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90)
90 화 데르소 이르멜.
데르소 이르멜.
용왕자는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당장 내 약혼녀에게서 떨어져라!!!”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키아가 빽 하고 소리쳤다.
“아니, 저는 당신이랑 약혼 안 한다니까요!!!”
바티스 왕자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다키아에게 물었다.
“대체 왜! 이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약혼을 안 하겠다는 거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바티스 왕자님이 부족한 게 아니라 그냥 제가 그럴 마음이 없어서 그래요! 여기까지 헛걸음하신 건 정말이지 죄송하게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빙빙 둘러서 이야기하는 걸 잘 이해 못 하시는 거 같으니까 딱 잘라서 말씀드릴게요.”
다키아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저는 아직 그 누구…”
그녀는 ‘누구’라는 단어를 내뱉으면서 슬쩍 내 눈치를 보곤 재빨리 말을 다시 이어 나갔다.
“…와도 결혼을 할 생각이 없어요. 아직은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직접 세계와 맞부딪혀 보고 싶거든요.”
그야말로 단호한 거절. 용왕자는 거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보기엔 그는 여자에게 생전 처음으로 거절당해 보는 듯했다.
설마 그건가. ‘나한테 이러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식상한 패턴은 아니겠지.
잠깐 무너지려던 표정을 추스른 용왕자는 다키아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치자면 여기 북부 왕국보다 용왕국 왕실이 좀 더 새롭고 신선한 세계가 아닐까?”
다키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볍게 대답했다.
“듣기만 해도 벌써부터 온갖 부차적인 제약이 잔뜩 따라올 것만 같은 곳인데요. 저는 하인들에게 둘러싸여서 하루 종일 지내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그, 그러면 네 시중을 드는 하녀들을 모조리 없애 주겠다!!!”
되는대로 튀어나온 말에 다키아가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시중드는 하녀 없이 저 혼자서 왕궁 생활을 하라고요? 그게 진짜 가능할 거라고 보세요?”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용왕자는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말했다.
“그럼 조금 줄여서 붙여 주면 되나?”
“많고 적고는 상관없이 전 이 결혼 안 한다니까요?”
“대체 왜!!!”
다키아는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전 지금 결혼에 관심 없다고요. 분명 저 말고 왕자님께 어울리는 천생연분의 배필이 존재할 테니 다른 분을 찾아보세요.”
“그, 그러지 말고! 식사! 그래 식사라도 한번 해 보는 게 어떻겠어? 아직 대화를 몇 번 나눠 보지 못해서 네가 나에 대해 잘 모르는 걸 수도 있잖아! 이야기를 나눠 보면 서로 잘 통하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무척이나 구차한 태도였지만, 나름 잘생긴 저 용왕자가 그러니 약간 느낌이 있어 보였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궁상맞은 매력…?
슬쩍 고개를 돌려 다키아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나는 다키아의 표정을 본 순간, 이미 모든 게 글렀다는 사실을 곧장 깨달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질린다는 눈빛으로 용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이 광경이 너무 안타까워서 저 용왕자에게 동정심마저 들었다.
‘살해살해!’
어머니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기꺼우신지, ‘쟤 완전 불쌍한데 그냥 결혼 그까짓 거 한번 해줘라!’라시며 키득키득 웃고 계셨다. 사람의 모습을 취할 수만 있으셨다면 기꺼이 과자를 오독오독 씹으면 이 광경을 구경하셨을 게 분명했다.
“어, 어때? 나와 저녁 식사 하러 함께 가지 않겠어?”
다키아는 입술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젓고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저는 이 뒤에 일정이 있어서 곤란해요.”
“그럼 내일은?”
“내일은…”
그녀는 내 눈치를 슬쩍 보곤 잽싸게 말했다.
“내일도 제가 바빠서 안 되겠는데요.”
“모, 모레는?”
“모레도 바빠요.”
“그럼…”
“바빠요.”
“아직 언젠지 말도 안 했는데?”
“하여튼 바빠요.”
용왕자는 재빨리 공략 방법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그거 아나? 어제 이 베아투스에 극단이 찾아왔다던데, 그 극단엔 아주 유명한 여가수가 있다더라고! ‘아도라’라고! 나랑 같이 ‘아도라’가 하는 극을 구경하러 가지 않겠어?”
“이미 다 봤어요.”
“이번에 새로 짠 극이라 사흘 뒤가 첫 공연인데…?”
“연극이 다 거기서 거기죠. 전 이제 평생 연극 다 본 셈 치고 죽을 때까지 더 이상 새로운 연극은 안 보려고요.”
그야말로 완벽한 철벽이었다. 보는 내가 살짝 안타까워질 만큼.
결국, 그다지 인내심이 많아 보이지 않던 용왕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다키아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분노가 나를 향했다. 용왕자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네가 날 거부하는 건 전부 저 빌어먹을 마르낙 때문이지? 그렇지?”
내 이름이 나오자 다키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서 대답했다.
“제가 왕자님을 거절하는 건 마르낙 사제님이랑은 아무 관계 없어요.”
“아니! 관계있잖아!”
그는 나를 가리키던 손가락을 옮겨 다키아를 지목했다.
“너는! 저 빌어먹을 마르낙이랑 한밤중에 뒹구는 사이니까!!!”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대체 다키아가 밤에 어머니를 보러 내 방에 놀러 온다는 사실이 어디까지 퍼져 있는 거지? 어떻게 만나는 사람마다 다 알고 있으니, 사실은 비밀리에 발행된 북부왕국 황색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기라도 한 건가?
– 충격! 이르멜가의 다키아 이르멜 공녀, 외간 남자의 방으로 매일 찾아가!
이런 식으로 말이지.
‘살햇?! 살해!!!’
용왕자의 말에 어머니가 도리어 내게 물어 왔다. 진짜 자기 몰래 다키아랑 뒹굴었냐고.
아니, 맨날 같이 있으셨으면서 왜 물으시는 거지.
나는 버둥대는 어머니를 진정시키고 용왕자를 향해 말을 꺼냈다.
“왕자님, 아무래도 조금 오해가 있으신 거 같습니다. 저와 공녀님은 그런 관계가…”
“닥쳐!!!”
그는 일렁이는 샛노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평범한 인간의 눈이었던 그의 동공이 세로로 갈라지며 뱀의 눈으로 변했다. 무거운 압박감이 주위를 짓눌렀다.
“이 임자 있는 남의 여자나 탐하는 배덕한 사제 놈이 어디서 멋대로 끼어드는 거냐! 지금 당장은 선량하다는 듯이 두꺼운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내가 그 가면 뒤에 숨어 있을 추잡한 욕망을 모를 줄 알아? 모를 줄 아느냐고! 분명 네놈은 공녀가 임자 있는 여자라니까 더욱 흥분한 거겠지! 평생 닿을 일 없던 고귀한 존재를 한번 더럽혀 보겠다고 그 추잡한 혀를 제멋대로 놀렸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역겹기 그지없…”
“닥치세요!!!”
서릿발 같은 노성이 용왕자의 말을 끊었다. 다키아는 마치 자신이 모욕받기라도 한 듯이 진심으로 분노한 채 용왕자를 노려보았다.
이전까지 그녀의 눈빛에 담겨 있던 용왕자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마르낙 사제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항상 타인을 위해서 올곧게 살아가시는 분이라고요. 항상 이유 없는 희생을 자처하느라 끊임없이 고난과 역경에 휘말리시면서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구하는 데 주저한 적이 없으시다고요. 게다가 정체불명의 납치범들에게 납치당하던 저를 구해 주시기도 했고요.”
다키아는 내 얼굴을 잠깐 보고는 지극히 차가운 눈빛으로 용왕자를 바라보았다.
“저는 마르낙 사제님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아무리 왕자님이라도 제 앞에서 마르낙 사제님의 명예를 모욕하시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이르멜가는 은인에 대한 모욕을 눈앞에서 좌시하는 가문이 아니거든요. 정식으로 말씀드릴게요. 절대, 절대로 지금의 선택을 물릴 일이 없으니 일말의 미련조차 가지지 마셨으면 해요.”
그녀는 용왕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저 다키아 이르멜은 이르멜의 이름을 걸고서 정식으로 용왕국 왕가와의 혼약을 거절하겠습니다. 지금의 선언은 이르멜의 꽃잎이 질 때까지 절대 변치 않을 겁니다.”
가문의 문장이 새하얀 동백꽃인 이르멜가에서 꽃잎이 질 때까지 결심이 변치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차라리 가문이 망하면 망했지 절대 결심을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일말의 가능성마저 사라진 지금, 용왕자는 진심으로 분노한 채 우리를 노려보았다.
“이건 말이 다르잖아!!! 데르소!!!”
데르소?
자세히 보니 용왕자의 시선은 우리가 아닌 우리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왕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전히 경솔하고 성급하군.”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앞으로 걸어 나온 이르멜가의 장남, 데르소 이르멜은 은발을 쓸어넘기며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이르멜의 이름을 그렇게 쉬이 입에 올려선 안 된다는 걸 네가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역시 태생이 ‘마법사’라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 인식할 교양이 없는 건가. 쯧.”
다키아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오빠를 노려보았다.
“내 말에 대답해라!!! 데르소!!! 너는 분명 내게 공녀를 약속하지 않았나!!!”
데르소 이르멜은 고개를 돌려 용왕자를 바라보며 가볍게 대꾸했다.
“나는 분명 재주껏 데려가라고 누차 말했던 거 같은데. 네 능력이 부족해서 실패한 걸 가지고 지금 나한테 불만을 토로하는 건가?”
“뭐, 뭣?! 네가? 너 지금 나한테 ‘네가’라고 한 거야?”
지극히 무례한 데르소의 대답에 오히려 용왕자가 당황했다. 다키아는 자신의 오빠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절 납치하라고 사주한 게 당신이었어요? 그리고 용왕자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사람을 부려서 절 납치한 거고요?”
데르소는 다키아를 바라보며 무감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납치? 이게 납치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행동이었나? 너는 철부지처럼 네 기분만을 생각하며 무엇이 가문에 이득이 되는지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 투정 부리듯이 제멋대로 가출했지. 나는 그런 너를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의도였을 뿐이다. 만약 진짜 내가 널 ‘납치’하려고 했다면, 과연 네가 몸 성히 내 앞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도 못한 채, 더러운 부랑배들의 아래에 깔려서 뒹굴고 있었겠지. 네가 이렇게 온전한 몸으로 멀쩡히 서 있는 건 전부 이르멜가의 핏줄을 아끼는 내 자비 덕분임을 깨달아라.”
“뭐, 뭐라고요?”
데르소는 잠깐 내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키아를 향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 하지. 너는 그냥 네가 뒹굴어 먹은 저 남자와 함께 네 자그마한 주머니를 챙겨서 최대한 빨리 베아투스를 떠나는 게 좋을 거다. 아, 이렇게 정중한 표현으로 하면 못 알아들을 수도 있으니 짧게 말하지.”
다키아와 같은 황금빛 눈. 하지만 그 두 눈엔 일말의 정 따윈 단 한 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흘 내로 베아투스에서 떠나라. 다키아.”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떠나갔다. 무시당한 용왕자가 데르소를 향해 거세게 소리쳤다.
“야!!! 데르소!!! 네가 날 무시하고도 멀쩡할 줄 알아?!”
데르소는 잠깐 멈춰 서서 고개를 슬쩍 돌려 용왕자에게 대답했다.
“한 번만 더 이르멜가의 저택 안에서 멋대로 소리치면, 네가 여태까지 벌인 행동을 마룡왕(魔龍王)께 전하겠다. 바티스 드라코.”
그 차가운 한마디에 바티스는 할 말을 잃고 멍한 눈빛으로 데르소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용왕자가 멍해 있는 틈을 노려 다키아를 데리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
“으아아아아! 나쁜 놈! 진짜 나쁜 놈!!! 제 오빠는 천하의 나쁜 놈이에요!!! 뭐, 나보고 사흘 안에 베아투스에서 꺼지라고? 으아아아!!!”
다키아는 걷는 내내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분을 터뜨렸다. 그녀는 성큼 내 옆으로 다가와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르낙 사제님! 그냥 돌아가서 제 오빠 머리통에 시원하게 마법 한 방 날려주고 올까요?”
“그거 제대로 맞았다간 오빠분이 죽지 않겠습니까…?”
“그 질리도록 뻔뻔하고 두꺼운 면상은 마법 몇 방쯤 맞아도 충분히 괜찮을 거예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내일 금고에 대한 접근이 풀리는 대로 공녀님의 황금부터 찾고 난 다음에 결정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진짜 오빠분 머리에 마법을 맞추면 당장 베아투스에서 도망쳐야 할 테니까요.”
사실, 뭔가 구린 냄새가 났다.
자꾸만 다키아에게 떠나라고 하는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 둘의 행동이 우연히 맞아들어갔다고 보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겠지.
이곳 베아투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옆에서 분노하는 다키아를 달래 주며 숙소로 돌아온 나를 반긴 건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광경이었다.
다키아는 방금 전까지 화내던 것도 잊고 놀란 눈으로 내게 말했다.
“저거 쟈멜 맞죠…?”
“저건 쟈멜이군요…”
열댓 명의 경비병, 쟈멜이 그 경비병 무리의 속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이 묶여 끌려가고 있었다.
나와 다키아를 발견한 테르지오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서 내게 말했다.
– 후계자님!
나는 테르지오에게 물었다.
“어째서 쟈멜이 지금 잡혀가는 겁니까?”
테르지오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익명의 제보자가 쟈멜 양이 악신의 숭배자라고 고발했습니다.
“네?!”
저 멀리서 나를 찾아낸 쟈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전 무고해요!!! 완전 무고해요!!! 전 악신의 숭배자가 아니라고요!!! 도와주세요!!! 마르낙 사제님!!! 이 사람들이 무고한 절 잡아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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