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20
121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키스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는 약한 점막을 마구잡이로 헤집으며 저를 새겨 넣었다.
“……!”
그 접촉은 음습한 소유욕과 애정만이 깃든 키스는 아니었다.
처음 아시어스가 그녀 안에 종속의 사슬을 걸었을 때와 같은 감각이 몸 안쪽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성역의 반향을 웃도는 마력이 그물처럼 그녀를 옥죄어 왔다.
리즈벨은 그것을 알아채자마자 그에게서 떨어져 나오려 반항했지만, 목덜미를 단단히 붙잡은 손아귀 때문에 불가능했다.
종속의 사슬이 덜그럭거리며 무겁게 늘어졌다. 리즈벨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던 우위가 도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정면으로 받아 내기 버거운 마력이었다.
튀어 오른 금빛 성력이 아시어스의 손등을 깊숙이 할퀴었다.
“……!”
핏방울이 흩날렸다. 손등이 베여 나가는 통증에 아시어스가 찰나 멈칫하는 순간, 성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윽…….”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아시어스가 낭패라는 듯 얼굴을 무참히 구겼다.
“나를 어디까지 더 화나게 할 셈이에요?”
성력과 마력이 뒤얽히며 금빛과 검은빛으로 변하기를 반복했다. 리즈벨은 이를 악물고 받아쳤다.
“너야말로 나를 어디까지 가게 할 셈이야?”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웃도는 힘을 가진 인간이었다. 성역 안에 가두어 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권능은 그녀의 의지에 충실히 반응했다.
쩌적.
땅이 갈라졌다. 균열 사이로 성력의 줄기가 치솟았다. 거대한 낫 형태로 휘어진 금빛 기운이 남자의 양 손목과 목에 휘릭 감겨들었다.
“……!”
아시어스가 입술을 짓씹으며 막 몸에 감긴 성력을 잘라 내려던 순간이었다.
피잉. 시야가 오른쪽으로 기울며 눈앞이 점멸했다. 등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마력이 대량으로 왈칵 터져 나왔다.
“큭.”
버틸 도리 없이 허리가 아래로 꺾였다. 그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아시어스는 막힌 기침을 토해 냈다.
“왜 하필…….”
결국에는 상스러운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필 이럴 때!
구속구가 철컥거리며 잠기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들려왔다. 양 손목이 갑작스레 무거워졌다. 이제는 완전히 수갑의 형태를 띤 금빛 사슬이 완전히 그를 속박했다.
아시어스는 비릿한 핏덩이를 간신히 목구멍 뒤로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여전히 빛이 나는 여자가 서러운 낯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비집고 먼 과거가 침범했다.
바로 이곳에서, 이렇게 땅이 뒤틀리고 공기가 날카롭게 울부짖던 날에.
헬라르가 꼭 지금의 그녀처럼 그를 내려다보았었다. 사지를 결박당한 채로 저 눈이 시린 금빛을 노려보았던 기억이 눈앞에 겹쳐졌다.
아시어스의 입술이 망연자실하게 벌어졌다.
“이런…… 이런 거 싫어.”
솨아아아-.
“싫…….”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쏟아졌다. 그의 눈꼬리에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가 주르륵 뺨을 타고 추락했다.
아시어스는 달갑지 않은 끝이 정말로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 * *
젖은 옷과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었다. 싸늘한 공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벅차고 따듯한 애정이 가득 피어났던 공간이었는데. 거짓말처럼. 아니, 그 평온한 시간이 전부 거짓이었던가.
둘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거나 물기를 닦을 생각도 없었다.
리즈벨은 아시어스에게서 몸을 돌린 채로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비가 들이쳤다. 찬바람에 오한이 들었다.
리즈벨은 침대 벽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는 아시어스를 흘끗 돌아보았다.
“…….”
그의 뺨이 창백했다. 그의 손목을 구속한 것은 그녀가 걸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사슬이었다. 성력의 줄기가 아시어스를 단단히 결박했다. 저를 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시어스가 느리게 눈을 떴다.
“이리 와요.”
그의 음성이 사포처럼 까슬했다. 리즈벨은 잠시 그를 보다 몸을 일으켰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리즈벨은 그의 바로 앞에 앉았다. 아시어스가 느리게 물었다.
“안 추워요?”
“……추워.”
그가 침대 시트를 끌어당겼다. 양 손목이 함께 결박되어 손을 쓰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아시어스는 약간의 헛손질 끝에 시트를 그녀에게 푹 뒤집어씌웠다. 긴 머리칼을 가득 적신 빗물이 시트에 스며들었다.
리즈벨은 젖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는 손길을 느꼈다. 아시어스는 젖은 그녀를 닦아 내는 게 지금 당장 닥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말없이 그 일에 열중했다.
제 몸도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푹 젖어 있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머리도 말려 주고 싶은데…….”
아시어스가 못내 신경 쓰인다는 듯 긴 금발을 흘끗거렸다. 물론 그는 마력을 얽는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아는 탓이었다.
리즈벨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너도 젖었어.”
“난 괜찮아요.”
아시어스가 빙긋 웃었다.
“가서 씻고 옷 갈아입어요. 이러고 있으면 또 감기 걸릴 거야.”
“…….”
“얼른요.”
리즈벨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아시어스의 주위에는 부연 증기가 옅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에게서 흐르는 마력이 성력과 부딪쳐 증발하며 뿜어내는 증기였다. 문득 그의 등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즈벨.”
아시어스가 부드럽게 그녀를 재촉했다. 리즈벨은 그 달콤한 발음을 들으며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비에 반투명하게 젖은 셔츠가 몸에 질척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근육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셔츠 깃을 쥐고 아래로 세게 끌어 내렸다.
툭. 데구르르.
셔츠의 단추가 바르르 떨다가 툭 떨어져 내렸다. 아시어스가 흐려진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리즈벨, 보지 말아요.”
그가 다 쉰 목소리로 리즈벨을 불렀다. 리즈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머지 단추들을 풀어냈다. 젖은 옷은 잘 벗겨지지 않았다.
리즈벨은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셔츠를 완전히 벗겨내는 데 성공했다. 그녀를 몇 번이나 안았던 단단한 상체가 눈앞에 드러났다.
흉터로 가득한 가슴팍이 거친 호흡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리즈벨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아시어스의 등을 보았다.
“아…….”
눈앞이 핑 도는 듯했다. 아시어스의 등에는 그녀가 예상했던 흉터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흉터보다 더 처참한 것이 자리했다.
경계가 이글거리며 붉게 타들어 가고 있는, 흉측한 검은 구멍이었다. 푸른 눈에 경악이 스쳤다.
“이게…… 뭐…….”
그것은 구멍이라고 표현하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등의 반절을 넘게 덮은 그 구멍은 기이하게 일렁이며 마력을 울컥울컥 뱉어 내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마력은 붉은빛, 푸른빛, 녹빛이 전부 뒤섞여 거의 검은색으로 보였다. 환부 주위에 실금 같은 균열이 일며 점점 크기를 키워 가고 있었다.
“너…….”
오싹, 몸에 소름이 끼쳤다. 리즈벨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언제부터……?”
“…….”
“언제부터, 아팠어……?”
아시어스의 목덜미가 움찔 떨렸다. 마른침을 삼키는지 목울대가 움직였다.
“내가 보지 말라고 했죠.”
철컥. 아시어스의 손목을 묶은 금빛 구속구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당신이 깊게 알아도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
“분명히 말했었잖아.”
아시어스의 등으로부터 흘러나온 마력이 무겁고 음습하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성력에 닿자마자 증기와 함께 파스슥 증발한다.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린 손이 아시어스의 등에 닿았다. 리즈벨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거짓말쟁이.”
아시어스의 체온은 언제나 서늘했다. 열기라고는 한 점 없는 몸이 이번에는 그녀의 체온에도 쉬이 물들지 않았다.
리즈벨은 가늘게 속삭였다.
“내가 너의 모든 걸 다 가졌다고, 그렇게 말했으면서…….”
“……미안.”
아시어스가 느리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즈벨은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목 뒤로 삼켰다.
아시어스의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가 그녀를 밀어내려는 듯 몸을 뒤로 뺐다.
“안지 말아요. 또 젖을 텐데.”
리즈벨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근두근 뛰는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금방이라도 그 맥이 멈출 것 같아 마음이 조여들었다.
욕실 안은 따듯한 수증기로 가득했다. 뜨거운 물이 목 아래까지 차올랐다. 벗지 않은 옷가지가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취향 참 극악한 거 알아요?”
아시어스가 아직도 결박된 양 손목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평온한 어조였다.
“……풀어 주면 또 도망갈 거잖아.”
그 말에 아시어스는 작게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리즈벨은 욕조 벽에 몸을 깊이 묻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말 떠날 건지. 등은 언제,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
괜찮은 건지. 괜찮지 않은 건지…….
왜, 지금까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지.
물살이 일었다. 리즈벨이 눈을 들었을 때, 아시어스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가 묶인 손을 그녀의 등에 두르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여전히 잠겨 있는 목소리로 묻는다.
“아까처럼 그런 짓, 또 할 거예요?”
“무슨 짓?”
리즈벨의 물음이 완전히 맺어지기도 전에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가 살짝 떨어져 나갔다.
“이런 거. 그리고…….”
아직 입고 있는 흰 원피스의 등에 달린 단추가 툭 풀렸다. 푹 젖은 옷이 물살에 일렁이며 욕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이런 거.”
“…….”
“내가 모르는 사이에는 당신이 뭘 해도 다 괜찮은데, 내가 보는 앞에서는 안 돼.”
“…….”
“키스해 줘요.”
더운 증기가 시야를 가린 와중에 그의 얼굴만이 또렷했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의 얼굴에 떠오른 의심을 읽고 가볍게 웃었다.
“다른 꿍꿍이 없어요. 당신이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필요해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