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32
133화
* * *
리즈벨은 그녀가 디딘 땅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 이질적이다. 살을 엘 듯한 추위는 둘째 치더라도,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가 대륙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고대의 힘이 감도는 땅.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네…….”
리즈벨은 빨갛게 언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 안의 권능이 낯선 땅의 기운에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리즈벨은 천천히 몸 안에 남은 성력을 회전시켰다. 헬라르의 성력은 별다른 매개체가 없는 한 이 땅에서는 전부 무효화된다.
그렇다면 그녀가 가진 그녀 자신의 힘은?
사락. 희미한 금빛 형체가 손 위에 나타났다. 리즈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사라져 버린 줄 알았어.”
그러나 그녀의 성력도 이곳에서는 본래의 힘을 전부 발휘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다시 형체가 뭉그러진 요정이 느리게 그녀의 손 위를 걸었다. 하지만 이 정도라도 충분하다.
리즈벨은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네. 한참 더 잘 것 같더니.”
“……괜찮아요?”
“난 다친 데 없어.”
카잔이 혀를 내둘렀다.
“누구는 그대로 수장되는 줄 알았는데 누구는 당황한 기색도 없고……. 간이 얼마나 큰 겁니까, 대체?”
리즈벨은 대답 없이 웃었다. 사실 바다 위에서 헬라르를 상대하는 일 정도는 그녀가 지금부터 벌이려는 일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에도 못 미쳤다.
“춥지도 않습니까? 달랑 로브 하나 걸치고.”
카잔이 혀를 차며 입 속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주술사들이 힘을 쓰는 방법은 언령인 모양이었다. 새하얀 눈밭에 검은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훅 그치고 눈보라가 멈추었다.
그제야 얼음의 땅의 전경이 제대로 보였다. 이 섬의 땅은 전부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투명한 유리처럼 맑은 얼음 위에 두꺼운 눈이 쌓였다. 눈을 조금 걷어 내면 이 차디찬 얼음의 땅에도 뿌리를 내린 전나무들의 뿌리 하나하나가 전부 보였다.
리즈벨은 그 기이한 광경을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결국에는 여기까지 왔다. 결국에는……. 결국에는 나 정말 아스테르반까지 왔어, 아시어스.
“시간을 돌린다고 했죠?”
“……응.”
대답하는데 목이 메었다. 그녀의 심경 따위는 모를 카잔이 그녀를 슬쩍 떠보듯 물었다.
“그래서 몇 년을 돌릴 생각입니까? 그가 죽기 전이라면, 작년으로?”
“아니.”
리즈벨은 눈이 내리는 새하얀 설원을 바라보았다.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입꼬리가 이내 옅은 호선을 그렸다.
“113년.”
순간 카잔은 제 귀를 의심했다.
“뭐…… 무슨…….”
“일이 년 가지고는 안 돼. 어긋난 것은 뿌리부터 바로잡아야 하니까.”
리즈벨의 목소리에 더 이상 떨림은 없었다. 반면 카잔은 더는 웃을 수가 없었다.
“당신 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 아까 배에서 머리 어디를 부딪치기라도 한 거 아냐?”
“그럴지도 몰라.”
그제야 여자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진짜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무슨 짓을 하려고……?”
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카잔은 여자의 손에서 번뜩이는 단도를 보자마자 그 전까지 하던 모든 생각을 집어치웠다.
“이런 미친. 리즈벨!”
번뜩이는 칼날을 제 심장 부근에 대고 각을 재어 보려는 듯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위인은 없을 것이다. 로브가 흘러내려 드러난 리즈벨의 손등에 검은 주술이 새겨졌다.
“……!”
단도가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카잔은 여자의 손목을 움켜쥐고 윽박질렀다.
“뭐 하는 짓이에요, 이게!”
“나는 시간의 세계로 들어가는 법을 하나밖에 몰라.”
리즈벨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실제로 시간을 되감아 본 적은 딱 한 번뿐이야. 실패는 없어야 해. 그러려면…….”
그러려면, 그녀가 지난 열다섯에 시간을 되돌렸을 때와 완벽히 같은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리즈벨이 떠올린 방법은 하나였다.
“그러려면 죽거나, 죽음에 버금가는 위기가 닥쳐야 해.”
누군가에게 살해당해 죽는 것보다는 그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맞는 게 낫다. 카잔이 기막혀하며 물었다.
“그럼 지금 여기에 죽으려고 왔다는 말이에요?”
“응.”
리즈벨이 실성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카잔. 내가 가야 하는 세계는 무의식 속에 잠겨 있는 세계야. 발디마르에서부터 계속 시도해 봤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어. 그냥 깊은 잠에 빠지는 것으론 부족해.”
운명을 거스를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건이 벌어져야 했다. 독을 먹고 죽거나, 아니면 그녀의 능력을 웃도는 강력한 마법에 걸려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거나. 리즈벨은 잔뜩 들떠 횡설수설 지껄였다.
“내가 왜 굳이 여기까지 왔겠어. 그 무의식 속에 빠져들면 무방비해지니까. 그동안 헬라르의 눈을 피하려고-.”
“정신 차려요, 리즈벨.”
카잔이 이를 갈며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 좋은 머리는 대체 어디에다 두고. 기껏 이 땅까지 와서 생각해 낸 방법이 고작 그겁니까? 자결?”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리즈벨의 목소리 끝에 잔 떨림이 섞였다. 그녀는 추위로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아시어스가 죽었는데.”
“…….”
“그리고 나한테는 그를 다시 되돌려 놓을 힘이 있는데. 내가 못 할 이유가 뭐가 있어?”
푸른 눈이 젖어 들어갔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은 살을 에는 추위에 금세 작은 결정으로 얼어붙었다. 그녀가 카잔에게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제 목을 감쌌다. 흡사 조르기라도 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숨 막혀.”
“……리즈벨.”
“이렇게 숨이 막히는 일일 줄 몰랐어.”
네가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 없다는 게 이렇게 끔찍한 공허함으로 나를 짓누를 줄 몰랐다. 띄엄띄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화내지 말걸.”
“…….”
“그때 그를 힘들게 하지 말걸. 그때 그냥 내가 한 번 져 줬으면…….”
애써 높이 쌓아 두었던 감정의 둑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내가 로제스를 살리라고 하지만 않았으면. 이럴 일은 없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말을 뱉으면서도 리즈벨은 알았다. 시간을 딱 1년만 돌려서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은 로제스 대신 아시어스를 택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이 자괴감을 키웠다.
그러니 고작 1년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돌려 봤자 어차피 그녀는 결국 또다시 이 땅 위에 서게 될 테니까. 리즈벨은 카잔에게 붙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그거 이리 줘. 한 손으로는 부족해. 이왕 할 거 단번에 끝내고 싶으니까.”
“……숨이나 제대로 쉬고 말하지.”
리즈벨은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까스로 호흡했다.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카잔이 눈밭 어딘가를 발로 뻥 찼다. 단도가 까마득한 설원으로 멀리멀리 날아갔다.
그가 투덜거리듯 리즈벨의 손목을 휙 놓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당신에게는 그딴 최악의 선택지 말고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무슨…….”
“머리 좋잖아요, 성녀님. 잘 생각해 봐.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당신 앞엔 누가 있는지.”
새하얀 설원에 붉은 머리카락이 마치 핏방울처럼 이질적이었다. 리즈벨의 머리가 아주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 앞에 있는 건 얼음 섬의 주술사. 그리고 이곳은 그의 땅. 카잔이 그녀를 압도하는 땅…….
“재워 줄게요. 당신 마법사가 당신에게 해 줬던 것처럼. 이곳에서라면 당신 하나쯤 재우는 건 일도 아닐걸.”
“…….”
“시간을 백 년이든 천 년이든 돌려 봐요, 어디. 그딴 식으로 돌려서 당신 남자가 반겨 줄지.”
리즈벨은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에 얼어붙어 있던 작은 얼음 조각이 툭 떨어졌다.
그런 걸까, 아시어스. 그녀는 그새 습관이 되어 버린 것처럼 그녀의 마법사에게 물었다.
그렇게 네게 돌아가면, 너는 나를 반겨 주지 않을까……?
* * *
[그 남자에게 감사해야겠구나, 리즈벨.]이제는 소녀의 모습으로 자라난 리즈벨의 권능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어쩐지 꾸짖는 듯한 어조였다.
[네 마법사는 너더러 살라고 기회를 줬어. 넌 그걸 소중히 할 줄 알아야 해.]리즈벨은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아스테르반으로 오면 바로 죽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건 발디마르에서부터였다. 하지만 카잔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했던 건 확실히 그녀가 간과한 부분이다.
리즈벨은 온 사방에 너울거리는 흰 실타래 사이에 앉아 얌전히 요정의 꾸중을 들었다.
요정은 한참이나 더 ‘네가 멋대로 죽음을 택하는 건 너뿐만 아니라 네 마법사, 그리고 네 생존 본능으로 깨어난 권능인 나까지 기만하는 일이다’라는 요지의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다음에야 숨을 돌렸다.
[……그래, 어쨌든. 무사히 이곳까지 다시 오기는 했으니까. 우리가 10년 전에 했던 일을 다시 해 볼까.]리즈벨은 고개를 들어 새하얀 시간의 선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일단 이 세계에 들어오고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생각은 이미 마쳐 놓았다.
“시간을 분리할 거야.”
리즈벨은 거대하게 뭉친 실타래 한 줄기를 툭 건드렸다. 즉시 실이 붉게 빛났다. 시간 선은 수만 수억 개의 가느다란 실로 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 실들은 전부 같은 파동으로 일렁거렸다.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하나로 이어진 타래다.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을 상징했다. 과거가 없이는 현재가 없고, 현재가 사라지면 미래도 없다. 그러나 리즈벨은 그 절대 진리를 정면으로 부정할 셈이었다. 시간 선을 나눈다.
“10년 전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5년 치의 시간을 전부 끊어 버렸지만…….”
지금은 그때와 같아서는 안 됐다. 되감겨서는 안 되는 시간들이 있으니까. 로제스가 살아 있는 지금의 시간, 이 세계가 무너지면 안 된다. 잘라 내야 할 시간대는 명확했다.
[그렇게 분리한 세계는 오래가지 못해, 리즈벨.]요정이 조용히 경고했다.
[본래의 시간 선에서 떨어져 나온 세계는 천천히 소멸해 갈 거야. 모체가 되는 세계도 마찬가지고. 과거 없이 현재나 미래가 존재할 수 있겠어?]“괜찮아. 과거를 바꾸고 나면 이 실들을 다시 하나로 합쳐 놓을 거니까.”
현재의 시간을 잠시 멈춰 두고, 과거만 떼어 바꾼 뒤 다시 현재와 연결 지어 놓으면 된다.
리즈벨은 한 손으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실타래의 끝을 조심스레 쥐었다. 꼭 살아 있는 생물체를 만지는 듯한 촉감이었다.
“이렇게 지금 흘러가는 시간을 멈춰 두고.”
리즈벨의 다른 손이 뻗어졌다. 실타래 한중간으로 손을 넣자 실들이 부드럽게 반으로 나누어졌다.
“여기만 잘라 내서 바꾸면 돼.”
[그 사이의 괴리는 어쩌고? 과거가 바뀐다면 마땅히 현재도 미래도 그에 맞춰 변해야 해. 그 간극을 어찌 메울 셈이야?]“그 괴리는 전부 감당해야지.”
[네가?]“아니.”
리즈벨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 세계를 이루는 건 시간뿐만이 아니잖아. 헬라르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괴리는 그녀도 감당해야지.”
[…….]“이 세계의 모든 공간을 지배하는 권능이라면 그 간극을 메꾸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거야. 부족하다면 다시 하나하나 손봐야겠지. 바뀐 과거가 현재와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그래, 그 감당은 내가 해.”
[……보통 중노동이 아닐 텐데.]“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리즈벨이 쥔 시간의 타래가 부드럽게 떨어져 나왔다. 하얀 실들의 세계가 동시에 출렁였다.
“그렇다면 나는 그게 뭐든 시도해 볼 거야.”
보통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계획이었다. 요정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고, 리즈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 다시 형상화된 커다란 성력의 낫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하얀 시간의 타래를, 다른 한 손에는 날카로운 금빛 낫을 든 리즈벨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럼, 어디 한번.”
푸른 눈이 짙게 번뜩였다.
“잘라 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