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04
105화
“이건…….”
한순간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렁거렸다. 통증이다. 이마나 손바닥의 상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상흔이 그녀의 심장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리즈벨은 목구멍 위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겨우 삼켰다.
“……이건.”
꼭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즈벨은 엉망으로 뒤섞이는 속을 가라앉힐 방법을 본능적으로 찾아냈다.
“이건…….”
아시어스의 오른쪽 옆구리 부근에 머물러 있던 리즈벨의 손이 다시 가슴을 스치고 올라왔다.
그녀는 그의 목을 제게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내가 지금, 너랑 자고 싶다는 뜻이야.”
붉은 입술이 남자의 턱 언저리를 스쳤다. 바싹 말라 있던 잿빛 눈에 열기가 끓어오르는 건 순간이었다.
리즈벨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키스했다.
순식간에 자세가 뒤바뀌며 동시에 리즈벨이 입고 있던 부드러운 겉옷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부터 이러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게 기민한 동작이었다.
“오늘은 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데.”
드레스 앞섶과 속에 얇게 받쳐 입은 슬립이 한꺼번에 훅 끌려 내려갔다. 드러난 맨가슴에 찬 공기가 닿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시어스의 손길은 급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리즈벨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동시에 마른 손이 결코 부드럽다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조급하게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흣…….”
아래에서는 금세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날카롭게 할퀴는 듯한 쾌감이 리즈벨의 머릿속에 진득하게 엉겨 붙은 상념들을 전부 몰아냈다. 뻗은 손에 새카만 머리카락이 걸렸다. 그녀는 손을 밑으로 내려 검은 상의의 목깃을 잡아당겼다.
“벗겨 주려고요?”
리즈벨은 은밀한 곳에서 턱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쾌감에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벌어진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시어스가 날카로운 빛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키득 웃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벗겨 주길 기다릴 여유가 없는데.”
쪽. 그가 그녀의 몸에 질척하게 키스했다. 아시어스의 셔츠 단추를 풀던 리즈벨의 손이 움찔거리며 멈추었다. 대신 엉망으로 셔츠를 움켜잡았다.
“……!”
숨 한 번 내쉴 틈도 주지 않고 거칠게 몰아붙여지는 바람에 채 소리도 내지 못했다. 어질어질한 쾌감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 같다는 아시어스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시간의 흐름이 뚝 멈춰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득한 쾌락이 그와 맞붙은 부위를 지글거리며 내달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억눌린 신음이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후…… 나 안아 봐요. 더 가까이.”
턱을 타고 흐른 굵은 땀방울이 리즈벨의 가슴께로 뚝 떨어졌다. 아시어스가 목으로 우는 듯한 소리로 그녀를 얼렀다.
“얼른. 제발. 응? 조금만 더…….”
리즈벨은 도리질 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이 상태에서 더 가까워지면 어떤 쾌락에 잡아먹히는지 알았다. 도가 넘은 희락은 늘 공포심을 동반했다.
조급하게 채근해오는 그를 피해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입술이 따라붙었다. 깊숙이 뒤섞이는 혀에 어느 순간 몸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 찰나를 아시어스가 놓칠 리가 없었다.
“아……!”
허벅지 안쪽을 움켜쥐고 세게 위로 꺾어 올린 손아귀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손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더운 열기를 띠고 몸 구석구석을 지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리즈벨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덜덜 떨며 애원했다.
“아시어스, 뜨겁…….”
목소리와 신음이 자꾸만 목구멍에서 턱턱 걸렸다. 몸이 아득한 정점을 향해 쉼 없이 떠밀리다,
결국에는 예감했던 절정의 파도가 그녀를 덮쳤다.
“아……!”
다 벗겨지지 못하고 골반에 걸린 드레스의 바스락거림이 일순 멈추었다. 허리가 딱딱하게 굳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경련하는 곳이라곤 오직 한 곳밖에 없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 기어이 켜켜이 쌓였던 위태로이 넘실거리던 쾌락의 둑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으응……!”
시야와 사고가 하얗게 점멸한다. 이 순간에는 늘 무엇도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푸른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윽…… 후우.”
남자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급박하게 반복했다. 그가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미칠 것 같아.”
“하으…….”
“당신을 안고 있을 땐 내가 내가 아니게 된 것 같다고……. 당신은 절대 모르겠지, 이런 기분. 제기랄…….”
답할 기력을 전부 소진했다. 모르지 않는다고. 나 또한 그렇다고 답을 돌려주는 대신 리즈벨은 남자를 온몸으로 받아 안았다.
* * *
옷을 다 벗지도 않은 채로 시작된 관계는 두 사람 다 나신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 더 지나서야 파정을 맞이했다. 열락이 물러간 뒤에도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까부터 나보다는 내 몸에 더 관심이 많네요, 아가씨.”
아시어스가 포식이 끝나 나른해진 얼굴로 웃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리즈벨은 모로 누워 그의 몸에 난 흉터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안 아팠어?”
“뭐가요?”
“이 상처들.”
리즈벨의 손을 그대로 낚아 올린 아시어스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만지면 다시 덮치고 싶어질지도 몰라.”
“아, 그건…….”
그건 무리다. 격한 관계는 제멋대로 파도치던 감정들을 잠재운 대신 피로감과 허리의 둔통을 가지고 왔다.
“농담이에요.”
단단한 팔이 그녀를 제 몸 위로 올렸다.
“오늘은 내가 좀…… 거칠었죠. 미안해요. 조절이 안 돼서.”
“괜찮아.”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리즈벨은 머리에 꾹꾹 닿는 입맞춤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상처들, 어쩌다가 다쳤던 건지 물어봐도 돼?”
“벌써 얼추 짐작하고 있으면서 모른 척은 왜 합니까?”
아시어스가 낮게 웃었다.
“들으면 내가 미친놈처럼 느껴질걸요.”
“왜?”
“내 몸이 이 지경이 났는데 당신과 이러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거든요.”
그러나 이어지는 짧은 입맞춤은 다정하고 달콤했다.
“이 흉터들에 대한 건 나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대신 다른 거.”
“다른 거?”
“다른 거 한두 개 정도는 대답해 줄게요. 물어봐요. 궁금한 거.”
아시어스는 리즈벨의 속내를 전부 파악한 것처럼 굴었다. 리즈벨은 잠시 회색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이미 내가 너를 어느 정도는 아는 것 같다고,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말을 조금 바꾸었다.
“이 별장에서 보냈다던 어린 시절이 정확히 언제야?”
“글쎄, 언제더라. 여덟 살……. 아니지.”
아시어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 같았다.
“아홉 살…… 아니, 열 살 초겨울까지는 여기서 보냈던가. 그 뒤로 몇 년은 안 오다가, 열세 살에 어머니와 형과 함께 왔었어요.”
“그게 언젠데?”
“그건 정확히 기억하고 있죠. 지금으로부터 딱 113년 전이네요.”
답은 의외로 시원스럽게 나왔다. 이미 알고 있던 답인데도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맨살을 맞대고 있으니 그 작은 동요도 고스란히 전해진 모양이었다. 아시어스가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쓸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난 당신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실은 내 조상뻘이라는 걸?”
“그렇게 거리감 두기입니까?”
말을 고르기도 전에 튀어 나간 말은 실없는 농담이었고, 돌아오는 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려울 것 없어요. 명을 늘렸죠. 당신 아버지가 썼던 방법 그대로.”
악마 소환. 리즈벨은 신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켰다.
“왜 수명을 늘렸는데?”
“헬라르의 성녀가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아시어스의 손이 그녀의 허리와 골반 사이의 곡선을 쓰다듬었다.
그가 남겨 둔 붉은 흔적이 가득했다.
“알잖아요. 나는 헬라르와 성녀를 걸고 내기를 했고. 원래대로라면 다음 대의 성녀가 곧바로 나타나야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태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아서.”
“…….”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나 할까.”
아시어스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농담기가 다분했다. 리즈벨은 결국 고개를 들어 저를 끌어안은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왜요?”
“……아냐.”
그 얼굴에는 정말로 아무런 감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냥, 담담한…….
“뭐 어쨌든. 그래서 기다렸죠. 하염없이. 이것저것 건드려도 보고, 뭐 한 건 많았어요.”
아시어스가 그녀의 윗입술을 살짝 깨물고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또? 궁금한 거.”
“……네 이름은 본명이야?”
“본명이에요. 옛날에는 가명을 쓰기도 했는데, 몇 세대가 지나니까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더라고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건…….”
“사람들은 금방 잊던데요. 100년쯤 전에, 라타에 마탑이 건국되기도 전에 제국을 휘어잡았던 마법 가문이 하나 있었다는 것쯤은.”
“…….”
“신벌을 받아 멸문한 가문의 성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데는 10년도 채 안 걸리던데.”
아시어스는 이제 리즈벨의 금빛 머리카락 타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 전부를 한 번씩은 쓰다듬어야 만족할 모양이었다.
“이 별장은 내 어머니가 죽은 곳이에요. 당신은 아마 그걸 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