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25
126화
Chapter 11. 모든 다정했던 것들에 대하여
리즈벨은 어둠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손을 뻗어도, 몸부림쳐 봐도 그 어떤 것도 닿지 않는 무(無)의 공간이었다.
감각이라는 게 아예 사라져 버린 듯했다. 아득한 우주 같기도 했고,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의 태처럼 좁고 갑갑하기도 했다. 그러나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이상하다…….’
리즈벨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렇게 옴짝달싹할 수 없이 갇혀 있는데도 희한하게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익숙했다.
어째서?
‘언젠가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나.’
리즈벨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그녀 안에 무언가가 뿌리내리고 있으니 이런 기시감이 드는 것일 테다.
‘아…….’
오래지 않아 깨달음이 왔다.
한창 아시어스와 자신 사이의 괴리감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던 때, 지칼에게 독살당하던 날의 꿈을 꾼 적이 있다.
그 꿈을 꾸었던 게 라타에로 온 이후 처음이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 손으로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쓰러져서 숨이 끊긴 직후, 꼭 지금 같은 암경에 갇혔었다.
그때 들었던 목소리마저 또렷이 기억이 났다.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이야, 리즈벨.]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리즈벨은 그때는 몰랐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반짝. 시야 너머에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그럼 그게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던 건가. 그러나 리즈벨은 금세 위화감을 잡아냈다.
‘라타에?’
라타에라면 대륙 서쪽의 대제국인데? 내가 라타에에 간 적이 있었던가……?
섬세한 속눈썹이 움찔 떨렸다. 줄곧 감겨 있었던 리즈벨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장막이 올라가고 무대가 드러나듯, 암흑이 서서히 위로 걷혔다.
지금껏 그녀가 있는 공간을 암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틀렸다. 다만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었다. 빛이 눈꺼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눈이 시렸다. 리즈벨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그녀가 빛에 익숙해질 때쯤이 되어서야, 리즈벨은 그녀가 있는 곳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온통 새하얀 세계였다.
“여긴……?”
리즈벨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구름으로 가득 찬 것처럼 주위가 일렁거렸다. 포근한 기운이 살갗을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그러나 보이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수천, 아니 수만 수억 개의 하얀 실들이 주위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미세하게 겹쳐진 가는 실들이 부드럽게 출렁이며 그녀를 간질였다.
리즈벨은 손을 뻗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실 한 가닥을 톡 건드리자 실이 즉시 붉은빛으로 변했다.
“……!”
리즈벨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손이 떨어지자 실은 도로 하얗게 돌아왔다.
“뭐야…….”
위협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리즈벨은 저 실들이 뱀처럼 들고일어나 그녀의 목을 졸라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그녀의 손이 방금 건드렸던 실에 닿았다. 또다시 실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리즈벨은 이번에는 손가락을 떼지 않고 이어진 실을 죽 훑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끊어질 것 같다. 리즈벨은 새빨간 실을 꽉 손안에 움켜쥐었다. 실이 불안하게 떨었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 리즈벨.]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그의 실을 끊어 버렸다간 평생을 후회하게 될걸.]리즈벨은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입술 새로 느릿한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안녕.”
[안녕.]금빛 요정이 그녀 앞으로 포르르 날아왔다. 이 새하얀 세계에서 리즈벨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존재였다.
[우리 이곳에서 만나는 건 두 번째지?]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리즈벨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여기서, 우리가 비밀을 하나 만들었었지…….”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기억이 끌려 올라왔다.
지칼의 독을 먹고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리즈벨은 이곳에서 눈을 떴다. 그때도 이곳은 지금과 같았다.
뚝-.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운 실타래가 일순간 전부 반으로 뚝 끊어지던 장관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녀의 기억에 반응하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이룬 흰 실타래들이 점점 더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우리가 이야기하기 적절한 때가 아니야, 리즈벨. 사실 나는 네가 내일까지도 일어나지 않으면 너를 억지로 깨우려고 했거든.]“무슨 소리야?”
[헬라르의 공간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어. 그 전에 너는 빨리 할 일을 해야 해.]요정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다. 요정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금빛 가루가 사르르 떨어졌다.
[네가 손봐야 할 건 아까 그 실이 아니야. 잘 봐.]리즈벨은 아까 끊어 버릴 뻔했던 실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실을 발견했다. 그녀의 몸에 거의 달라붙듯이 한 실은 다른 실들과는 조금 달랐다. 어느 한 부분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남자가 잘라 낸 네 기억의 시간이야.]“그 남자가 누군데?”
리즈벨은 그렇게 내뱉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가 누구냐고? 누구냐 하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는 선택할 수 있어, 리즈벨.]요정이 빙그레 웃는 것 같았다.
[그는 너에게 기회를 줬어. 잊을 것인가, 잊지 않을 것인가.]“무슨 말을 하는 거야?”
리즈벨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정의 말이 점차 빨라졌다.
[헬라르가 그 남자가 남겨 둔 방어 마법을 깨고 너를 억지로 깨우는 순간 선택할 기회는 사라져. 그러니 어서 결정을 내려.]권능이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리즈벨은 인상을 찡그리며 제 몸을 둘러싼 긴 실을 내려다보았다. 검게 변한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그조차도 물들다 말았는지 군데군데 흰빛이 얼핏 보였다.
고민은 짧았다. 요정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너의 선택은 이전과 같구나. 나는 너를 존중해, 리즈벨.]요정의 말이 맺어진 순간, 거대한 실타래가 파도치듯 거세게 위아래로 들썩였다. 꼭 그녀의 몸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하얀 실들의 세계가 무너졌다.
정신이 수면 위로 강제로 끌어 올려졌다. 눈이 번쩍 뜨이고 호흡이 터졌다. 리즈벨은 고개를 모로 돌리고 쿨럭 기침했다.
“헉……. 흐, 으.”
몸의 감각이 지독하게 아득했다. 리즈벨은 겨우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묘하게 낯익은 천장. 흰 시트. 전사들의 행렬이 음각된 침대 옆 기둥.
“리즈벨?”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는 순간, 리즈벨은 자신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고 의심했다.
“리즈벨. 깨어, 났…….”
그녀가 내심 참 많이도 그리워했던 목소리였다. 겨우 고개를 돌려 옆을 향한 리즈벨의 푸른 눈에 짧은 밀빛 머리칼이 비쳤다. 리즈벨은 멍하니 그를 불렀다.
“오…… 오라버니?”
“아…….”
로제스가 목이 막힌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단단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바로 앉혔다. 리즈벨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야. 왜 오라버니가 여기에……?”
리즈벨은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처음 와 보는 방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어디인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창문 밖으로 회색 성벽이 보였다.
발디마르. 그녀가 나고 자란 발디마르의 왕성이었다. 동시에 잊고 있었던 것들이 제 빛깔을 명확하게 찾았다. 벌어진 입술에서 망연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시어스.”
리즈벨은 저를 향한 짙은 푸른빛 눈동자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시어스…….”
초점이 없던 푸른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기억이 단 한 순간의 끊김도 없이 완벽하게 돌아왔다. 몸은 가벼웠다. 반년 동안 그녀를 옥죄고 있던 종속의 사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시어스와의 영혼의 종속이 깨어졌다.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안다.
“누이야, 괜찮은 거니?”
로제스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즈벨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그녀는 멍하니 눈앞의 로제스를 바라보았다. 아시어스가 그녀와의 거래로 되살려낸 생명이 또렷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 말을 하는데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리즈벨은 간신히 입꼬리를 양쪽으로 끌어당겼다.
“오라버니, 그동안 잘 지냈어?”
“…….”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 그런데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아니. 오늘이 몇 월의 며칠이지?”
말이 두서없이 이어졌다. 로제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누이의 얼굴만 살폈다. 리즈벨의 시선은 세차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로제스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불쑥, 그녀가 손을 뻗었다. 로제스의 왼뺨을 만지고 느리게 어깨를 더듬는다.
리즈벨의 마지막 기억 속에서 로제스는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푸른 눈이 오라비의 짧은 밀빛 금발, 여전히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무감한 얼굴, 부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오른팔을 차례로 담았다. 그제야 어찌할 바 모르는 숨이 터졌다.
“괜찮아 보인다. 다행이야…….”
목이 메었다. 스멀스멀, 무언가가 리즈벨의 심장을 옥죄기 시작했다.
“다행…….”
다행이라고…….
아시어스가 뭘 내놓고 로제스를 살렸는지 이제는 전부 알면서도, 로제스가 멀쩡히 살아 있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이 있었다. 이 모순적인 감정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대체.”
로제스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그가 리즈벨을 끌어당겼다. 그는 몹시 어색한 동작으로 어깨를 감싸 가까이 당겨 등을 쓸어내렸다.
“대체 제국에서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리즈벨.”
종속의 사슬이 끊어졌다. 그것은 곧 자유를 뜻했다. 그녀를 노렸던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 세상에는 이제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자유. 힘. 사랑하는 가족. 안식처. 아시어스를 제외한 모든 것이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아니, 아니다.
리즈벨은 로제스에게 안겨 닥쳐오는 끔찍한 깨달음에 몸을 굳혔다.
모든 것이 있는데, 아시어스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