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07
108화
라제가 천천히 문고리를 놓고 옆으로 물러났다. 문틈으로 보이는 것은 눈부신 금빛 머리칼 끄트머리였다.
사락. 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시어스는 급히 문을 열어젖히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여자를 돌려세웠다.
“리즈벨.”
푸른 눈이 느리게 그에게로 향했다. 아시어스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었다.
“이렇게 일찍 깰 줄 몰랐네. 왜 벌써 일어났어요?”
“…….”
“오늘도 맨발이네요.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또 감기 걸릴 거야.”
그렇게 지껄이면서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들었구나. 아시어스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배어들었다.
“리즈벨. ……듣고 있어요?”
그녀에게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불쑥 초조한 마음이 튀어나왔다. 아시어스는 조급한 동작으로 그녀를 품으로 끌어들였다.
“뭐라고…… 말 좀 해 줘요. 그렇게 가만히 보지만 말고…….”
리즈벨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더듬어 안는 남자를 느꼈다.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는지 턱을 들어 깊숙이 입을 맞추는 그의 동작이 평소보다 조급했다.
“아시어스.”
입술이 미세한 틈을 두고 떨어졌을 때, 리즈벨은 조그맣게 뇌까렸다.
“너는 변하지 않은 거지?”
막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키려던 아시어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푸른 눈과 잿빛 눈이 지척에서 맞닿았다.
그 눈에 언젠가 로제스의 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눈이었다.
죽은 눈. 그제야 리즈벨은 명확히 깨달았다.
이 남자는 그녀로 인해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다른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 없었다. 이미 수많은 세월 동안 찾았을 테니까. 그리고 결론을 내렸을 테니까…….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라고.
그의 사랑과 그녀의 사랑은 달랐다. 분명히 사랑이라는 같은 이름 아래 놓인 감정인데도 그 불꽃 같은 감정에 불어 드는 바람의 방향이 달랐다.
리즈벨의 모든 순간순간에, 그녀가 그리는 미래에, 그녀의 세계에는 아시어스가 있었다. 그러나 아시어스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내건 약속으로 인해 지금 이 순간을 살았다.
때가 되면 그 손에 죽어 주겠다는 그 약속으로 인해서. 그가 지난 100여 년의 삶을 그렇게 버텨 왔듯이.
리즈벨은 불씨가 죽고 남은 잿더미 같은 눈을 보며 나직하게 되뇌었다.
“너는, 언젠가는 나를…….”
그를 살게 하는 것은 그녀의 죽음이었다. 여전히.
그날 밤, 리즈벨은 또다시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꼭 사후 세계 같은 지독한 암경 속에 갇히는 악몽이었다.
Chapter 9. 탐색
그날 이후로, 별장에는 전에는 없던 기묘한 기류가 생겨났다. 보는 이까지 어색함에 몸을 비틀게 하는 숨 막히는 공기였다.
리즈벨은 성전으로 향하는 걸음을 끊었다. 거기에 가서 권능을 좀 더 다뤄 본다 한들 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모르겠다. 분명 그들을 구할 것들을 찾아보자고 약속했었다. 그 방법을 찾지 못하면 죽어 주겠다고 먼저 말했던 것도 그녀였다.
아시어스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는 처음부터 그런 남자였을 뿐이다. 아시어스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 사랑은 그녀의 죽음이라는 전제 조건 위에서 성립한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아시어스는 종일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움직이는 기척만 내면 별장의 마력이 티 나게 일렁거렸다.
리즈벨은 별장의 복도 한가운데에 뚫린 커다란 창문 앞에 서서 별장을 둘러싼 절벽을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뚝 멈췄다. 그리고 급하게 오던 길을 돌아간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일상이 된 두통에 골이 쪼개지는 것같이 아팠다. 리즈벨은 급하게 계단 옆으로 몸을 숨긴 남자를 향해 건조한 물음을 던졌다.
“왜 너는 나와는 이렇게 다른 거야?”
마음의 무게가 다른 걸까? 아니면 겪어 온 생의 무게가 그렇게 다른가? 왜 너는 죽음을 향해 서 있지? 왜 너의 미래에는 내가 없지? 아니, 그 이전에 아시어스에게 미래라는 게 있기는 한가?
가시 돋친 생각의 가지가 아무렇게나 뻗어 나갔다. 토기가 치밀었다.
“왜 네게서 희망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을 수가 없는 걸까.”
아시어스가 자리를 뜨려는 듯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리즈벨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있잖아. 방법을 찾았어, 아시어스.”
처음 그에게 종속되던 때에 비하면 늘어날 대로 늘어난 종속의 사슬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선택지는 두 개야. 네가 죽든가, 내가 죽든가.”
리즈벨은 죽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절대 가치가 있다면 생존이었다.
그러나 그 판단의 잣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로제스. 두 번째는 아시어스.
리즈벨은 로제스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어 줄 수 있었다. 아시어스를 위해서도…….
손이 덜덜 떨렸다.
“너 진짜 밉다.”
네 손을 잡지 말걸. 저 눈에 생기가 깃드는 걸 사랑스럽다고 여기지 말걸. 네 눈물에 약해지지 않고, 네 과거를 가엽게 여기지 말고, 그냥 전부 무시해 버릴걸.
“진짜 미워.”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미친 건 저 잿빛 눈을 빛나는 삶을 향해 돌려놓을 수 있다면 죽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다. 멍청한 불나방.
그만큼 자신을 명쾌하게 드러내는 수식어가 또 없을 것이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리즈벨이 늘 엉망으로 헤집어진 속을 해소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이리 나와, 아시어스.”
“…….”
“안아 줘.”
서로가 미워질수록 서로가 더욱 간절해진다. 독인 줄 알지만 끊을 수가 없는 마약처럼 무서운 감정. 대체 이런 관계를 뭐라고 정의해야 하는가.
* * *
아시어스는 쓰러지듯 잠든 여자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자요?”
괜히 한번 물어보았다. 하얀 몸에 금빛 머리카락과 시트가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가 별장 꼭대기 다락방에서 혼잣말하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리즈벨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틈만 나면 읽던 고서들에서 손을 뗀 것은 물론이고, 성전을 방문하던 것도 멈추었다.
“안아 줘.”
대신 그녀는 그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너 사람 홀리는 거 잘하잖아.”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아시어스는 도무지 그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더 세게. 더 거칠게. 내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리즈벨은 앵무새처럼 그 말을 반복했다.
“내가 이러다 그냥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거칠게 안아 줘.”
그녀는 무언가를 포기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에게 입을 맞붙였고, 더 큰 자극을 원했다. 이러다 어디 한 군데 다치기라도 할까 봐 자중하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어떻게든 달래 보려 애써도 푸른 눈에 눈물이 고이기만 하면 결국 가득 끌어안아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 리즈벨은 지금껏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고백을 했다.
“사랑해.”
마치 그것이 이 모든 행위의 단 한 가지 이유라는 것처럼. 그 고백은 그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에게 세뇌하는 것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 고백으로 무엇을 합리화하려는 걸까.
아시어스는 리즈벨이 지난밤 속삭였던 모든 말들을 되짚었다.
사랑해. 그러니까 너를 살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안 무서워.
어차피 처음도 아닌걸. 혹시 모르잖아, 죽음 뒤의 세계가 이보다는 더 행복할지도.
“…….”
그 말에 기뻐야 하는데. 아시어스는 여자의 목과 어깨 사이의 곡선에 얼굴을 파묻고 체향을 깊이 들이쉬었다.
어제는 그 말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제 마음이 더는 일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았는데도 충족감은커녕 씁쓸함이 몸집을 불렸다.
리즈벨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리즈벨은 그를 가여워하는 걸지도 모른다. 별장에 남은 그의 마지막 유년을 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죽어 주겠다고 말하는 걸까? 자신이 불쌍해서?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해 준 걸까?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심하다 싶을 만큼 몰아붙이면서도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이 남았다. 쾌락의 정점을 찍으면서도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아시어스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두 영혼을 묶은 종속의 사슬이었다.
* * *
리즈벨의 세계는 밝았다. 그의 영혼 속 세계가 해가 진 후의 어스름마저 가라앉은 한밤중이라면, 그녀의 세계는 한낮이었다.
아시어스는 꼭 리즈벨의 머리카락 색 같은 햇살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그녀의 눈동자를 닮았다.
“예쁜 하늘이네.”
그는 리즈벨의 무의식 속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그와 연결된 사슬을 통해 영혼을 탐색하는 것은 그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종종 리즈벨의 생각을 읽곤 할 때 썼던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깊숙한 무의식까지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다. 아시어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도 익히 아는 장소였다.
전운이 감도는 발디마르의 왕성. 간만이다. 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탑이 보였다. 리즈벨이 지내던 동쪽 탑이 치솟아 있었다. 벌꿀빛 금발의 남자가 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죽은 1왕자, 지칼이었다.
어느 순간으로 들어온 것일까. 의문을 가진 순간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아시어스는 역시 낯익은 방에 와 있었다. 황량하고 차가운 작은 방. 일국의 왕녀가 지내는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침실에, 리즈벨이 있었다.
아시어스는 그녀를 보고 조금 놀랐다. 어렸다. 열넷, 아니면 열다섯. 그 정도 되었을까. 지금보다 더 작고 가녀린 소녀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목과 어깨가 한눈에 보기에도 뻣뻣하게 경직된 채였다.
“왕녀님, 1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흠칫, 리즈벨이 몸을 떨었다. 입꼬리가 파들거리며 추켜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극도의 공포감에 좀먹히고 있는 것이 확연히 티가 났다. 낯선 모습이었다.
아시어스가 아는 리즈벨은 속내를 고스란히 얼굴로 비치는 여자가 아니었다.
‘어려서 그런가…….’
어렸을 적에는 지금처럼 눈앞에 죽음이 닥쳐도 지금만큼 의연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시어스는 창가에 기대서서 지칼이 침실로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안녕, 누이야.”
왕자가 이를 드러내며 다정하게 웃었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고마워요, 오라버니.”
리즈벨은 맹수 앞에 놓인 작은 새끼 짐승처럼 덜덜 떨었다. 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등에 새하얗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시어스는 또다시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봤자 고작 네다섯 해 전의 과거일 텐데, 그사이에 사람이 그렇게 바뀌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