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33
134화
* * *
타닥타닥. 난롯불이 평화롭게 타올랐다.
성녀는 침대에서 죽은 듯 잠에 빠져 있었다.
엘모와 카잔은 번갈아 난롯불을 쑤시다가 이따금 일어나 외출을 했고, 얼음의 땅에 사는 들짐승들을 잡아다 구웠다. 전나무 숲 지대 건너에 사는 다른 주술사들을 만나러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어딘가의 시간은 끊임없이 되감기고 있었지만, 아스테르반의 시간에는 변화가 없었다.
대륙과는 전혀 다른 시간의 궤에 놓인 섬과 그 섬 위의 주술사들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존재했다. 오두막 한구석에 잠들어 있던 여자가 마침내 눈을 뜰 때까지.
“일어났구나.”
“…….”
푸른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엘모는 가까이 다가가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고생했다.”
벽에 기대앉은 카잔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없는 말은 안 할 것 같더라니.”
리즈벨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저는…….”
마른 입술 사이로 푹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성공했나요?”
“이곳에선 정확히는 알 수 없지. 대륙으로 나가라. 나가서 네 눈으로 확인해.”
푸른 눈에 차츰차츰 생기가 돌았다. 엘모는 다시금 생이 차올라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여자를 보며 부드럽게 제안했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너라.”
“…….”
“이곳이 네가 무언가를 묻을 곳이야.”
엘모는 여자의 목에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은빛 줄에는 투명한 주술석이 달려 있었다.
“딱 한 번. 이것이 너를 이 땅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바닷길을 통해 오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돌아올 수 있을 거야.”
“…….”
“헬라르를 찾아 네게 종속시키는 데 성공한 순간. 네가 이것을 써야 할 때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것을 데리고 돌아와. 기회는 한 번이라는 걸 명심하고.”
리즈벨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모는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그럼 다시 보자꾸나, 리즈벨.”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호선이 걸렸다.
그날, 리즈벨은 정확히 몇 년을 거슬러 왔는지 알 수 없는 시간대에서 눈을 떴다.
* * *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리즈벨은 뱃전에 앉아 따스한 햇볕이 내리비치는 바다와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스테르반으로 떠날 때 온 바다를 휘몰아치던 폭풍우는 흔적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짭조름한 미풍이 긴 금발을 흐트러뜨렸다.
항해는 길지 않았다. 멀찍이서 보이던 작은 섬이 점점 가까워 왔다.
“직접 눈으로 보게 될 거라더니, 정말 그렇네요.”
카잔이 중얼거렸다. 작은 조각배가 막 닻을 내린 직후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할 줄은 몰랐지.”
“아직 확실히 성공했는지는 몰라.”
리즈벨은 배에서 내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돌아갈 거야?”
“난 다시 가서 기다리고 있어야죠. 당신이 그 망령의 손아귀를 붙잡고 돌아올 때를.”
“오래는 안 걸려. 일이 다 끝나고 시간 선을 봉합하고 나면 너도 무사히 네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푸른 눈에 약간의 미안함이 어렸다. 카잔은 엉뚱한 곳을 짚은 여자를 보다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리즈벨이 순순히 그의 손을 맞잡았다. 카잔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떻게든 헬라르를 붙잡아서 아스테르반으로 끌고 들어오기만 해요. 그걸 영원히 봉인하는 건 우리 주술사들이 할 테니까.”
“뭐?”
뜻밖의 말에 리즈벨은 눈을 깜빡였다. 카잔이 눈을 찡끗했다.
“그 정도 뒤처리는 할 수 있어요. 말한 적 있지 않습니까. 우리 땅 위에선 우리가 다른 모든 걸 압도한다고. 당신도, 당신 마법사도, 그리고 헬라르까지도.”
“…….”
“그러니까 먹히지 말고, 지지 말고. 그 망령을 손에 꼭 쥐고 돌아와요.”
그의 자신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카잔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든든한걸. 알겠어, 믿어 볼게.”
“몸조심하시고. 당신 남자에게 안부 전해 주고.”
카잔은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작별이다.
“…….”
리즈벨은 작은 조각배가 다시 바다 위로 미끄러지는 것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배가 손톱만큼 작아지고, 입가에 떠올랐던 호선이 서서히 사그라들 때쯤 그녀도 몸을 틀었다.
얼음의 땅을 떠나 다시 헬라르의 대륙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 * *
리즈벨은 카잔이 내려 준 섬에서 대륙으로 나가는 대형 범선으로 갈아탔다. 대륙 북부를 도는 여객선이었다.
그녀가 아스테르반을 떠나온 지 벌써 이레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배가 첫 번째로 상륙하는 항구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번 항구는 베르톨트. 베르톨트입니다.”
베르톨트. 리즈벨은 그 낯선 지명을 속으로 두어 번 되뇌었다. 기억에 없는 지명이다. 그녀가 떠나왔던 항구의 이름은 이카인이었다.
항구의 이름이 바뀔 만큼의 시간은 거슬러 왔구나.
리즈벨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그녀가 제대로 시간을 돌린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올해가 대륙력 몇 년인지 확인하면 된다. 당장 곁에 있는 사람에게 오늘의 날짜를 묻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박동했다. 리즈벨은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다가 달싹이기를 반복했다.
혹시 실패했으면 어쩌지. 햇수를 잘못 계산했으면?
시간의 실타래를 잘라 내는 것에 조금의 오차라도 있었다면 그녀가 어느 시간대로 떨어졌을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불안감과 긴장감으로 가슴이 무겁게 조여들었다.
“베르톨트 도착. 베르톨트 도착. 승객 여러분께서는 목적지를 확인하고 하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법으로 증폭된 기관사의 목소리가 선실 안팎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리자 리즈벨은 재빨리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렸다.
일단, 여기서 내리자.
“너 소식 들었어? 이번 봄 제의에 성녀께서 라타에에 축복을 내릴 예정이라 하시더라.”
“역시 축복받은 땅이군. 이 추운 북부에도 좀 와 주셨으면 좋겠는데……. 성녀께선 라타에에만 호의적이니, 원.”
“성녀님과 성전에 가는 라타에 황실의 예산만 어마어마하다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함께 하선하는 남자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성녀. 그 단어에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마지막 성녀가 뤼켄의 악마 소환에 휘말려 죽은 뒤 대륙에는 113년 동안 성녀가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저들 입에서 성녀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건, 이 시간대는……. 리즈벨 이전의 성녀가 살아 있는 세계. 적어도 113년보다는 더 앞서 있을.
리즈벨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반은 성공이다. 리즈벨은 짜고 습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항구에 발을 디뎠다.
“……이카인 항구.”
항구의 전경은 낯익었다. 하선장의 난간이 정교한 대리석이 아니라 나무로 되어 있고, 주위의 식당이며 여관들의 위치는 전혀 달랐지만, 항구를 이루는 기본 골격은 이카인과 같았다. 아마 옛날에는 이카인을 베르톨트라고 불렀던 모양이었다.
“아, 왜 안 되는데!”
“거참, 질척거리기는! 절대로 안 된다고 안 했냐, 엘제!”
항구는 시끌벅적했다. 리즈벨은 일단 이동 마법진 관리소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도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랑 거래하기로 안 했어? 이건 계약 위반이야. 네 금고를 훔쳐 간 놈을 잡아 주면 네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겠다고 했잖아!”
누군가 리즈벨의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가며 소리 죽여 외쳤다. 리즈벨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고향?
“아, 글쎄. 가는 길을 알려 주겠다고 했지, 직접 인도해 주겠다고는 안 했잖아!”
“이런 사기꾼!”
“어억!”
듣기만 해도 뼈가 아파져 오는 소리가 났다. 정강이를 걷어차는 소리였다.
“엘제니아 뤼켄!”
다리를 붙들고 풀썩 쓰러진 남자가 이를 갈며 외친 이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뤼켄. 분명히 뤼켄이라고 했어.
“됐어. 다른 주술사를 알아볼 테니 꺼져! 아, 계약 위반이니 네놈의 금고는 내가 가져간다.”
휙. 리즈벨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스쳐 지나간 시야에 잡힌 것은 흑단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를 가진 늘씬한 미인이었다.
휙, 푸르스름한 마력이 여자의 발밑에 그물처럼 펴졌다. 리즈벨은 급히 목소리를 냈다.
“저기……!”
그러나 그녀는 한발 늦었다. 푸른 이동진이 발동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의 모습은 항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여튼 성격 하나는 더럽다니까. 아흑, 내 정강이…….”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아 정강이를 호호 불고 있던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진 것이다.
“……?”
남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누, 누구……?”
여자의 주위에 휘도는 정체 모를 기운이 그를 압도했다. 후드가 살짝 젖혀지고 상대의 얼굴을 완전히 눈에 담은 순간, 남자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젖혔다.
“히익.”
차마 똑바로 올려다보기가 황송할 정도로 눈부신 미인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아마 사람처럼 빚어 놓은 인형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그에게로 떨어지는 목소리는 마귀의 것처럼 싸늘했다.
“방금 너와 대화한 그 여자,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