편한 옷차림으로 말일세.”
“쿠, 쿨럭!”
아니, 대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아는 거지?
다키아는 어머니랑 놀려고 오는 거였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이들은 다키아가 내 방에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대체 뭐라고 말해야 미소공이 이해해 줄까?
아니, 마음 같아선 모시는 신이 두 눈을 부릅뜨고 보고 계셔서 지금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나가는 강아지도 안 믿을 이야기를 북부 왕국의 넷밖에 없는 대영주가 믿어 주리라 생각하는 건 지극히 멍청한 짓이었다.
거기에 어머니의 존재 자체가 기밀이기도 했고.
내가 만약 북부 왕국의 대영주고, 내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이 밤마다 어디서 굴러먹다 나타났는지 모를 외간 남자의 방에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쉽지 않은데. 절대 쉽지 않은데 이거.
나는 재빨리 미소공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딱히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타오르는 벽난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저 침착한 얼굴 뒤에서 나를 저 벽난로에 밀어 넣는 상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점 때문에 나는 살짝 식은땀이 흘렀다.
나를 진짜 벽난로에 밀어 넣으려고 한다면, 나는 다키아의 아버지를 두들겨 패고 도망쳐야만 하는 걸까?
온갖 복잡한 고민들이 제멋대로 떠오르는 와중, 미소공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네.”
“예?”
잘됐다니?
그는 벽난로의 불길에서 눈을 뗀 다음,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딸, 다키아를 데리고 이 베아투스를 떠나게. 내 어디 가서도 넉넉하게 살 수 있도록 충분히 챙겨 주겠네.”
나는 미소공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미소공께서 제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내 딸과 함께 잘 먹고 잘살라는 걸세. 다만, 그 장소는 이곳 베아투스가 아닌 다른 곳이어야만 해. 용왕국 왕자와의 혼인 건은 내가 알아서 잘 마무리해 두겠네.”
“그럼 공녀님의 지위는…”
“당연히 다키아 그 아이는 가문에 대한 계승권을 포기해야만 하지. 그리고 다신 베아투스로 돌아오지 말라고 자네가 전해 주게. 이곳엔 더 이상 그 아이의 자리는 없으니까 말일세.”
약혼이 싫다고 기왕 가출한 거, 돌아와서 괜히 계승권 되찾겠다고 날뛰지 말고 좋게좋게 사라져 달라는 건가.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의 말에 답했다.
“싫습니다.”
“싫다라…”
미소공 칼토 이르멜의 우묵한 눈빛에 한 줄기 날카로움이 길들었다.
“자네에겐 그다지 나쁜 조건이 아니지 않나? 내 피가 흐르는 그 아이 정도면 어디 가서도 충분히 자랑할 만한 미색을 지녔다고 생각되는데 말이지. 그리고 말일세.”
미소공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대영주로서의 오만함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자네에게 과연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정확히는 다키아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마법사’에 마땅한 기반도 없는 그 아이가 이곳에 남아서 가문의 가주 자리를 탐한다? 과연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누구도 그 아이가 이 대지를 다스리는 대영주가 되길 바라지 않을 걸세.”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미소공의 말대로 다키아는 이곳에 어떤 기반도 없고, 귀족들이 반기지 않는 ‘마법사’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미소공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공녀님께서 이 영지에 남아 가주의 자리를 잇길 바란다면 기꺼이 응원할 것이고, 공녀님께서 저와 함께 떠나길 바란다면 그 또한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지만, 이러한 ‘선택’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키아 공녀님께서 ‘직접’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행하시는 것이지요.”
그의 방법은 틀렸다. 완벽하게 틀렸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서 그에게 말했다.
“설령 미소공께서 진정으로 공녀님이 이 영지를 떠나길 바라신다면, 그 이야기는 제가 아니라 따님께 직접 하셨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제게 해 주신 제안은 아무것도 못들은 셈 치겠습니다. 게다가 북부 왕국의 넷밖에 없는 대영주 중 한 분이신 미소공께서 외인에게 했다기엔 너무나 안 어울리는 제안이지 않습니까?”
미소공의 딱딱한 표정을 보며 가볍게 말을 덧붙였다.
“바라셨던 답을 들려 드리지 못한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후회하지 않겠나?”
“아니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벌써 후회하고 있습니다. 감히 대영주의 제안을 거절한 제게 어떤 고난이 따를지 두렵습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신을 모시는 제게, 제 위에 계시는 분은 단 한 분뿐이시니까요.”
미소공은 흔들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가볍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자네는 이 나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네만?”
“기분 탓이실 겁니다.”
“지극히 설득력이 없는 대답이로군.”
힘없이 의자에 몸을 파묻은 미소공은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마치 바람 빠진 풍선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내가 다키아에게 직접 말하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하네.”
“어떤 이유입니까?”
“내가 살가운 아버지는 아니기에 그 아이를 잘 아는 건 아니네만, 그래도 봐 온 바가 있기에 나름 알고 있는 점들도 있네. 다키아, 그 아이는 누르면 누를수록 더욱 억세게 튕겨 나오는 아이일세. 내가 그 아이에게 직접 포기하고 떠나라고 한다면 다키아는 더욱 가주의 자리에 대한 열망을 불태울 게 분명하다네.”
살이 빠져 가느다래진 손가락이 내 얼굴을 가리켰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자네를 불러 이야기한 걸세.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다키아는 이곳에 남아 봤자 절대 ‘가주’가 될 수 없네. 설령 기적이 일어나 가주가 된다고 해도, 누구도 그 아이를 환영하지 않을 걸세. 그 삶은 절대 쉽지 않을 거야. 행복하지도 않을 거고. 애초에 대영주의 자리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닐세. 그러니 자네가 다키아를 잘 설득해 줬으면 하네.”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소공의 얼굴에는 진한 피곤함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제가 감히 무례한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자네는 이미 충분히 무례했는데, 굳이 여기서 작은 무례가 하나 더해진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 말해 보게.”
“전해 듣기론 그간 따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째서 갑자기 변하신 겁니까?”
“그저 늙은이의 변덕이지. 딱히 이유랄 게 있겠나? 늙다 보면 변하기 마련이라네. 자네도 그럴 걸세. 이만 나가 보게. 내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아 줬으면 좋겠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이 베아투스를 떠나는 게 딸아이에게 이로울 건 확실하니 말이지.”
명백한 축객령. 굳이 더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기 직전, 미소공의 나직한 말 한마디가 뒤에서 들려왔다.
“다키아에겐 내가 정신을 차렸다고 말하지 말게. 아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게. 알겠나? 그저 노망난 늙은이가 변덕으로 불러서 잔뜩 고생했노라, 그렇게만 말하게.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겠지?”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이제 진짜 가 보게.”
“항상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짧은 인사를 끝으로 나는 미소공의 방을 떠났다. 떠나기 직전 슬쩍 뒤를 돌아서 바라본 내 눈에 들어온 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홀로 벽난로를 바라보는 노인 한 명이었다.
***
마르낙이 떠나고 잠시 뒤. 창문이 열리면서 하얗고 검은 두 여인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첫 번째 사도 ‘나아가는 이레트’가 미소공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칼토 이르멜.”
미소공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레트를 바라보며 답했다.
“한땐 내 기사였으면서 이제는 이름으로 막 부르는군.”
이레트의 옆에 서 있던 세 번째 사도 ‘추앙받는 아도라’가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젠 아니니까. 별 상관없지 않나?”
쓰게 웃은 칼토 이르멜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답했다.
“하긴, 그것도 그렇지.”
이레트는 그를 향해 물었다.
“준비는?”
추락한 신의 두 번째 사도 ‘돌아보는 칼토’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날 걸세. 잠깐만 기다려 주게나. 아주 잠깐만 말일세.”
그는 자신의 딸이 최대한 빨리 베아투스를 떠나길 바랐다.
물론, 떠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
“아니, 싫다니까요!”
“어째서?! 대체 어째서?!”
“애초에 저는 당신이랑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오늘도 당신 보러 온 게 아니라니까요?”
더글렉 마틴의 집무실로 돌아오자, 전에 봤던 샛노란 머리의 왕자와 다키아가 투닥대는 모습이 보였다.
다키아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잽싸게 걸음을 옮겨서 내 옆에 와서 섰다.
“저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바티스 왕자님. 약혼 건은 정말 죄송하게 됐어요!”
샛노란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또 너냐!!! 마르낙!!!”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제가 마르낙이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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