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03
104화
리즈벨이 무엇을 건드렸는지, 또 무엇을 보았는지 알았다. 별장에 깃든 유년의 기억이다.
헬라르를 피해 이곳 네키엘까지 도망했던 그의 어머니가 죽던 날의 기억. 그걸 그녀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분노에 부채질했다.
아시어스는 머리만 남아 꿈틀거리는 마에바에게로 다가갔다. 발로 마에바의 턱을 콱 밟고 한 손으로 지네의 주둥이를 억지로 벌렸다.
안쪽에 다닥다닥 붙은 징그러운 이빨들이 드러났다. 마에바에게서 그의 옛 가문의 마력이 흘렀다. 아시어스는 서느렇게 굳은 얼굴로 다른 손을 지네의 주둥이 안으로 처넣었다.
[커억.]마에바의 몸에 감돌던 검은 마력이 지네의 세포벽을 긁으며 아시어스의 손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에바의 크기가 점차 줄어들었다. 애초에 핵에 깃든 마력으로 불린 몸이었다.
마에바의 머리가 성인 남자가 웅크린 크기만큼 줄어들었을 때, 아시어스는 자신의 마력을 엮었다.
파괴력 짙은 붉은 마법진이 마에바의 목청 아래 깊은 곳에 새겨졌다. 경보등처럼 두어 번 반짝이다가, 폭발했다.
마에바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수천 갈래로 찢겨 나갔다. 아시어스는 걸쭉한 잔해들이 바닥과 반쯤 부서진 벽, 그 뒤의 풀밭에까지 달라붙는 광경을 무심하게 관전했다.
더러운 파편들은 아시어스의 몸에 닿기도 전에 불씨로 화했다.
“흡…… 허억.”
눈도 감지 못하고 그 광경을 목격한 제스터가 숨을 컥 들이켰다.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서늘한 잿빛 시선이 그에게 박힌 것이다. 너무 뜨거워서 외려 차가웠다.
아시어스는 바닥에 질척하게 널린 마에바의 잔해를 뒤로하고 제스터에게 다가섰다. 그 모습이 가히 악마보다 더한 죽음의 사신이라 부를 법했다.
“저것에게 사로잡히고도 죽지 않았다, 라…….”
아시어스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열감이 어려 있었다. 잿빛 눈이 움직였다.
제스터가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붙잡은 사슬과 그 끝에 매달린 수갑을 담았다.
리즈벨의 피가 수갑에 묻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눈이 뜨거워졌다. 아시어스는 미친놈처럼 광포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역시 곱게는 안 되겠어.”
마에바를 짓이긴 것과 똑같은 붉은 마력이 섬광처럼 빛났다.
* * *
리즈벨은 사위가 다시 고요해지고 나서야 라제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캄캄하던 시야에 갑작스레 빛이 들어오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빛에 적응하기 위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는데, 누군가 그녀 앞에 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시어스.”
서쪽으로 반쯤 기운 태양을 비스듬히 비켜난 남자의 얼굴은 역광에 온통 잠식되어 있었다. 리즈벨은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
차가운 손이 천천히 그녀의 손 위에 얹혔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이 끌어당기는 대로 자세를 낮추었다. 그가 리즈벨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요.”
“뭘?”
리즈벨의 목소리는 까슬하게 잠겨 있었다. 흰 얼굴이 창백한 것이 간신히 갈무리한 잿더미 같은 마음을 다시 쿡쿡 들쑤셨다.
아시어스가 조용히 물었다.
“또 있어요? 당신을 다치게 한 것.”
리즈벨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기억 속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얼굴에 그 여자의 얼굴을 덧그려 보았다. 눈매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여자의 눈매가 좀 더 따듯하고 둥글었다. 하지만 검은 머리카락과 창백한 뺨. 불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입술의 모양. 그래, 확실히 닮았다.
그의 입술이 달싹여지는 게 보였다.
“내가 다시 미치는 꼴 보기 싫으면 말해요. 당장.”
그제야 리즈벨은 시선을 들었다. 회색빛 눈이 또다시 서느렇게 가라앉기 직전이었다.
“얼른. 제발.”
재촉하는 목소리가 꼭 애원이라도 하는 듯했다. 둑을 터뜨리려는 분노를 어떻게든 참아 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통증을 호소하기라도 하면 울분이 당장 폭발할 것처럼 위태로웠다.
리즈벨은 멍하니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 저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리…….”
갑작스레 매달리다시피 안긴 몸에 균형이 어긋났다. 아시어스는 가까스로 팔로 뒤로 넘어갈 뻔한 몸을 지탱했다.
리즈벨이 이만큼의 무게로 그에게 매달리는 날은 흔치 않았다.
“어디 아파요?”
아시어스는 왈칵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가, 제 목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흔드는 움직임에 눈을 깜빡였다.
“그럼 왜……. 아.”
아, 봤구나. 정말로 봤어.
여자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것이 누구의 심장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몸이 가까이 맞붙었다. 귓가에 불규칙한 숨소리가 닿았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은 마주 안지도 못한 채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리즈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땅을 온통 다닥다닥 뒤덮었던 붉은 마력이 휘릭 증발했다. 죽은 악마의 시체가 화형식에 휘말리듯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지상에 허락받지 못한 악마가 최후를 맞은 곳에, 그들 둘이 결코 놓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과거의 흔적이 짙게 맴돌았다.
* * *
“이런 건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요.”
아시어스는 자꾸만 바르작거리며 몸을 물리려는 여자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이리 고개 돌려 봐요.”
푸른 눈에 약한 반항의 빛이 떠올랐다. 아시어스도 질세라 눈에 힘을 주었다. 푸른 시선과 잿빛 시선이 허공에서 찌릿 부딪쳤다.
“…….”
오늘 져 준 것은 리즈벨이었다. 그녀는 약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아시어스 쪽으로 완전히 돌렸다. 희고 둥근 이마 오른쪽에 세로로 긴 상처가 나 있었다.
“이게 별거 아니에요?”
아시어스는 치밀어 오르려는 화를 꾹꾹 참아 가며 상처 주위를 약하게 문질렀다. 리즈벨은 마지못해 한 마디 했다.
“그냥 스쳤을 뿐이야.”
아시어스는 대답도 하지 않고 침대 옆 탁자에서 연고를 집어 들었다. 마법을 쓰면 흔적도 없이 낫기야 하겠지만, 그건 근본적인 의미의 치료는 아니었다.
아시어스의 목소리가 서러워졌다.
“흉 지면 어떡하지.”
“없애 줄 거잖아.”
“내가 없으면 다시 상처가 벌어질 거예요.”
“내 옆에 네가 없을 리가 없잖아.”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말에 그가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회복하고 연고를 환부에 펴 발랐다.
“손도 이리 내요.”
“유난은…….”
리즈벨은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시어스는 더 듣지 않고 리즈벨의 손목을 가로챘다.
리즈벨은 이마와 양 손목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나서야 그의 손에서 풀려났다. 이젠 그녀의 차례였다.
“이리 와.”
“……?”
아시어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리즈벨의 손목을 내려다보다 그녀에게 팔이 붙들렸다.
“왜, 왜?”
리즈벨은 대답 없이 줄곧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시어스의 어깨에 덮었다.
“……?”
아시어스는 제 상체를 덮은 두껍고 보드라운 털실의 촉감에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머리칼을 치우고 이마를 짚는 손이 거침없었다.
리즈벨은 잠시 열을 재어 보고 얼굴을 굳히며 그를 더 세게 잡아당겼다. 힘을 줘 봤자 아시어스에게는 우스운 정도였지만, 그는 늘 그렇듯 속절없이 그녀에게 끌려갔다.
“열나.”
리즈벨은 그를 침대 헤드 앞에 앉혀 두고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를 담은 푸른 눈이 복잡한 빛을 띠었다.
“머리 안 아파?”
“안 아픈데.”
“목은?”
“안 아파요.”
아시어스는 리즈벨과는 달리 거짓말을 밥 먹듯 했다. 그러나 거짓을 말하는 족족 티가 났기 때문에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자꾸 거짓말할 거야?”
“거짓말 아닌데…….”
리즈벨은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아시어스는 제 어깨에 덮인 겉옷을 꼭꼭 여미는 손길을 받다 결국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리즈벨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이리저리 끌어당기고 밀어내곤 했지만, 아시어스가 그녀에게 닿을 때는 늘 이토록 조심스러웠다.
“감기는 심각한 병이 아니에요.”
“심각한 병은 아니지만 요양 올 정도의 병이긴 하지.”
그에게 끌어안긴 리즈벨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러나 이내 돌아오는 한숨.
“아까 내가 사슬을 세게 당겼는데, 괜찮아?”
“네.”
“…….”
이제 리즈벨은 그의 대답은 전부 역으로 바꿔 듣기로 했다. 아시어스는 모로 봐도 괜찮지 않았다. 그는 제게서 감기를 옮았고, 그리고 종속의 사슬에 졸리며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나는 네가 아픈 게 싫어.”
“네?”
“나도, 네 몸 아주 작은 곳에라도 상처가 나는 게 싫다고.”
리즈벨은 입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그의 몸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흉터들이 갑작스레 짙은 현실감과 함께 떠올랐다.
아시어스는 제 몸에 가득한 흉터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다.
리즈벨은 손을 내어 아시어스의 옷 위로, 왼쪽 쇄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죽 훑었다.
“……?”
아시어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리즈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옷 아래로 손을 넣어 그의 등을 더듬었다. 그녀의 손길에 긴장하는지 등 근육이 움찔 떨리며 힘이 들어갔다.
“왜…… 왜요?”
리즈벨은 목이 넓고 헐렁한 검은 상의 너머로 보이는 또 다른 흉터 끄트머리를 문질렀다. 너무 많은 감정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차올라 넘실거렸다.
아시어스는 한동안 리즈벨이 제 몸을 만지는 걸 느꼈다. 대담하게 미끄러진 손이 장골 언저리까지 내려가자 중심에 금세 피가 몰렸다. 숨까지 멈춘 채 그녀의 손길을 받던 그가 돌연 키들거렸다.
“이건 무슨 뜻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