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00
101화
사실 그녀는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자신을 납치해 온 남자가 가여울 정도로 벌벌 떨고 있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그녀에게 과하게 집착하는, 지금은 감기에 걸려 콜록대는 남자가 그녀가 없어졌다는 것을 아는 건 시간문제였으며.
다 차치하고서라도 수가 틀리면 수갑을 부수고 달아나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납치당하기 직전에 형상화했던 권능이 아직 손에 남아 있었다.
금가루 같은 성력이 스멀스멀 움직이며 수갑의 수식 위를 덮었다.
‘여기서 조금만 힘을 주면 수식을 비틀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여기서 당장 개죽음당할 일은 없다. 리즈벨은 여유를 찾고 자세를 고쳤다.
“성녀라는 건 확실히 인기가 많은 위치인가 봐.”
수갑과 연결된 사슬을 쥐고 있던 사내가 흠칫 떨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리즈벨은 라타에로 와서 그녀를 원하는 인간들이 대체 몇 명이었는지 세어 보았다.
아시어스야 뭐 말할 필요도 없고. 유스타프에, 카잔에, 나르나크 공작에……. 하다못해 이 시골의 낯선 납치범까지. 그리고 그들 모두가 그녀를 얻기 위해 쓰는 방법들은 하나같이 전부 온건하지 않았다.
리즈벨은 약간 제 처지가 개탄스러워졌다.
“이 짓도 피곤하네.”
“서, 성녀님…….”
“더듬지 말고 제대로 말해.”
리즈벨의 푸른 눈이 남자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감히 헬라르의 성역에서 성녀를 납치해 오는 간 큰 짓을 자행한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겠지.”
“…….”
“네게 이유를 설명할 기회를 줄게.”
아시어스가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낼 시간이 얼마나 될까. 10분? 20분?
“네 주인이 오기 전에 나에게 너를 변호해 봐. 마음에 들면 숨은 붙여 놓으라고 말해 줄 테니까.”
“저는…….”
이제는 새파랗게 질려 가고 있는 남자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성녀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고, 제게는 거부할 권한이 없으니까요.”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는데?”
리즈벨의 눈이 가늘어졌다. 후보 몇몇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라타에의 황제? 아니면 카잔과 같은 이단자들?
그러나 리즈벨의 가정은 모두 틀렸다.
“지상에…… 마탑주의 허락을 받지 못한 악마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아십니까?”
“악마?”
남자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가정이 뇌리를 싸늘하게 스쳤다.
“잠깐. 설마 그 악마라는 게…….”
리즈벨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녀와 마주하고 있던 남자의 눈이 순간 텅 비어 버린 것이다.
“……!”
그리고 리즈벨은 본능처럼, 온실 바닥의 틈새로 스멀스멀 밀려 들어오는 기운을 알아차렸다. 검은 마력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두어 달 동안 바로 곁에 둔 아시어스의 악마들이 가진 기운과는 비할 바 없이 사악하고 악취가 나는 불순한 마력.
“아…….”
붉은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억은 순식간에 그녀를 과거로 돌려놓았다.
왜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나. 이 뼈가 시린 음습한 기운이 익숙할 이유는 단 하나뿐인데. 안다 뿐인가, 몸으로 겪었다. 그녀 손으로 단죄하지 않았던가!
리즈벨은 남자의 텅 빈 검은 눈과 온실 안을 번갈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네가 왜 여기에…….”
그녀를 찌르는 것은 발디마르의 기운이었다. 정확히는 발디마르의 왕성 전체를 시커멓게 물들이던 타락한 기운. 루시페가 최후에 소환한 악마, 마에바였다.
리즈벨이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녀 안의 권능이 요동쳤다. 파삭. 한쪽 손목의 수갑이 쩍 갈라지며 투둑 떨어져 내렸다.
“……!”
이지가 나간 남자가 그녀를 덮쳤다. 리즈벨은 간발의 차로 그를 피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밤색 머리, 정신 차려!”
리즈벨과 남자 주위로 두꺼운 금빛 결계가 쳐졌다. 종속의 사슬이 흔들리며 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성력이 결계 안쪽을 가득 채우다가 결계 안쪽의 땅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퀴퀴한 냄새가 물러가고 따스한 성력이 악마의 마력을 태우며 나는 증기의 냄새가 풍겼다. 성역이 선포되었다.
“허억…….”
그제야 남자의 눈에 빛이 돌았다. 리즈벨은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이름이 뭐야.”
“제…… 스터…….”
“그래, 제스터. 정신 차려. 저런 지저분한 것에 사로잡히지 말고.”
남자가 컥컥거리며 기침했다. 리즈벨은 그가 간신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재빠르게 온실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유리문 너머, 그녀를 쏘아보는 한 쌍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길고 거대한 주름진 몸체. 머리에 뿔처럼 돋은 더듬이. 흰자 없이 시뻘건 두 눈.
리즈벨은 이를 악물었다.
“분명 내가 죽였는데.”
마에바. 지네 형상을 한 악마. 그것은 아버지가 오라비의 시체와 그 자신의 영혼을 제물로 바쳐 불러낸 악마이자 루시페가 최후에 저지른 죄악이었다.
마에바의 몸통에 달린 수백 개의 다리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수십 배로 길어진 서른 개가 넘는 다리가 유리문 틈을 비집고 그녀의 성역 안으로 침입해 왔다.
리즈벨은 이를 악물고 제스터를 돌아보았다.
“말해.”
푸른 눈에 핏발이 섰다.
“전부 말해. 무슨 짓을 작당했어? 무슨 짓을 했기에…….”
그녀의 손으로 정화했던 마계의 악마가, 루시페의 심장과 함께 몸통 한중간을 꿰뚫렸던 악마가. 왜, 발디마르에서 대륙 절반만큼 떨어진 이 라타에의 남부 지방에 있는가. 왜?
눈앞을 하얗게 채우는 것은 발디마르 최후의 밤의 기억이었다.
루시페의 심장에 성력으로 물든 검을 박아 넣던 날.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전부 없애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루시페와 지칼의 조각이나 다름없는 저것이 눈앞에 생생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리즈벨은 감정이 격해지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영혼을 묶은 사슬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마에바와 계약했어?”
제스터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리즈벨은 성마르게 물었다.
“그럼? 마에바가 나를 데려오라고 하던?”
“커흡.”
“넌 무슨 납치범이 이렇게 형편없는 거야, 대체!”
결국 리즈벨은 짜증스럽게 성력을 억지로 그의 몸에 욱여넣었다. 억지로 숨통을 뚫어 주자 그제야 제스터가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에바의 몸집은 점점 불어나 유리 온실의 천장까지 덮어 가고 있었다.
“이 이상 입을 다물고 있으면 넌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히이익. 마, 말씀, 말씀드리겠습니다!”
리즈벨이 금빛 낫을 그의 목으로 들이밀고 나서야 제스터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의 전말은 이랬다. 113년 전 뤼켄가가 멸문하던 때, 네키엘의 별장을 제외한 공가의 저택과 모든 사유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별장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 별장에 감도는 마력 때문이었다.
검은 마력. 즉, 악마의 마력. 보통의 마법으로는 별장에 감도는 악마의 힘을 긁어낼 수가 없었다.
하여 약 70여 년 전, 당대의 마탑주가 별장의 검은 마력을 모아 작은 핵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핵을 별장에 남은 옛 공가의 유물에 넣어 놓았다.
그 핵의 존재는 한동안 마법사들 사이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마계로부터 소환된 악마들의 마력. 소환자도 없이 지상을 떠도는 검은 마력의 결집체. 그것이 마에바를 끌어들였다.
“두어 달 전부터…… 저것이 네키엘의 마법사들을 하나씩 납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두어 달 전. 리즈벨은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발디마르에서 그녀가 마에바와 루시페를 처단한 시기와 엇비슷했다.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에바는 죽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정화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게 분명했다.
간신히 그 자리에서 도망쳐 그와 같은 힘이 모여 있는 이곳 네키엘까지 흘러들어와 별장의 핵을 삼키고, 이곳을 거쳐 가는 수많은 마법사에게 기생한 것이다.
“저것이 성녀를 데려오라 명령했습니다. 그러면 살려 주겠다고…….”
눈앞이 아찔하게 돌았다. 루시페가 죽은 것은 확인했다. 마에바도 당연히, 소환자가 죽었으니 소멸했거나 마계로 역소환된 줄 알았는데.
‘혹시 아버지도 살아 있는 건…….’
리즈벨은 그 끔찍한 가정에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렸다. 이미 찢겨 피가 배기 시작한 입술이 다시 세게 짓눌렸다. 다시 저 지네 악마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다시 과거의 기억이 발목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벗어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지긋지긋한 왕성의 그림자가 아직도 그녀에게 드리워져 있다.
지칼과 루시페의 영혼은,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나?
살의가 치솟았다. 리즈벨은 사슬을 쥐고 제게로 확 끌어 오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시어스가 아플 거야. 그가 아플…….
리즈벨이 주먹을 하얗게 쥐며 스스로에게 세뇌하던 순간이었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지네의 입이 양쪽으로 쭉 찢어졌다. 육식 동물의 것 같은 이빨 수십 개가 전부 드러나 보였다.
마에바가 그로테스크하게 웃으며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냈다.
[이게 누구야.]큭큭. 소름 끼치게 웃는 검은 눈이 희번덕거렸다.
[내 몸을 갈라 버렸던 성녀 아니야?]“……마에바.”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얀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들어갔다.
키에에엑-.
마에바가 울부짖으며 입을 쩍 벌렸다. 입 안에 다닥다닥 붙은 날카로운 짐승의 송곳니가 당장이라도 유리문을 깨고 그녀에게 달려들 듯 매섭게 성역의 결계를 긁었다.
튕겨 나오는 악마의 마력이 성역의 결계에 부딪히며 치익 증발했다.
리즈벨은 신음을 삼키며 악마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살아 있지?”
마에바가 노래하듯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