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24
125화
유레인은 두 아들을 이끌고 네키엘로 도망했으나 네키엘의 성전에 강림한 헬라르에게 살해당했다.
어머니의 시신을 뒤로 한 채, 라나크는 동생을 데리고 대륙의 중부로 피신했다. 그러나 결국은 바리엔의 성역에서 덜미를 잡혔다.
“절대 지지 마, 아시어스.”
라나크는 성력의 창에 목이 꿰뚫리고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절대,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네가 다음 대의 ‘뤼켄’이구나.]라나크의 잿빛 눈에서 산 자의 생기가 떠나던 순간, 소년은 여신에게 붙잡혔다.
* * *
열세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 그 5년은 아시어스의 인생에서 다시없을 형벌의 시간이었다.
[너는 네 혈육들이 저지른 죄의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아시어스는 5년 동안 바리엔 성전의 지하에 처박혀 있었다. 양 손목에는 구속구를, 발목에는 무거운 쇠사슬을 차고 지하 절벽 한중간에 매달린 채 5년을 보냈다. 죄목은 많고도 길었다.
[내가 허락하지 않은 이계의 힘을 내 땅에 들인 죄. 감히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내 딸을 살해한 죄. 감히 내게 반기를 들고 대적한 죄.]그것 외에도 뭔가가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아시어스가 명확히 기억하는 것들은 그것뿐이었다. 소년은 제 몸에 생겨나는 상처의 개수로 지나는 날들을 세었다.
그 시간 동안 아시어스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8할이 가족들이 남긴 유언 덕분이었고, 나머지 2할은 그와 비슷한 꼴로 지하에 감금된 라이제스 덕이었다.
[정신 똑바로 붙들고 있어, 어린 인간.]라이제스는 듀엔 뤼켄의 악마였다.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한 주인의 아들에게 그는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듀엔이 네게 준 임무를 생각해. 엘제니아의 말을 기억해.]“…….”
[유레인이 마지막에 네게 뭐라고 했었지?]“형을 따라가라고…….”
[그럼 라나크는?]“지지 말라고, 했어.”
[그래. 잘했어.]라이제스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소환자인 듀엔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악마를 헬라르의 세계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소환자의 역할이다.
듀엔은 뤼켄의 참극이 시작되던 날 죽었다. 곧바로 마계로 역소환당하지 않고 아시어스의 곁에서 버티는 것이 당장 라제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라제는 다 죽어가는 어린 인간을 붙들고 속삭였다.
[헬라르에게 내기를 제안해, 아시어스.]“내기……?”
[그래, 내기. 헬라르는 내기를 좋아하니까.]더 정확히 말하면, 헬라르는 그녀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내기를 거는 것을 좋아했다.
수많은 영웅이 여신이 이기도록 설계된 내기에 온 생을 걸다 결국은 스스로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일생은 전부 실패의 기록으로 역사에 남았다.
소년의 잿빛 눈이 기이한 빛을 띠었다. 라이제스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뭐든, 헬라르가 구미 당겨 할 만한 것을 걸어. 대신 너는 그녀를 죽일 무기를-.]라이제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금빛 성력의 창이 거대한 흑사자의 등을 꿰뚫었다.
푹-.
[어쩐지, 왜 저런 작은 소년 따위가 용케 미치지 않고 버티나 했더니. 악마 따위가 붙어 있었구나.]절벽 앞의 허공에 금빛 빛이 너울거리며 여신의 모습을 그려 냈다. 아시어스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헬라르가 라이제스를 찢어발겨 그 시체를 그에게 전부 먹인 이후부터 아시어스는 죽 혼자였다.
[악마를 먹이면 알아서 죽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여신의 옷자락을 형상화한 빛의 장막이 파도치듯 너울거렸다.
[아직도 그런 눈을 하고 살아 있다니, 놀랍기도 하지.]“……우욱.”
라제를 ‘먹는’ 것은 역겨운 일이었다. 차마 씹지도 못하고 컥컥대며 목 뒤로 삼켜야 했던 악마의 경련하는 뜨거운 살점을 떠올리자 욕지기가 치밀었다.
아시어스는 고개를 돌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쓴 위액이 턱을 타고 흘렀다.
[왜 듀엔 뤼켄이 다른 자식도 아니고 너를 살렸는지 알 것 같구나, 소년아.]“컥…….”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시어스?]헬라르가 자못 흥미가 생겼다는 듯 중얼거렸다. 목이 졸렸다. 눈에 핏줄이 터지며 마른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나 헬라르를 노려보는 잿빛 눈에는 번뜩이는 살의가 넘쳐흘렀다.
언젠가는 저 망령 같은 절대자를 죽여 없애리라. 그의 가족들이 죽어간 것보다도 더 참혹하게 살해하고 말 것이다.
소년의 적의를 읽은 헬라르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사지를 결박한 구속구가 뼈를 부서뜨릴 듯 세게 조여 왔다. 소년은 증오스러운 금빛을 피해 눈을 감았다.
[네 그 눈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구나.]헬라르는 소년을 어떻게 해서든 망가뜨리고 싶어 했다. 그녀는 제게 반항하는 것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오직 그녀 하나만이 절대자여야 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헬라르는 꽤 오랫동안 아시어스를 살려 두었다.
하나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라이제스가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흡수된 악마의 검은 마력이 꿈틀대며 소년의 몸 안을 휘돌았다.
아시어스는 본래 타고난 마력이 방대했다. 거기에 죽은 가족들이 그에게 남긴 마력, 그리고 악마의 검은 마력이 합쳐지자 한 번 정도는 성력의 구속구를 부서뜨릴 수 있을 만큼의 힘이 모였다.
성전의 지하에 매달린 지 딱 5년을 채우던 날, 아시어스는 구속구를 부수고 풀려났다. 그는 그 기척을 알아채고 눈 깜짝할 사이에 현신한 헬라르에게 간신히 내뱉었다.
“나와, 내기를 해.”
[……그 눈.]얼굴 없는 여신의 목소리에 분기가 어렸다.
[내게 도전하는 눈.]헬라르는 마침내 아시어스의 처분을 결정했다.
[그래. 너 같은 눈을 하는 이들에게 나는 늘 기회를 주었지.]* * *
지상에 올라온 아시어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라이제스를 재소환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손상 없이 온전하던 영혼의 반절이 뜯겨 나갔다.
“헬라르와 무슨 내기를 했어?”
“성녀.”
“성녀?”
“다음 대의 성녀. 그것을 먼저 찾아 그 안에 든 권능을 차지하는 쪽이 승리하는 내기.”
아시어스의 기다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성녀의 등장을 기다리는 동안 아시어스는 아버지 듀엔이 남긴 뤼켄가의 임무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그러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안 것은, 그가 막 스물셋이 되던 해였다.
“이 정도면 대충 네 마력을 버틸 수 있겠어. 에엘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 놓았으니 넘치는 마력은 문으로 자연스레 빠져나가도록 하면 되겠는데. ……아시어스?”
막 설계가 완료된 마탑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중이었다. 라제는 뒤에서 들려오는 잔기침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너 감기 걸렸…….”
그리고 아시어스의 손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핏덩이를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둘 다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사실 당연했다. 아무리 마력이 넘쳐흐른다 한들, 5년간 성력에 끊임없이 고문당했던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한참을 제가 뱉어 낸 선혈을 내려다보던 아시어스가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라제, 새로운 계약을 하자.”
스물셋에서 멈출 운명이었던 생이 수십 년 늘어났다. 그리고 이미 반절로 찢겼던 영혼이 또다시 반으로 찢어졌다. 그러나 아시어스가 마탑의 설계를 완료하고 당대 라타에의 황제와 협약을 체결할 때까지.
헬라르가 지상에 강림하는 경로인 성전을 전부에 가깝게 파괴하고 다닐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라제가 늘려 준 수명이 다할 때까지도, 성녀는 태어나지 않았다.
결국 아시어스는 다른 악마를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전에 뤼켄 일가가 소환에 실패했던 악마, 붉은 여우 티스베가 지상에 발을 디뎠다.
그로부터 20년 뒤에는 바일라도르가 아시어스의 세 번째 사역마가 되었다.
그즈음에는 아무리 그라고 한들 더 이상의 악마를 소환해 낼 수는 없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그러나 여전히 성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꼭 그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 * *
하지만 결국 아시어스는 형제의 유언을 지켰다. 그는 헬라르에게 지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굴종한 적이 없다. 아버지가 그에게 맡겼던 뤼켄가의 재건도 마탑을 통해 모두 이루었다. 못 미덥긴 하지만 어쨌든 후계자도 찾았고, 악마들도 무사히 인계했다.
그가 사랑한 여자가 평생을 갈망하던 자유도 결국 그 품에 안겨 주었다.
그러니 실패한 인생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가족들도 그에게 다짜고짜 화부터 내지는 않을 것이다.
오래 잘 버텼어. 그 말 한마디면 좋을 것 같은데.
아직도 마탑의 최상층 창가에 놓인 시들지 않는 코스모스에서 붉은 꽃잎이 떨어졌다. 언젠가 짝사랑하는 소녀를 훔쳐보는 소년처럼 설렜던 에엘의 어느 다리 위에는 아름다운 석양이 졌다.
평온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하얀 웃음이 강물에 이는 포말처럼 부서졌다. 그러니 끝이되,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