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09
110화
* * *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 리즈벨은 일어나자마자 끊김 없이 재생되는 간밤의 꿈에 인상을 찌푸렸다. 발디마르에 있었을 때나 꾸던 꿈이었다.
되살아나기 전, 그녀가 지칼에게 독살당하던 날의 꿈. 그러나 전에 꾸던 꿈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숨이 끊기고 나서, 그녀를 덮쳤던 암흑. 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이야, 리즈벨.]귓가에 바짝 대고 속삭이는 소리였는데도 누구의 것인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리즈벨은 또다시 그 암경에 한참을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러다 드디어 깨어나나 했더니, 갑자기 회귀하던 어린 날의 자신으로 돌아온 날의 꿈을 이어 꾸었다.
죽을 수도 있겠다고 각오하자마자 이런 꿈을 꾸다니. 꼭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얼른 집어치우라는 계시처럼.
리즈벨은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에서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둔한 통증이 올라왔다.
아시어스는 곁에 없었다. 관계 후에 그가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시어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종속의 사슬을 살짝 톡톡 건드려 봤지만, 그에게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라제?”
게다가 검은 돌 사자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존재감을 읽어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곧 돌아오겠지. 아시어스는 그녀를 혼자 오래 내버려 둘 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리즈벨의 오판이었다.
아시어스는 잠깐 곁을 비운 것이 아니었다.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그는 그녀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아시어스는 네키엘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모습은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시어스의 얼굴은 무섭도록 고요하게 침잠해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온갖 아이 같은 감정들이 넘실거렸을 얼굴이 오늘은 시체처럼 무표정했다. 가만히 뒤를 따르던 라제는 결국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냐?]잠깐의 침묵 끝에, 아시어스는 느리게 답했다.
“아니, 그냥 생각하는 중이야.”
[무슨 생각?]“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한 가지 목표만 맹목적으로 좇아온 인간은 그 목표를 제외한 다른 것에는 서툴고 무지하다.
아시어스에게는 사랑이라는 것이 딱 그랬다.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한두 해도 아니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았던 시간만 100년이 넘었다.
헬라르가 그의 가문에, 그의 부모 형제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했던 짓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그녀의 딸을 사랑할 수는 없다. 정상인이라면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아시어스는 사흘 전 그가 리즈벨 발디마르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잿빛 눈이 검은 사자를 향했다.
“내가 얼마나 살았지, 라제?”
“……스물셋. 하고 100년 조금 넘게.”
스물셋에서 멈췄어야 할 목숨을 억지로 백여 년이나 늘렸다. 그렇게 수명을 연장한 이유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헬라르의 성녀를 찾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으니까. 성녀를 찾아서 여신을 죽여야 그는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이란 그랬다. 그는 온 힘으로 죽음을 향해 걷는 인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복수. 그 후의 달콤하고도 완벽한 죽음.
리즈벨은 그런 그와는 완벽히 반대 방향을 보고 선 인간이다. 그것을 발디마르에 있을 적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다.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하고 미래를 꿈꾸는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을 스스로 끊어 내는 의지를 가진 인간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온 힘으로 생을 향해 걷는 인간은 또 얼마나. 얼마나 눈이 부신가…….
어둠 속에 오래도록 침잠해 있던 자가 태어나 처음 본 빛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욕심을 내다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내정된 운명이었다. 어쩌면 처음 본 순간부터.
[너는 내 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정말 그런가 보다…….”
[너는 나를 죽일 수 없을 거야, 아시어스.]“그런가 보다, 라제.”
힘겨운 인정이었다. 잠을 자지 못해 전날보다 붉게 물든 눈매에 짙은 회한이 묻었다. 아시어스가 문득 실소를 흘렸다.
“진짜로 그렇게 될 줄이야. 이거 정말 형편없는데.”
[그거, 무슨 뜻이야.]“복수 못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라제가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나는 리즈벨을 못 죽여. 1년이 지나든, 10년이 지나든.”
사흘 동안 아시어스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그. 그녀. 헬라르. 과거. 현재. 미래. 운명. 복수.
복수를 빼고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은 너무나 명료했다.
사랑한다. 사랑해서, 죽일 수 없다. 사랑하니까,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의 감정은 이토록 간단한 것이었다. 애초에 헤맬 필요조차 없었다.
아시어스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전사의 광장에 도착한 그는 광장 한가운데 물을 뿜고 있는 분수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서느렇게 뻗은 눈가가 붉었다. 잿빛 눈동자에는 투명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부터 말이 안 됐던 건데.”
애초에 아시어스는 리즈벨을 가진 적도 없었다. 인간이 한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인간에게 종속되는 것 역시 불가했다.
하물며 리즈벨은 헬라르에게도 지배당하지 않는 여자였다. 그러니 리즈벨은 그저 그에게 잡혀 주었을 뿐이다. 같이 죽을 생각을 하는 남자를 안아 주고, 입 맞춰 주고, 그를 걱정하고. 떠나지 않겠다 말해 주고. 그에게 죽어 주겠다고 말해 주고…….
그 모든 것은 얼마나 빛나는 애정인가.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해 준 적은 없어도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말하고 있었는데. 죽으면 끝이라고? 그럴 리가.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다. 그가 그녀의 생사를 결정지을 권리는 없었다. 언젠가 리즈벨이 발디마르에서 경고했듯 그녀는 그저 그녀의 것이었다. 억지로 사슬로 영혼을 묶어 둬도 틈만 나면 새어 나오는 성력처럼 그녀는 늘 그녀 자신일 때 빛이 났다.
아시어스는 그렇게 빛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죽음을 겪고도 다시금 피어난 그 강인한 생명력을 사랑했다. 그러니 그 빛을 제 손으로 꺾어 버릴 수는 없는 거였다. 처음부터.
심지어 이미 한 번 죽음을 겪고 돌아온 사람이다. 독이 든 차를 마시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차가운 돌바닥에 내팽개쳐진 작은 시체가 눈앞에 선명했다.
제 손으로 리즈벨을 또다시 그렇게 만들 수가 있다고? 아시어스는 또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바보 같은…….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눈물이 뺨을 스치지도 못하고 뚝 떨어졌다. 아시어스는 멍하니 허벅지를 적신 동그란 눈물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진한 자국은 곧바로 두 개가 되었다. 하나 더. 또 하나 더…….
목이 메었다.
“그 여자는 죽으면 안 돼, 라제.”
사랑하니까. 내가 많이 사랑하니까…….
아시어스의 생은 늘 나락에 처박혀 있었다. 리즈벨의 인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똑같은 가시밭길을 걸어왔는데. 똑같이 진창에 처박혀 있는데, 누구는 미래를 그리고 누구는 과거를 그린다.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은 나아가면 된다. 과거를 버릴 수 없는 인간은 그저 그 자리에 매몰되면 된다. 그건 그토록 별개인 이야기였다.
“헬라르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까.”
인정하고 나니 어이가 없어 폭소가 터졌다. 아시어스는 정신 나간 것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헬라르는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란 걸 알아서, 저렇게 예쁜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말했던 걸까?”
그 교활한 여신은 저가 잘 하는 예언을 내렸던 게 분명했다. 아시어스는 힘겹게 제 안에서 헬라르를 향한 살의와 리즈벨을 향한 사랑을 분리했다.
리즈벨이 그의 복수에 희생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녀가 그의 복수를 대신 이행해야 할 의무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곧 복수 자체의 와해를 뜻했다.
아시어스는 푹 잠긴 목으로 중얼거렸다.
“리즈벨은 그냥 자기 인생을 살면 돼. 자신이 선택해서 사는 삶.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래야 행복할 테니까.”
잠깐의 침묵 끝에 라제가 조용히 물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아시어스는 젖은 옷자락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대답했다.
“건방 떨지 않고 말하자면, 없어. 지금 심장을 한 겹 한 겹 저며 내는 기분이야.”
[…….]“하필 이런 결심을 네키엘에서 하게 되다니. 대체 어머니를 무슨 낯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
아시어스는 말을 맺지 못했다. 종속의 사슬이 얕게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륵 흘렀다. 흐리던 시야가 한순간에 맑아졌다.
따스하게 내리비추는 가을 햇살. 여전히 북적거리는 광장.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걸음을 옮기는 수많은 행인. 그 속에서 가장 예쁜 금빛으로 빛나는 사람.
아시어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리즈…….”
그가 이 세상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