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23
124화
소름 끼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 남자였다. 분명 마주하고 있는데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남자가 미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2왕자.”
“…….”
“아, 참…… 이제는 왕자가 아니던가요.”
로제스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저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낸 참이었다. 보름간의 계승 전쟁이 벌어지던 때,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저 얼굴을 분명 본 적이 있다.
사실 잊을 수가 없었다. 리즈벨이 처음으로 그에게 칼을 겨누던 날, 그 애 곁에 있던 남자였다.
그때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으나,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라타에의 사절이 발디마르를 떠나고 나서야 기사들의 입을 통해 그의 정체를 전해 들었다.
“……마탑주.”
남자의 입매에 옅은 호선이 걸렸다. 그는 품에 누군가를 안고 있었다. 검은 로브 아래로 흰 옷자락과 가는 다리가 늘어져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줄곧 무표정하던 낯에 처음으로 표정이 생겨났다.
“리즈벨.”
이름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다급한 걸음이 떨어졌다. 로제스는 남자의 품에서 누이를 빼앗듯 들어 안았다. 검은 로브가 흘러내리며 눈부신 금발이 드러났다.
누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리즈-.”
“쉿.”
기이하게 고막에 달라붙는 듯한 목소리가 로제스를 막았다.
“깨우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깨어날 테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일어나면 부분적으로 기억을 하지 못할 겁니다. 잘라 낸다고 잘라 내긴 했는데, 확신이 없네요.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잘라 낸 게 아니라서.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게 하십시오.”
로제스는 그에게서 익숙한 향을 맡았다. 남자의 차림은 얼핏 보기엔 말끔했으나, 짙게 배어 나오는 혈향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괜찮습니까?”
남자는 말없이 미소하기만 했다. 로제스는 리즈벨을 고쳐 안으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다시 보니 셔츠 아래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크기로 보건대 적잖이 위중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정작 남자는 자신의 부상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로제스의 몸과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
“그럼.”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를 그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감이 로제스를 움직였다.
“마탑주.”
막 돌아서려던 남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로제스는 막힌 목으로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전할 말은…….”
아시어스는 잠시 침묵했다. 잿빛 눈이 그가 살린 생명을 응시했다가, 오라비의 품에 안겨 잠든 여자에게로 내려갔다. 떨어지려던 걸음이 다시 돌아섰다.
아시어스는 그들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마른 입을 열었다.
“만약에……. 리즈벨이 깨어나서 나를 기억한다면.”
“…….”
“약속은 지켰다고.”
해가 바뀌면 오라버니를 보러 가자고 리즈벨과 약속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그 약속이 이런 식으로 지켜질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만.
아시어스의 손이 리즈벨의 금빛 머리칼을 쓸고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로제스는 숨도 쉬지 못한 채로 그 모습을 보았다. 남자가 가는 숨결 새로 중얼거렸다.
“사랑한다고.”
“…….”
“좋은 연인이 아니라 미안했다고…….”
그의 손이 늘어진 금발을 타고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그렇게 전해 주십시오.”
그게 끝이었다. 미약하게 빛나는 푸른 마력이 휙 얽혀 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모습은 어슴푸레한 새벽녘 사이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
로제스는 여동생을 안은 채 한참이나 마법사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이 자리에 있던 흔적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로제스는 잠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품에 안긴 동생의 온기가 눈물겹게 선명했다.
로제스는 그제야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을 때, 회랑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는 붉은 여명이 눈이 부시게 밝아 오고 있었다.
* * *
서쪽에 치우쳐진 라타에에는 아직 동이 트지 않았다. 아시어스는 떠났던 방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푸르스름한 새벽녘이 내려앉아 있었다.
발디마르의 왕성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가 마지막까지 운용할 수 있었던 마력도 바닥을 보였다.
몸이 휘청하며 무너졌다. 아시어스는 벽에 등을 기대고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리즈벨의 체향과, 비 냄새와, 아직도 남은 희미한 정사의 향기가 밀려들었다. 들이쉬고 있는데도 벌써 그리워지는 향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역시 이곳이 알맞다.
연인의 잔향에 파묻혀 있다면 마지막이라도 크게 외롭지는 않으리라.
[우리가 했던 내기 말이다, 아시어스.]방 안에는 햇빛 대신 냉기가 흐르는 금빛 성력이 가득했다. 아시어스는 창틀에 걸터앉은 헬라르를 가만히 응시했다.
빛으로 빚어진 여신이 그를 향해 부드러이 속삭였다.
[내 딸을 먼저 찾아 차지하는 쪽이 이기기로 한 내기.]“…….”
[우리 중에 승자는 누구일까?]흑사자로 변한 라제가 아시어스의 앞을 막아서며 이를 드러냈다.
아시어스는 손을 뻗어 짐승의 단단한 갈기를 쓸었다. 입 속으로 그의 첫 번째 사역마를 불렀다.
라제, 이리 와.
[결국엔 너도 실패했고, 나도 이미 여러 번 실패했으니 내기는 무승부일 듯싶은데.]“내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지요.”
[그렇지. 사실 우리 내기의 본질은 성녀가 아니었지.]호흡이 느려져 왔다. 따라 사고도 뚝뚝 끊겼다. 아시어스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누가, 누구의 손에 죽임당하느냐.”
[그래. 그거지.]여신이 우아하게 창틀에서 내려섰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니, 아시어스?]마지막……. 그래, 이게 마지막이었다.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걸어온 진창도 이 순간으로 작별이다. 기쁘지 아니한가. 마른 입술이 달싹여졌다.
“내가 너를 이기지는 못했어도, 헬라르.”
라제가 마구 흔들리는 눈으로 아시어스를 쳐다보았다. 아시어스는 그의 평생을 함께한 사역마를 끌어안으며 비로소 후련하게 웃었다.
“너 역시 절대로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거야.”
네 손에 살해당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목소리를 내며 아시어스는 마지막으로 라제에게 명령을 내렸다.
라제.
나를,
-먹어.
소환자가 사역마에게 내리는 명령이었다. 라제에게는 거부할 권한이 주어지지 못했다. 금빛 성력이 해일처럼 들고 일어나 아시어스를 덮쳤다.
그러나 헬라르의 성력은 찰나에 흑사자에게서 치솟은 검은 연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과과광-.
벽에 금이 가고 바닥이 우지끈 무너져 내렸다. 여관이 완전한 폐허로 변하는 데는 일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시어스, 이 지독한……!]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눈앞에서 승리를 놓친 여신의 분기에 찬 울부짖음뿐이었다.
기억 Ⅱ. 아시어스
뤼켄가(家)의 참극은 대륙력 5122년, 뤼켄의 악마 소환에 당대의 성녀 아그네스 라그놀라가 휘말려 사망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대악마 티스베의 소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성녀의 죽음은 헬라르의 거대한 분노를 불러왔다.
그날, 가주 듀엔 뤼켄은 아내와 세 명의 자식들에게 물었다.
“누가 뤼켄의 힘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첫째 라나크가 대답했다.
“가장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이가 이어받아야 합니다, 아버지.”
둘째 엘제니아가 이어 말을 받았다.
“가장 맑고 온전한, 아직 악마를 모르는 영혼을 가진 아이가 이어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뤼켄의 안주인, 유레인이 고요히 답했다.
“우리 중 가장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아이가 이어받아야 합니다, 듀엔.”
가주는 눈을 감았다. 그의 생각도 같았다. 모두가 같은 이를 지목했다.
가장 어리고 가장 온전하며 가장 강한 힘을 타고났으나 아직 세상에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아이. 뤼켄의 막내.
수백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강대한 마력을 가진 소년. 아시어스의 운명은 그날 가족들과 다른 궤에 올라섰다.
그날, 세상 그 어떤 풍파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견고하고 다정하며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온하던 아시어스의 세계가.
어린 소년은 그날 목 놓아 울며 아버지에게 자신을 버리고 가지 말라고 매달렸다. 가주 듀엔은 막내아들을 달래며 말했다.
“아시어스, 너에게 임무를 하나 주마.”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이후의 아시어스는 사실 잘 기억하지는 못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라. 살아서, 내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것들을 대신 이루는 거다. 알겠지?”
다만 그때 아버지가 ‘임무’라고 표현한 것이 그를 살게 할 원동력이라는 것만은 기억했다.
“너를 버리고 가는 게 아니야, 아시. 사랑하는 내 동생.”
가주 듀엔과 함께 수도의 저택에 남기로 한 둘째 엘제니아는 동생을 마지막으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우리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란다. 혼도, 마력도, 원도.”
“누나…….”
“우리가 네 힘이 되어 주는 거야. 그 사실을 잊지 마.”
안주인과 후계자, 막내, 그리고 가주의 악마 라이제스가 에엘을 떠나던 날, 지도상에서 뤼켄의 본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