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14
115화
주황빛 불빛이 일렁이는 긴 회랑의 양옆 기둥 너머에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둡고 적막하고 갑갑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
이상하다.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이 둔중한 울림과 함께 뇌리를 때렸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
“왕좌를 보호하는 성력이 깃든 곳입니다. 절대 불가침의 결계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리즈벨의 걸음이 멈추었다. 신관들은 그녀가 더는 뒤를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는 것처럼 회랑 끝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성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갑갑한 공기. 안쪽의 왕좌를 지키는 공간.
리즈벨의 머릿속에 고서에서 보았던 바리엔 성전의 구조를 나타낸 그림이 떠올랐다.
“…….”
바리엔은 성녀의 무덤이다. 수천 년 동안 지상에 나타난 모든 성녀와 헬라르를 따르는 모든 신관의 안식처. 수천 개에 달하는 관이 이곳에 매장되어 있다고 읽었다.
리즈벨은 몸을 돌려 하얀 대리석 기둥 너머 내려져 있는 두꺼운 커튼을 응시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기둥 사이를 지나쳐 커튼으로 손을 뻗었다.
커튼을 걷지 않은 채로 꾹, 힘을 주어 눌렀다. 걸리는 것 없이 뻗어 나가던 손이 커튼 너머의 무언가에 걸려 닿았다. 탁. 단단한 곡선의 무언가였다.
‘꼭…….’
이 뒤에 무엇이 있을지,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예감했다. 리즈벨은 손을 거두었다. 대신 그녀에게서 솟아 나온 거대한 성력의 낫이 허공에 나타났다.
홱.
금빛 낫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횡으로 휘둘러졌다. 커튼의 치밀한 섬유 조직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마치 무대의 막을 내리듯, 잘린 커튼이 무력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기둥 너머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순간, 리즈벨은 어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
하마터면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주먹 쥔 손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사정없이 파고들었지만 그런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리즈벨이 마주한 것은 산 사람의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정교한 동상에 가까운 인영이었다. 일자로 다물린 파란 입술. 그 위의 인중과 콧대. 그 위는 그녀가 걸치고 있는 흰옷에 달린 흰 후드로 가려져 있었다.
조금 전에 그녀가 커튼 너머로 만진 것은 여자의 어깨였다.
“…….”
리즈벨의 주먹 쥔 손에 힘이 탁 풀렸다.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희미하게 덮쳐 오는 깨달음으로 가늘게 떨리는 손이 다시금 뻗어 나가 여자의 후드를 벗겼다.
뻣뻣한 검은 머리카락이 쏟아지듯이 그녀의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리즈벨은 드러난 여자의 얼굴을 보고 숨을 삼켰다.
여자의 눈은 흰 천으로 칭칭 동여매어 있었다. 리즈벨은 황망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여자와 비슷한 이들이 왕좌로 들어서는 회랑 양옆을 따라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하얀 수의를 입고 눈이 가려진 채 회랑을 지나는 자들을 감시하듯이 늘어선 수백 구의 시신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름다운 마리오네트.]다시 작은 요정의 형상으로 돌아온 리즈벨의 권능이 속살거렸다.
[그들은 죽어서도 헬라르를 지키지.]그 속삭임을 듣고 나서야 리즈벨은 그녀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확신했다.
‘묘실’이었다. 이곳은 수천 년간 지상에 나타난 성녀들의 무덤이다. 이 여인들은 산 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체도 아니다. 이들은 그저 다 쓰이고 난 뒤 부서진 그릇들일 뿐이다.
요정이 리즈벨 앞의 이름도, 눈도 없는 그릇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네 마법사가 이곳에 혈육을 묻지 않았다면 지금쯤 너는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이들은 이방인에게 관대하지 않거든.]아시어스가 이 성전에 무언가를 해 놓았던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성전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헬라르에게 인사를 전해 달라고 한 건가.
아시어스는 그녀가 이 바리엔에서 누구를 마주할지 이미 짐작하고 온 모양이었다.
“성녀님.”
리즈벨은 흠칫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녀를 부른 신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서두르시지요. 여신께서 기다리십니다.”
‘헬라르가 기다린다’라. 과연. 리즈벨의 입가에 느리게, 아름다운 호선이 떠올랐다. 꽤 오래 잊고 있던 본능에 충실한 미소였다.
속을 내보이면 그대로 목숨을 빼앗기는 전장 속에서 그녀를 보호할 불투명한 웃음.
“그래. 가자.”
각오는 이미 오래전에 되었다.
묘실을 가로지르는 회랑의 끝에는 정교한 대리석 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신관은 그 앞에서 멈추었다.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을 본 리즈벨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희고 긴 천이었다. 종전에 성녀들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것과 완벽히 같았다.
리즈벨은 단호하게 그가 내미는 안대를 내쳤다.
“치워.”
“성녀님.”
신관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리즈벨의 손에 금빛으로 빛나는 낫이 들린 것을 보자마자 얼굴색이 변했다.
리즈벨은 날카로운 금빛 날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내가 미쳤다고 내 손으로 눈을 가리고 저길 들어가겠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잖아.”
“…….”
“그리고 너 말이야. 정신 좀 차려.”
날카롭게 휘어진 곡선의 날이 신관의 목으로 들이밀어졌다. 리즈벨은 아주 오랜만에 발디마르의 왕성 한 가운데 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사방이 적이다.
“언제까지 헬라르에게 붙잡혀 살 거야?”
잠시 떨어지나 싶던 낫이 도로 휘둘러졌다. 번뜩이는 날 끝이 신관의 몸에서 무언가를 긁어내었다.
“헉…….”
리즈벨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신관이 헐떡이며 주저앉는 것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의지가 없는 마리오네트.
이 성전 안의 인간들은 전부 헬라르에게 종속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관의 눈에 총기가 돌아오는 걸 확인한 뒤, 리즈벨은 대리석 문에 손을 얹었다. 힘을 주자 묵직한 돌덩어리가 서서히 열렸다.
내부는 어둡고 좁았다. 그러나 까마득하게 높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가파른 돌계단뿐이었다. 리즈벨이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기분 나쁜 곳…….”
성력이 점점 더 무겁게 폐부를 짓눌렀다. 리즈벨은 숨을 고르게 쉬려 애쓰며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낫의 끝이 계단에 끌려 섬뜩한 소리를 냈다.
기이익. 기이익.
계단을 중간쯤 올랐을 때, 리즈벨은 계단 끝에 놓인 왕좌를 발견했다. 왕좌 위의 돔형 천장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왕좌를 비추었다. 금빛 장막이 꼭 드레스 자락처럼 왕좌 밑으로 늘어져 있었다.
리즈벨은 마침내 계단 꼭대기에 다다랐다. 가빠 오는 호흡을 꾹 가다듬으며 왕좌를 내려다보았다. 초라하고 거친 내부에 맞지 않게 화려하고 고풍스러웠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금빛 빛이 만들어 낸 드레스가 왕좌에 꼭 사람이 앉은 것 같은 형태로 왕좌에 걸쳐져 있었다.
리즈벨은 본능적으로 이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녀는 천천히 왕좌에 앉았다. 빛의 드레스가 리즈벨의 몸에 완벽히 겹쳐진 순간이었다.
[안녕, 딸아.]헬라르의 음성이 정확히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잘 왔단다. 착하기도 하지.]음성뿐만이 아니었다. 냉기 어린 손이 리즈벨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짐작은 적중했다. 바로 역대 성녀들이 헬라르를 직접 영접하고 그녀의 뜻을 받들었던 곳이었다. 헬라르가 즐겁게 물었다.
[왕좌에 앉아 보니 어떠니?]“……글쎄. 별다를 건 없는데.”
헬라르와 이렇게 직접 말을 섞어 보는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리즈벨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날카롭게 주위를 살폈다. 보이는 것이라곤 높다란 계단과 돔 안쪽의 벽돌뿐이었다.
리즈벨은 마지막으로 까마득한 계단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일단 아래와는 완전히 격리됐다는 건 알겠네.”
뭐가 우스운지, 여신이 깔깔대었다.
[건방진 감상이구나. 하지만 네 생각만큼 가벼운 자리가 아니란다.]“그럼?”
[너는 이 왕좌에 앉아 대륙을 다스릴 수 있어.]“…….”
[너는 나를 업고 이 땅에 군림할 수 있단다.]빛으로 이루어진 두 손이 양옆에서 불쑥 튀어나와 리즈벨의 눈을 가렸다. 반투명한 손이었는데도 시야가 캄캄하게 물들었다.
[이 땅에서 무엇이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거야, 딸아.]리즈벨은 그 말을 되뇌어 보았다.
“뭐든 내 마음대로라고…….”
이거 어디서 들어 본 말이 아닌가. 악마에게 영혼을 판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회유할 때 꼭 그렇게 말했었다. 죽이고 싶은 놈은 전부 죽이고, 갖고 싶은 것은 뭐든 가져도 된다고.
“네 세상이란다, 왕녀야.”
그래서, 루시페는 정말로 그녀에게 발디마르를 주려 했던가? 리즈벨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이렇게 눈을 가린 채로 할 수 있으면 뭘 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