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2
12화
“너는 나랑 하고 싶은 게 많은가 봐.”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본디 인내심이 긴 성정이 아니었다. 바짝 갈증이 솟았다.
오래전부터 제 것이라 인식한 상대를 향한 소유 욕구였고, 피식자를 앞에 둔 짐승의 본능과도 가까웠다.
리즈벨은 그 얼굴을 보며 기껍게 웃었다.
이 남자가 그녀를 원한다…….
그러나 웃는 얼굴과 달리 내뱉어지는 목소리는 냉담했다.
“그럼 아까 물은 말에 대답이나 해. 나를 구할 때 뭔가 금색 빛 같은 걸 보지 못했어?”
“……봤다면?”
“아.”
리즈벨은 그 대답을 듣자마자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가는 손이 그의 셔츠 목깃을 잡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게 뭐였는지 알아?”
아시어스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머리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다만 크게 뜨인 푸른 눈과 조금 전의 키스의 여파로 발그레한 뺨이, 그리고 조르는 듯한 목소리가 그를 참 쉽게도 유혹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귓전을 때리는 오만한 목소리가 있었다.
[너는 내 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아시어스는 여자를 마주한 채로 굳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음성이 이제는 현실에서도 환청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의 농밀한 접촉으로 불이라도 붙은 듯 열이 올랐던 마음이 순식간에 도로 차갑게 식었다.
[그러니 결국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을 테지. 아시어스.]그 목소리가 고막을 찢고 뇌를 파고들었다.
아시어스는 잠시 리즈벨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돌연 냉소적으로 웃었다.
아니.
“모릅니다. 그 빛이 뭔지는.”
너는 틀렸어, 헬라르.
“아…….”
리즈벨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그러나 모른다는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 것 같았다.
“보긴 했지만, 무엇인지 알지는 못합니다. 내가 알 리가 없죠. 난 당신을 그날 밤 처음 봤는걸.”
아시어스는 제 목깃을 잡은 리즈벨의 손을 떼어 낸 뒤 허리를 바로 폈다.
그는 벗어 두었던 은빛 안경을 집으며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날 당신이 광장의 골목 어귀에 쓰러져 있던 것을 발견했고,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여 데리고 왔지요. 그게 전부입니다. 곡해해서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리즈벨은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해 내기라도 하는 양.
아시어스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저 얼굴을 오래 보고 있는 건 곤란하다는 걸 본능처럼 깨달은 탓이었다.
그는 제 표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자는 아니었다. 애초에 가진 표정이 다채롭지 않아 티가 잘 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 그렇구나.”
마침내 그녀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침대로 갈래.”
며칠 동안 고작 이 방 안에서 돌아다닐 때도 그의 품에 안겨 다닌 것이 그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것까지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몸이 그의 품 안에 들어왔다. 늘 역겹다고 생각했던 성력 특유의 향이 여자의 체향과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조금 전에 맛보았던 붉은 입술 안쪽만큼이나 달큼한 향이었다.
깊숙한 접촉을 통해 그녀의 안에서 들썩이는 성력을 짓눌러 놓으려는 시도가 반쯤 실패했는데도,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을 만큼.
“……혼자 있게 둬.”
그녀는 애써 아닌 척했지만 낙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와는 달리 표정이 다채로운 편이라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바라신다면.”
말과는 달리 아시어스는 그녀를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혔다.
슈미즈 자락을 걷어 붕대를 다시 갈아준 뒤로도 리즈벨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푸른 눈이 다시 그를 담았다.
잠깐 켜졌던 희망은 다 어디로 가고, 맑은 하늘빛이 다시 절망이라는 먹구름에 좀먹히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절박한 걸까. 일국의 왕녀라면 왕위 찬탈을 시도하지 않는 한 지금보다 더한 권력이 필요할 일은 없을 텐데.
아시어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도와줄까요?”
* * *
‘거짓말.’
리즈벨은 마법사가 사라지고 없는 방 안에서 홀로 생각했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이게 도대체 뭐길래.’
그녀의 손끝에서 금빛 빛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리즈벨은 흰 슬립 자락에 반쯤 파묻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빛무리가 손가락 사이를 휘돌았다.
이 금빛 기운이 어떤 일을 했는지 이제 리즈벨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뒷목을 그대로 내리치려던 검을 막고 그녀를 보호했다. 그뿐 아니라 왕성 밖으로 그녀를 빼돌리기까지 했다.
그녀를 이곳에 잡아 둔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리즈벨은 그를 처음 보던 순간부터 바로 오늘까지 그가 내뱉었던 모든 말을 기억했다.
“당신, 아직 조절이 전혀 안 되고 있어서요.”
“모릅니다. 그 빛이 뭔지는.”
그 두 말은 함께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저 남자는 그녀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러니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구한 셈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자를 과연 믿을 수 있는가. 한 치라도 삐끗하면 머리가 박살 날 계승 전쟁에 믿지도 못할 사람을 끌어들여도 될까.
“…….”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지.
애초에 자신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되던가. 당장 제 몸에 휘도는 이 빛의 진짜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왕족 둘이 죽지 않으면 계승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가장 강한 발디마르의 전사, 아버지를 낫게 할 자식은 최후까지 살아 있는 왕족이다.
벌써 보름 중 사흘이 지났다. 남은 기간은 열흘 남짓. 애초에 리즈벨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시어스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이 방을 떠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창가에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커튼은 전부 걷혀 있었다. 널찍한 창틀 위에 비딱하게 올라앉은 그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작고 붉은 여우 한 마리를 안은 채였다.
붉은 털을 스치듯이 어루만지는 길쭉한 손가락. 창밖을 보고 있는지 살짝 돌려진 고개.
창밖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얼핏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온통 붉은 노을 아래, 예기치 않게 그녀를 찾아낸 남자.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기회. 고민할 시간은 사치.
‘도박, 일지라도…….’
리즈벨은 그 순간 결심했다.
‘해 보자.’
흰 붕대가 감긴 발이 바닥에 닿았다. 리즈벨은 꼬박 사흘 만에 제 발로 바닥을 디뎠다.
남자가 즉각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붉은 여우를 느리게 쓰다듬고 있던 손이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가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내가 갈 거야.”
한 발짝, 두 발짝. 거리가 가까워졌다. 리즈벨은 창틀 위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냐고 물었었지.”
“그랬죠.”
“지금도 유효해?”
남자는 다시 근 사흘간 보았던 온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바싹 마른 회색빛 눈에 흥미로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소름 끼칠 만큼 상냥하게 물었다.
“내가 도와주면. 키스해 줄 건가요?”
그가 말하는 키스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도 알고 그녀도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순히 몸을 원하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남자가 원하는 것은 좀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녀의 존재, 영혼의 속박. 그런 것.
물론 리즈벨은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을 알고 싶지도, 안다 해도 줄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그 속내를 환한 웃음 속에 감쪽같이 숨겼다.
“도와준다고 약속하면.”
“…….”
“이건 거래야. 도와주면, 키스해 줄게.”
단호하면서도 꿀처럼 달콤한 조건이었다. 창틀 위의 남자에게로 뻗은 손이 그를 재촉하듯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잠시의 침묵 끝에 아시어스의 손이 아주 천천히 리즈벨의 손 위를 덮었다.
“줄곧 의심스러웠는데…….”
쥐는 것까지는 느렸지만 당기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의 몸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역시 미친 게 아니군.”
리즈벨은 지척까지 다가온 남자의 사나운 중얼거림을 들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날 그녀는 키스 한 번을 조건으로 라타에의 대마법사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