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30
131화
“무슨 말인데, 그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라제가 인상을 구겼다. 리즈벨은 걸음을 떼 라제 앞에 섰다. 이제는 다른 마법사의 사역마가 된 악마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었다.
라제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젠장. 너 그렇게 웃지 마.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야?”
“알면 너는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걸.”
“알면서 그런 짓을 왜 하려고 해?”
“알잖아, 라제.”
하얀 웃음이 부서졌다.
“나는 옛날부터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는 거.”
말문이 막혔다. 사실 리즈벨을 보면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분명히 라제는 리즈벨이 아시어스가 바란 대로 그와 관련한 기억을 깨끗이 잊고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전 주인이 무엇을 위해 살았고, 그녀에게 그 기회를 주려고 어떤 결심을 해야 했는지 잘 알아서. 그래서 라제는 리즈벨이 차라리 그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생을 살았으면 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면 무언가는 바뀌어야 해.”
“…….”
“내 바보 같은 마법사가 113년 동안이나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걸, 그래서 그렇게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걸 내가 얌전히 수긍하리라 생각했다면. 너희는 나를 단단히 잘못 안 거야.”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말할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 * *
북부, 이카인.
이카인은 대륙 최북단의 항구 도시였다. 항구 도시라 해 봤자 도시 몇 개를 잇는 무역로가 있는 게 전부라, 크게 발달한 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카인은 얼음의 땅 아스테르반으로 향하는 가장 짧은 직선의 항로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실은 그 항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어느 미친놈이 있는 것이라곤 눈과 얼음, 살과 혈관, 뼛속까지 얼리는 추위뿐인 그 황량한 땅으로 향하겠는가.
대륙인들에게 아스테르반은 그저 쓸데없이 거대하기만 한 땅덩어리에 불과했다. 그곳에 가는 건 탐험가들뿐이었다. 얼음의 땅 지하에 진귀한 보물이나 고대의 유적 따위가 묻혀 있을 거라 생각하는 미친 자들.
그러나 그 탐험가들은 엄밀히 말하면 진짜 금덩어리 따위나 파헤치는 이들은 아니었다.
대륙에 드넓게 뿌리내린 이단자 종파 중 하나, ‘겨울’. 이카인은 겨울의 구성원 중에서도 특히 아스테르반에 직접 드나드는 고위급 단원들의 집결지였다.
이카인과 아스테르반을 들락거리는 탐험가들은 거의 전부가 그들이었다.
“이번 항해는 길겠는데. 헬라르의 기류가 심상치 않아.”
“성녀가 사라진 탓이지. 또 몰라. 100년 전처럼 성전의 사제들 수백을 죽여서 억지로 이 땅에 강림하려 들지. 어쩌면 이미 그랬을 수도 있고.”
“……하여튼 독하기도 하지. 그 망령 같은 여신.”
북부에는 봄이 오기는커녕 아직 눈도 녹지 않았다. 사박사박. 두 명분의 발자국이 새하얀 설원에 새겨졌다.
“그런데 너는 갑자기 왜 대륙으로 또 나온 거냐, 카잔? 오래 안 나올 것처럼 굴더니.”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됐거든.”
항구 바로 옆에 딸린 작은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막 오두막 안으로 들어선 카잔은 선객을 발견하곤 경악하고 말았다.
“누구십니까?”
곁에 있던 동료가 따라 침입자를 발견하곤 날을 세웠다. 오두막 구석에 있는 난롯가에서 손을 녹이고 있던 여자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싱긋. 이 추운 북부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오두막 안에 설치해 두었던 주술들이 전부 금빛 성력에 부서져 바닥을 구르고 있는 탓이었다. 녹지 않는 얼음 조각이 그녀 주위에 가득했다.
동료가 험악한 기세로 다가서자, 여자가 그제야 곤란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미안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들어오자마자 공격해 오길래…….”
그래서 다 부숴 버렸다 이건가. 카잔은 얼떨떨한 와중에도 웃어야 할지 불평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들 무리의 힘과 정반대 선상에 있는 힘, 성력이 여자의 몸 주위를 얇게 감싸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연히 정제된 기운이었다.
휙. 무언가가 날아왔다. 동료가 여자가 던진 것을 간신히 받아 들었다.
“뭐야, 이거……. 헉, 이거!”
녹지 않는 얼음으로 만든 주술석이었다. 겨울이 아닌 자는 절대 알지도, 손에 넣지도 못하는 얼음 땅의 잔재다.
“카잔 아흐라메드.”
여자의 푸른 시선이 카잔에게 닿았다. 그는 꼼짝없이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그 증표를 가지고 네 이름을 대면 누구든, 언제 어디서든 나를 도울 거라고 했었지.”
“…….”
“그 약속, 지금도 유효해?”
동료가 당황한 눈으로 그녀와 카잔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물론.”
카잔의 입매에 장난스러운 호선이 걸렸다. 성큼성큼. 그는 벽난로 앞에 선 여자에게 큰 보폭으로 다가갔다.
“물론 유효하지요. 나는 내 이름과 고향을 걸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거든.”
“그래. 다행이네.”
성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잔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성녀님. 그 망령의 손을 부러뜨리러 오셨나요?”
몇 달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생생하게 살아 빛나는 여자가 맞잡은 손을 두어 번 흔든 뒤 놓았다.
“그래. 결심이 섰거든. 그러니 잘 부탁해, ‘동업자’.”
* * *
아스테르반으로 가는 항로는 딱 하나였다. 그 길은 오로지 탐험가들, 다른 말로는 얼음 땅의 주술사들만이 알았다.
몇 년에 한 번씩 고향으로 향하는 배를 띄운다는 그들은 노련한 뱃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조차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지금은 배를 못 띄웁니다. 파도가 너무 거세요.”
“분명히 여신의 장난질이겠지.”
헬라르의 지배권 안에 놓인 북해의 파도가 심상치 않았다. 리즈벨은 두꺼운 옷 속을 파고드는 냉기를 느끼며 파도가 철썩이는 항구를 바라보았다.
솨아아아-. 3월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강추위였다. 철썩! 파도가 항구 벽을 때리며 허공으로 산산이 비산했다.
“봄 제의가 가까워져 오는데 성녀가 돌아올 생각을 안 하니 짜증을 부릴 만도 하지.”
카잔의 동료, 루달프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리즈벨을 흘끔거렸다.
헬라르의 성녀는 지독하게도 아름다웠다. 푸른 눈은 맑고 깨끗한 창공을 닮았다.
하얀 이마와 굴곡 없는 콧대를 지나 턱으로 이어지는 선은 얇고 정교했다. 장인이 정성 들여 빚어낸 것처럼 흠잡을 데 없었다.
찬 바닷바람에 양 뺨에는 은은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반쯤 내리깔린 눈꺼풀과 긴 속눈썹, 다물린 붉은 입술은 다소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지금 짜증이 나는 게 누군데.”
그러나 그 물기 머금은 붉은 꽃잎 같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살기 등등했다. 루달프는 흠칫 놀라 카잔의 등 뒤로 쏙 숨어들었다.
“여기서 며칠씩 시간 허비할 생각 없어. 나는, 지금.”
리즈벨은 한 자 한 자 사납게 뇌까렸다.
“네 방해 수작에 놀아나 줄 여유가 없단 말이야. 이 빌어먹을 망령아.”
헬라르가 이를 가는 소리가 리즈벨에게 닿았다. 여신의 분기를 투영하기라도 한 듯 파도가 점점 더 크기를 키워 갔다.
“이러다간 해일이 올 것 같은데…….”
카잔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즈벨은 눈을 감았다. 지금 그녀에게는 여유가 많이 없었다.
사실 발디마르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리즈벨은 그녀 평생에 다시없을 인내를 발휘하는 중이었다.
이카인에는 아시어스의 흔적이 가득했다. 이곳은 또 언제 들렀다가 갔었는지, 허공을 휘도는 공기에 아시어스의 향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어딜 가나 네 흔적이 가득해, 아시어스. 그래서 버티기가 힘들어.
붉은 입술이 처참하게 짓씹혔다. 하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있어야 했다.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까.
리즈벨은 속을 차분히 정리한 뒤 카잔을 돌아보았다.
“카잔, 항해는 며칠이나 걸리지?”
“바다가 잔잔할 때는 일주일. 파도가 돕는다면 닷새.”
“닷새 안에 도착하도록 해.”
단호한 명령에 카잔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요, 성녀님. 방금 내 말은 뭐로 들었습니까? 파도가 도와야 한다니까요. 지금 저 파도가 우리를 도울 것 같아요, 아니면 심해로 끌고 들어갈 것 같아요?”
“도울 거야.”
“객기 부릴 때가 아닙니다, 성녀.”
객기. 객기인가? 리즈벨은 그녀가 가진 권능을 온전히 내보이지 않기 위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감정을 눌렀다.
그녀가 가진 게 자신이 갖지 못한 시간의 힘이라는 걸 알면 헬라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장 그녀를 차지하려 하리라.
헬라르가 그녀가 가진 힘의 본질을 알아채기 전에 아스테르반에 도착해야 했다.
“나는 무모한 짓을 벌이지는 않아.”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황을 분석하고 알맞은 방법을 골라내며 승패를 점쳐 보는 정도의 머리는 필요했다. 리즈벨의 사고가 기민하게 돌아갔다. 헬라르의 지배권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방법이 없지는 않다.
리즈벨 자신의 성역을 선포하면 된다.
하지만 저 끝없는 망망대해를 성역으로 만드는 계획은 확실히 무모하다. 그러나 애초에 굳이 이 바다 전체를 그녀의 영역 안에 놓아야 할 필요도 없다. 비효율적이니까.
“배는 안전할 거야.”
“뭐요?”
리즈벨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파도가 다시금 들썩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빈말로도 파도라는 귀여운 수준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집채만 했다.
동시에 리즈벨의 몸을 휘감고 있던 빛 무리가 솟구쳐 올랐다. 그들의 머리 위로 금빛 장막이 펼쳐졌다. 거대한 해일이 그대로 장막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금빛 장막이 세차게 흔들렸다. 리즈벨은 살성 짙은 바다의 위력에 실소했다.
해일을 막아 낸 금빛 장벽이 너울거리며 부서져 내렸다. 성력은 항구에 매여 있던 배로 곧장 흘러 들어갔다.
카잔은 입을 벌리고 그의 배가 서서히 성력으로 차오르는 광경을 보았다. 성역이 선포되는 걸 목격하는 건 처음이었다.
“닷새야, 카잔.”
배의 거대한 돛대가 막 끄트머리까지 금빛으로 물들었을 때, 차디찬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이젠 네가 최선을 다해야 할 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