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94)
94 화 시발!점(始發!點)
시발!점(始發!點)
도저히 가라앉을 줄 모르고 붉게 달아오른 두 볼.
“이게 참… 왜 이러지…”
다키아는 내게서 조금 거리를 벌리고 뒤돌아선 채 연신 자기 볼을 토닥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척이나 어색하다는 듯이.
그녀가 그렇게 자신의 볼을 달래는 사이, 나도 따로 달랠 것이 있었다.
‘살햇!!!’
어째서 냉큼 단둘이 연극 보러 간다고 수락했느냐는 타박. 나는 어머니를 톡톡 두드려 드리며 말했다.
“어차피 어머니도 같이 가시지 않습니까?”
‘살햇…?!’
‘그러고 보니…?!’라고 중얼거리신 어머니는 이내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내게 물어 왔다.
‘… 살해?’
혹시 좋아하는 거냐는 물음. 무척이나 직접적이면서도 조심스러움이 한가득 담긴 그 물음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다키아를 좋아하느냐? 좋아하긴 하지.
저렇게나 예쁜 여인이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혼자인 남자라면 그 누구라도 없던 애정이 무럭무럭 생기리라.
하지만 내가 다키아를 사랑하는가?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솔직히. 아주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무척이나 두려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나를 구원해 주었던, 남자. 상투스. 나는 그를 존경하는 동시에 무척이나 사랑했다. 이성적인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랑’으로.
하지만 그는 나 때문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내가 구해 주었던 리버켈 때문에.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상투스가 죽었던 건 내가 ‘부패의 사제’로서 해내야만 하는 과업을 회피한 탓이 아닐까.
‘이 세계’는 내가 ‘부패의 어머니’를 온전하게 부활시키길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주저앉아 어딘가에 안착하려고 할 때마다 내 소중한 것들을 부숴서라도 나를 등 떠밀어 버리지 않을까?
애초에 게임이었던 이 세계라면, 적어도 아직까진 내가 게임의 ‘주인공’인 이 세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자고로 이 게임의 ‘끝’을 봐야만 하는 존재였으니까.
어딘가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호사는 게임의 ‘엔딩’을 본 이에게만 허락되는 호사였다.
그래서 나는 두렵고 또 두려웠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분명 소중하지만, 언젠가 잃어도 크게 충격받지 않을 정도의 관계. 이 세계가 그 관계를 인질로 삼아 나를 등 떠밀 때,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관계.
그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병적일 정도로 금욕적인 삶을 택했다. 다행히 이 몸뚱이는 무척이나 이성에 잘 따라 주는 정교한 도구였기에, 여느 인간들처럼 한순간의 정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나날이 나의 힘이 강해지고 있는 지금. 솔직히 조금은 그런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조금 더 신뢰하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나는 어머니를 향해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우선입니다.”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그것이 비록 어머니가 직접 내 머릿속에 주입해 둔 것일지도 모르는 감정이라고 해도.
‘살해…!’
감동한 어머니가 부르르 떨며 여운에 젖어 있는 사이, 겨우 자신의 볼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다키아가 희미하게 달아올라 있는 볼과 함께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감히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내 가슴팍만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 연극을 보러 가기엔 조금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네?”
두서없이 튀어나온 한마디.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다키아가 재빨리 소리쳤다.
“오, 옷 사 드릴게요!!! 제, 제 돈으로 직접요!!! 그, 그러니까 오늘 같이 옷 보러 다니지 않으실래요!!!”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내 망설임 없는 승낙에 다키아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진짜요?!”
“제가 굳이 가짜로 같이 다닌다고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공녀님이 사 주실 새 옷이 무척이나 기대되는군요.”
그래, 이렇게 한 걸음 내딛는 거다. 단순한 동료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더 가까운 사이로.
다키아는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힘차게 말했다.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저희 이르멜가에 옷을 납품하는 재단사분이 있거든요! 그분이 진짜 옷을 잘 만드세요!”
다키아에겐 무척이나 미안한 이야기지만, 내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조금 다가가려 한다면, 이 ‘세계’는 과연 그녀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 또한 상투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계속해서 ‘부패의 사제’로서 어머니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 나아가는 이상,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물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오든 그녀를 최대한 지킬 생각이었지만, 만약 다키아가 내가 불러온 위험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면.
나는 ‘부패의 사제’로서의 과업을 끝낼 때까지 그 누구와도 일정 선 이상의 관계를 구축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마르낙 사제님…?”
“예?”
걱정 가득한 목소리. 다키아는 나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금빛 두 눈이 걱정으로 일렁였다.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오늘은 그냥 돌아가서 쉬실래요?”
나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잠깐 잡생각에 빠졌군요.”
“어떤…?”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연극이 이틀 뒤인 이상, 아무리 비싼 돈을 주더라도 결국 기성품을 수선해서 입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르멜가에 옷을 납품하시는 분은 아무래도 주문 제작 쪽에 특화되어 계실 거 같은데요.”
“앗?!”
다키아는 자신이 간과한 사실을 깨닫고는 부끄러운 것인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꾸했다.
“그, 그래도 일단 가봐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러도록 하…”
다키아에게 대답하던 와중, 길가에서 풀썩 쓰러지려다 뒤에 서 있던 사내에게 부축당한 남자를 발견했다. 길게 늘어진 샛노란 머리칼과 어딘가 익숙한 얼굴.
나는 용왕자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저쪽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앗…?”
근처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두 장의 표는 내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표였다. 나는 이내 용왕자가 무슨 의도로 이곳에 온 건지 대충 눈치챘다. 그리고 그건 다키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내 손목을 덥석 붙잡고는 용왕자가 있는 곳 반대 방향으로 나를 잽싸게 이끌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고는 물었다.
“옷 가게가 이쪽입니까?”
“아뇨. 정반대이긴 한데요. 괜히 저쪽으로 가다가 저 용왕자랑 얽히는 것보다야 조금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나을 거 같아서요.”
다키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보곤 지나가듯이 말했다.
“저는 진짜 저 용왕국 왕자한테는 단 한 푼의 관심도 없어요.”
“그렇습니까?”
“네. 진짜로요!”
나는 그렇게 다키아와 함께 걸어가며 슬쩍 뒤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왠지 모르게 뒤에서 원망 가득한 외침이 들려온 것 같았기에.
물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잘못한 점은 단 하나도 없지만.
***
“흐음…”
다키아는 무척이나 심오한 얼굴로 내 복장을 살펴보았다. 지금 나는 검은 천으로 이루어진 예복의 한쪽 어깨 위로 상반신의 일부를 가리는 망토를 착용하고 있었다.
‘살해살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어머니의 손은 잠깐 다키아에게 맡겨 두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조금 떨어져 있어도 목소리를 전하실 수 있는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내 복장을 품평했다.
다키아는 무척이나 진지한 눈빛으로 내 복장을 훑어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옷은 지금까지 입은 것 중에 가장 괜찮긴 한데, 조금, 아주 조금 뭔가 부족한데…”
‘살해…’
동감한다는 어머니의 대답. 다키아는 내 옆에 서 있는 중년 사내, 타일러를 향해 말했다.
“혹시 브로치나 액세서리 같은 것도 조금 있으신가요?”
“구비해 둔 것이 있습니다.”
타일러는 무척이나 우아한 동작으로 옆에 대기하고 있던 여인을 보내 무언가를 챙겨 오도록 지시했다.
솔직히 매번 헐렁한 사제복만 입고 있거나, 아예 웃통을 까고 다녔던 나는 이렇게 달라붙는 옷이 조금 어색했다.
게다가 내가 여기서 옷을 갈아입은 것만 해도 벌써 수십 벌째. 괜히 따라오겠다고 했나 싶었다.
잠시 후, 다가온 여인이 내 가슴에 커다란 푸른 보석이 박혀 있는 브로치를 달아 주자, 그제야 다키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덜 심심하고 딱 좋네요!”
‘살해살해!’
뭔갈 좀 볼 줄 안다는 칭찬. 다키아는 타일러를 향해 가볍게 말했다.
“저 옷으로 해서 주세요. 기장이 조금 안 맞는 부분은 내일까지 수선해 주실 수 있죠? 이틀 뒤에 입고 가야 해서요.”
“예. 공녀님의 부탁이시니만큼 최우선으로 처리해 두겠습니다.”
“아, 그리고요.”
다키아는 내가 벗어 둔 옷더미를 뒤적거려 몇 벌의 옷을 짚어 주며 말했다.
“이 옷하고, 이 옷. 나름 다 괜찮았으니까, 전부 다 살게요. 이것들도 전부 마르낙 사제님 몸에 맞도록 수선해 주세요. 아, 이것들은 굳이 급하게 처리하실 필요 없으니까 천천히 하셔도 돼요.”
‘살해?!’
어머니는 다키아의 과감한 소비에 깜짝 놀라서 탄성을 터뜨렸다. 나는 괜히 달라붙어 있는 목깃을 매만지며 물었다.
“너무 과소비하시는 거 아닙니까?”
다키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걱정 마세요. 저 돈 많아요.”
솔직히 조금 멋있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당당하게 돈 많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가난이 몸에 아주 지독하게 배서 한동안은 무리일 거 같지만.
나는 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벗어 원래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어머니의 손을 다시 내 가슴주머니에 넣었다. 다키아와 함께 옷 가게를 빠져나오며 그녀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진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요즘 돈을 무척이나 많이 쓰신 것 같은데…”
나와 카르멘에게 몸무게와 같은 양의 황금을 지급하고, 사지타에겐 그보단 조금 적지만 충분히 많은 돈을 지불해 준 건 아무리 북부왕국의 넷밖에 없는 대영주의 딸이라고 해도 절대 가벼운 지출이 아니었다.
다키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팔랑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왜냐면요…”
그녀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곤 내게 물었다.
“혹시 로클레스 상단이라고 아세요?”
“들어는 봤습니다. 북제국 쪽에서 유명한 상단의 이름이 아닙니까?”
내 대답에 다키아는 내 귓가에 대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사실, 거기 지분이 조금 많아요. 로클레스 상단이 아직 규모가 작던 시절, 제가 가진 돈을 모조리 쏟아부어서 투자를 조금 해 뒀거든요.”
“네?”
내게서 떨어진 다키아가 싱긋 미소 짓고서 말했다.
“설마, 마르낙 사제님은 제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곳으로 되돌아온 줄 아신 거예요? 저는 제 ‘황금’으로 가주의 자리를 노리려고 했어요.”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 다키아는 진짜로 금을 녹여 두 눈에 한가득 담았을지도 모르는 여인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깜짝 놀란 사이, 다키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 사실은 저만 아는 비밀이라 오빠랑 아버지는 모르시지만요. 거기다 막상 제 재산을 현금화하려면 로클레스 상단이 북제국이랑 남제국 사이에서 주로 활동하는 탓에 시간이 조금 걸려요.”
그녀는 내 팔목을 붙잡고 가볍게 말했다.
“그러니까, 제 돈주머니 사정은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히 즐겨 주세요. 얼른 저녁 먹으러 가요. 제가 예약해 둔 식당이 있거든요!”
“거기도 비싼 곳이겠죠?”
“에이, 괜찮아요. 마르낙 사제님은 돈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요. 제가 다 살 거예요! 얼른 가요.”
나는 그렇게 다키아에게 이끌려, 이곳 베아투스에서 가장 비싼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각 개인에게 따로 방을 제공하는 형태 덕분에 어머니도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살해! 살해! 살햇!!!’
어머니는 그야말로 볼 가득히 음식을 밀어 넣으며 식사를 마음껏 즐기셨다. 다키아는 진짜 어머니의 배가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음식을 시켜서 먹여 주었고.
나는 다키아가 이 기회에 비싼 음식으로 어머니를 암살하려는 줄 알았다. 진짜로.
‘ㅅ…ㅏ…ㄹ…ㅎ…ㅐ…’
더는 못 먹겠다며 어머니는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의자 위에 축 늘어졌다. 다키아는 그런 모습도 무척이나 귀엽다는 듯이 어머니를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다키아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정말 잘 먹었습니다.”
애초에 다키아는 내가 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나를 굳이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온 건 전부 어머니에게 음식을 대접하고자 한 것이 분명했다.
다키아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은 채 내게 대답했다.
“이틀 뒤의 연극. 정말 기대돼요.”
***
– 아 아 아 아 아 아 ! ! !
무대 위에 올라온 ‘아도라’가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재빨리 다키아의 귀를 막고 그녀를 내 품에 끌어안고서 부패의 문(文)을 한계까지 일으켰다.
관중들. 베아투스 각계각층에서 모인 중요 인사들의 머리통이 앞줄에서부터 차례대로 폭죽처럼 일제히 터져 나갔다.
비산하는 피와 살점들.
뭔가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내 귓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내려앉은 적막.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내 청각이 재생을 끝마쳤을 때.
극장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은 단 셋이었다.
나와 다키아. 그리고 가수 ‘아도라’.
새하얀 백발을 틀어 올린 여인은 무척이나 재밌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용케 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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