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16
117화
“아무…… 의미도 없었는데.”
아시어스가 곤란한 기색을 내비치며 질문을 무마하려 들었다.
“그건 그냥 당신을 잠시라도 붙잡아 놓으려는 임시방편이었을 뿐이에요. 1년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불현듯 그의 얼굴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리즈벨이 그에게서 떨어지려 팔에 힘을 빼는 순간, 아시어스가 그녀를 꽉 안았다.
“뭘 걱정해요. 정말 아무 의미도 없어요.”
“……진짜야?”
“네.”
답은 짧고 간결했다. 그러나 리즈벨은 그 말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시어스는 거짓말을 할 때 자신의 눈을 보이지 않으려는 습관이 있으니까.
* * *
성전의 신관들은 리즈벨에게 봄 제의가 거행될 때까지 신전에 머무를 것을 부탁했다. 물론 리즈벨은 아시어스와 떨어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므로, 단칼에 그 부탁을 거절했다.
“권능의 본질을 알아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려면 성전에 며칠 머무르는 편이 좋을 텐데.”
“아니야, 너랑 있을 거야.”
“언제부터 내게 이렇게 집착해 줬다고?”
아시어스는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모를 아리송한 얼굴로 이동진을 엮었다. 그리고 여관방으로 이동하자마자 그녀에게 키스했다.
“……!”
리즈벨은 갑작스레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감각에 순순히 입을 열어 주었다.
뜨듯하고 습한 것이 입 안쪽 여린 살을 건드리자 아랫배가 지글거리며 끓기 시작했다. 몰아붙이는 듯한 키스에 리즈벨의 몸이 두어 걸음 뒤로 밀렸다.
아시어스가 매끄러운 동작으로 그녀가 걸친 로브의 매듭을 풀었다. 오금에 침대 가장자리가 닿기가 무섭게 몸이 뒤로 넘어갔다. 얼른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떨어지려는 입술을 다시 붙인 남자가 그녀를 부드럽게 바로 눕혔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리즈벨은 로브와 동시에 목 뒤의 단추가 이미 풀려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입 안쪽 여린 살들을 헤집는 자극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허리끈이 다소 조급하게 풀려 나가고 원피스가 반쯤 벗겨지고 나서야 리즈벨은 그의 어깨를 밀었다.
“잠깐만…… 아시어스. 지금?”
아시어스는 얌전히 밀려나나 싶더니 이내 입가에 달큼한 호선을 그렸다.
“응. 지금.”
아직 해가 중천인데. 그보다 이 남자를 붙잡고 제대로 추궁해 봐야 할 게 있는데…….
“사실 아까부터 이러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리즈벨의 생각은 옷자락이 맥없이 끌려 내려가고, 아시어스가 드러난 가슴에 입을 맞추는 순간부터 끊겼다. 정사는 여느 때처럼 갑작스럽게, 그리고 뜨겁게 시작되었다.
“하, 읏, 으응…….”
또한 여느 때처럼, 그를 처음 받아들이는 것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버거웠다.
리즈벨은 오싹하게 차오른 충만감에 몸을 떨었다. 그 느낌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그가 움직였다. 거칠고 절제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하…….”
낮게 내쉬는 호흡과 균열이 인 얼굴이 지독히도 색정적이었다. 리즈벨은 침대가 삐걱거리도록 흔들리는 와중에도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휘어 감았다.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 쾌락의 물결 끝에, 한 차례의 절정이 하나처럼 맞붙은 두 몸을 휩쓸었다.
아시어스는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빛 아래 놓인 나신을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늘 생각하지만…… 정말 예뻐.”
어디를 만지면 어떤 소리를 내는지, 또 어디를 빨면 눈가가 발개지도록 신음을 참는지, 전부 알고 있는 달콤한 몸. 그에게 맞춘 것처럼 딱 맞아서 늘 이성을 마비시키는 마약 같은 몸.
사랑스러운 사람. 온 생에 행복만이 가득 차 있어야 할 여자. 그녀가 지금처럼 온전한 상태라면, 성역을 벗어나더라도 그녀의 권능을 좀 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헬라르에게서 벗어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영혼이 틈 없이 견고하기만 하다면…….’
종속의 사슬이 불안하게 떨렸다. 아시어스는 뭉근하게 그녀 안에 자신을 비볐다. 길게 흘러나오는 달콤한 신음을 들으며 미래를 짐작해보았다. 영혼의 종속은 둘 중 하나가 죽거나 죽음에 가까워져야만 끊어진다. 그리고 한번 누군가에게 종속되었던 영혼은 종속이 끊겨 나갔을 때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리즈벨의 영혼에 틈이 생기는 순간. 그가 아마도 개입할 수 있을 상태가 아닌, 그러나 헬라르는 놓치지 않을 그때. 그때만 넘기면 리즈벨은 그녀의 권능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고…….
헬라르뿐만 아니라 그에게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리즈벨의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라는 존재는 깨끗이 지워질 테니까.
그 사실은 아시어스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차피 닥칠 미래니, 지금 이렇게 자신을 가득 새기는 걸 주저하지 않아도 괜찮다.
자신이 사라지면 아마 조금은 울겠지만, 어쩌면 많이 슬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앞에는 그보다 더 빛나고 소중한 것들이 가득 펼쳐져 있을 테니까.
금세 다시 행복해지겠지. 그 사실에 안도감이 일었으나, 언젠가 다른 이에게 이렇게 안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아시어스는 손에 가득 차는 가슴을 뭉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온종일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어. 매일, 매시간. 몇 달, 몇 년이고.”
“그렇겐 무리야…….”
“무리예요? 왜?”
몸이 은근하게 주물러지는 감각에 리즈벨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한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리즈벨은 허리를 비틀었다.
“매일 이렇게 하면 몸이 안 남아날 거야. 흣, 아시어스. 아직 움직이지…… 마…….”
절정에서 내던져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자극에도 몸이 형편없이 경련했다. 안쪽이 요동치는 느낌에 아시어스가 짧은 신음과 함께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몸이 틈 없이 결합했다.
“하윽…….”
그가 다시 단단해지는 느낌에 리즈벨은 숨을 들이켰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짐승처럼 밀어붙인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게도, 아시어스가 아이처럼 응석을 부렸다.
“나가고 싶지 않아요.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니까 책임져 줘야죠. 적어도 나랑 있는 동안에는 내 생각만 해.”
뭉근하게 안쪽을 휘젓는 감각은 아이처럼 온건하진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서 몸을 떼고 느리게 빠져나가자 리즈벨이 신음했다.
“아직 움직, 이지…….”
“응? 그렇죠?”
“응, 으응. 알겠어. 알겠으니까, 읏.”
아시어스는 그녀의 다리를 접어 올려 하얀 무릎에 입을 맞추었다.
“아……!”
곧바로 이어진 허릿짓에 리즈벨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기어코 관자놀이를 적셨다. 그는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는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당신 안에 이렇게 몇십 년이고 있을 수만 있으면 남은 영혼 조각이라도 다 팔 텐데.
“사랑해요.”
언제나처럼 아시어스는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말을 네 글자에 꾹꾹 눌러 담았다. 또다시 짙고 습한 쾌락의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 * *
아시어스와 함께 있으면 안 되겠다. 리즈벨은 바리엔에서 며칠을 더 보낸 뒤에 결론을 내렸다.
종속의 사슬은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나 있었다. 아무리 사슬을 쥐고 그의 의식으로 들어가 보려 해도, 이제는 사슬 자체가 너무 가늘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요새 아시어스는 그녀를 안고도 잠을 자지 않았다.
“오늘도 안 잤어?”
“할 게 많아서요. 해가 바뀌어서 그런가, 일이 많네요.”
그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바리엔에서 헬라르의 음성을 듣고 온 이후로 돋아난 불안감이 리즈벨을 괴롭혔다. 자연히 마음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푸른 눈이 아시어스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를 날카롭게 관찰했다.
“그렇게 봐도 나오는 거 없어요, 리즈벨.”
손바닥 위에 마법진을 띄워 넣고 마력을 주입하고 있던 아시어스가 혀를 차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불타는 눈으로 보면 대책 없이 흥분할 텐데. 괜찮겠어요?”
아시어스는 괜찮아 보였다. 리즈벨은 그에게 다가가 차가운 양 뺨을 손으로 감싸고 그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서느렇게 뻗은 눈매. 곧게 뻗은 콧대와 매끄러운 턱 선. 말라 피가 터지지도 않은 부드러운 입술. 아무리 보아도 언젠가 그녀를 걱정시켰던 것처럼 아프고 지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러면. 지금 이렇게 울컥 치미는 이유 모를 서러움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리즈벨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약속해.”
“내가 무슨 약속을 하면 될까요, 사랑하는 왕녀님.”
“내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
“이건 명령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