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34
135화
* * *
리즈벨의 얼굴은 100년 뒤든 100년 전이든 비슷한 위력을 발휘했다. 사람을 현혹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마법이나 성력 따위가 아니라 얼굴인 걸까.
리즈벨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다 이내 집어치웠다. 어쨌든 그녀는 잘못 듣지 않았다. 겨울의 단원인 남자에게서 알아낸 여자의 이름은 엘제니아 뤼켄이었다.
뤼켄. 리즈벨이 살던 시간대에서는 단 한 명밖에 갖고 있지 않았던 이름.
“라, 라타에 출신의 마법사입니다. 뤼켄가의 제자라고 하더이다. 저는 그것밖에는 모릅니다……!”
뤼켄가의 제자. 리즈벨은 뤼켄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다. 마탑의 전신이 되는 가문이었으며, 113년 전 멸문하기 직전까지 대륙 마법의 역사를 견인했던 유서 깊은 마법 가문이라는 것이 그녀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뤼켄의 제자는 모두 본래의 성을 버리고 뤼켄의 성을 쓴다고 했다. 그러나 리즈벨의 직감이 그녀를 이끌었다.
여자를 본 그 짧은 사이, 그녀의 발밑에 푸른 마법진이 얽히던 그 찰나의 파동. 아시어스의 것과 닮아 있었다.
리즈벨은 길거리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았다. 리즈벨의 로브 아래로 범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금빛 기운이 땅으로 흘러들었다. 힘을 쓰는 데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혹시라도 헬라르가 그녀의 기운을 눈치채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미세한 성력의 기운이 베르톨트의 땅을 타고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탁, 어딘가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검은 머리의 여자가 엮었던 마법진과 비슷한 파동이 리즈벨의 감각을 타고 올라왔다.
“찾았다.”
여자는 가까이에 있었다. 리즈벨의 직감이 외쳤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그 여자. 검은 머리카락. 서느렇게 뻗은 눈매…… 그리고 잿빛 눈.
아시어스의 가족 이야기를 딱 한 번 들어 본 적이 있다. 113년 전의 참극에서 전부 사망한 뤼켄가의 직계들. 분명히 형과 누나가 있었다고…….
리즈벨은 막 어느 여관으로 들어서려던 여자의 팔뚝을 잡아챘다.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붉은 마력이 튀었다. 리즈벨의 후드 끈이 서걱 베여 나갔다.
금빛 머리카락이 때마침 불어온 바닷바람에 높이 휘날렸다.
“누구…….”
상대를 확인한 여자의 얼굴에 약간의 놀람과 의아함이 스쳤다.
“어머나. 미인이시네.”
여자, 엘제니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레몬 속살을 닮은 빛깔의 금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푸른 눈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붉은 입술은 안쓰럽게 파르르 떨렸다.
왠지 모르게 필사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라, 엘제니아는 저도 모르게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그런데, 누구신지?”
여자는 살짝만 건드려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엘제니아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훑는 동안, 엘제니아는 여자의 몸에 미세하게 도는 기운을 읽어 냈다. 기이한 파장이었다. 색으로 따지면 은빛에 가까운 아주 밝은 금빛일까.
‘성력……?’
그러나 엘제니아는 바리엔의 성녀가 가진 기운을 떠올리고는 그 가정을 삭제했다. 얼핏 헬라르의 성력과 비슷했지만 분명 달랐다.
헬라르의 성력은 온기를 품고 있지 않다. 엘제니아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당신, 정체가-.”
“동생은 잘 있나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엘제니아는 말을 멈추었다. 잿빛 눈이 가늘어졌다.
“아시어스를 알아요?”
리즈벨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엘제니아의 말 어디에도 그녀의 마법사가 이 세계에 없다는 뜻은 담겨 있지 않았다.
엘제니아의 팔을 움켜쥔 리즈벨의 손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한참을 마른침을 삼키며 속을 갈무리한 끝에, 리즈벨은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이 제국력으로 몇 년의 며칠이죠?”
“……1102년 4월 20일.”
제국력 1102년 4월. 리즈벨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확히 113년을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돌아온 시간은 1102년의 봄. 뤼켄가의 참극으로부터 정확히 석 달 전이었다.
* * *
엘제니아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금발의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아름답고, 그리고 아름다운 만큼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인간을 단 한 번이라도 보았었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름이 뭐예요?”
“……리즈벨.”
여자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리즈벨. 엘제니아는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예쁜 발음이네요. 성은 없고?”
여자는 말간 얼굴로 그녀를 보다 살풋 웃었다. 묻지 말라는 뜻이리라.
엘제니아는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검은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며 계속해서 리즈벨을 주시했다. 그녀는 방금 리즈벨을 그녀가 머무는 여관에 데려온 참이었다.
사실 낯설고 수상한 여자를 이렇게 가까이 두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특히 지금 같은 시국엔. 그러나 이상한 이끌림이 엘제니아를 움직였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모양이죠? 내 동생도 알고 있는 걸 보면.”
“아스테르반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으신가요?”
대답 대신 뚱딴지같은 말만 돌아왔다. 엘제니아는 얼굴을 구겼다.
“방음 마법이라도 쳐 놓을 걸 그랬네. 듣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다면.”
“왜 그 땅으로 가려고 하나요? 거긴 눈과 얼음밖에 없는 땅인데.”
보면 볼수록 수수께끼 같은 여자였다. 꼭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존재감이 투명했다.
목소리마저도 허공을 걷는 듯 꿈결 같았다. 그러나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였다.
엘제니아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 땅의 힘이 필요해서.”
그 답을 듣자 리즈벨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헬라르 때문이군요.”
“뭐…….”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였어.”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공격성 짙은 붉은 마력이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허공에 떠오른 다섯 개의 마법진이 리즈벨을 둘러쌌다.
엘제니아는 날카롭게 내뱉었다.
“너. 정체가 뭐야?”
리즈벨은 엘제니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2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 뤼켄가의 본저에서 가주와 함께 시체조차 남지 못한 소멸을 맞았다는 뤼켄의 둘째 딸. 리즈벨의 머리가 완벽한 이성을 찾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113년 전, 뤼켄이 성녀가 휘말릴 만한 대규모의 악마 소환을 벌인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뤼켄의 직계 중 한 명이 이 대륙 북쪽 끝까지 와 아스테르반의 힘을 찾는다. 이즈음에 뤼켄과 헬라르 사이의 기류가 심상찮았음이 분명했다.
리즈벨은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가느다란 은빛 목걸이를 엘제니아에게 보이도록 내밀었다.
목걸이에 달린 푸르고 투명한 무언가가 길게 늘어졌다. 그것을 본 엘제니아의 표정이 변했다.
“그거…… 설마.”
엘모가 준 녹지 않는 얼음. 아스테르반의 주술이 잠들어 있는 주술석이었다.
“그 땅으로 가는 항로를 알아요.”
카잔이 리즈벨을 아스테르반으로 안내하는 동안, 리즈벨은 그 항로를 권능의 힘에 전부 새겨 놓았다.
“그 길을 알려 줄 테니까. 그리고 뤼켄이 목표를 이루는 데 힘을 보태 줄 테니까.”
“…….”
“저를 뤼켄의 가주에게로 데려가 주세요.”
그녀의 어조는 얼핏 순종적으로 들렸으나 엘제니아는 그 안에 담긴 묘한 어투를 읽어 냈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서투른 존대. 범인은 가질 수 없는 말투였다.
“……거래의 보증은?”
엘제니아는 어느 순간 대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리즈벨은 짧게 웃었다.
“내 목숨으로.”
엘제니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걸로는 부족한 건가? 리즈벨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시어스와 발디마르에서 맺었던 것 같은 물리적인 계약을 다시 맺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몸에 남는 붉은 낙인의 계약. 그런 것도 저는 괜찮은데…… 그걸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하신다면 그것도-.”
“피의 낙인? 이 아가씨 보게.”
엘제니아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리즈벨은 냅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약간 당황했다.
“어느 마법사가 그런 위험한 계약을 맺자고 꼬드겼어요? 거기에 또 넘어갔어?”
“네?”
엘제니아가 큰 보폭으로 리즈벨에게 다가왔다. 엘제니아의 키가 더 커서 리즈벨은 그녀를 조금 올려다보아야 했다. 엘제니아가 엄격하게 훈계했다.
“낯선 사람에게 함부로 목숨 같은 건 거는 거 아니에요, 아가씨.”
“네……?”
“어디서 살다 왔기에 낙인을 찍어 달란 얘기가 턱턱 나와?”
리즈벨은 정말로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그게 그렇게 위험한 거였나? 종속의 마법에 비하면 그다지…….
리즈벨의 손을 휙 낚아 올린 엘제니아가 마력을 엮었다. 원형의 마법진이 리즈벨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과했다.
“어허, 이것 봐라. 마력에 붙들렸던 흔적이 있네? 아가씨 혹시 영혼 계약 같은 거 맺은 적이 있어요?”
리즈벨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엘제니아는 동생보다 눈치가 다섯 배는 빠른 모양이었다.
“어느 간 큰 놈이 뤼켄의 금기를 어긴 거지. 그놈 아직 살아 있나요? 아버지께 보고라도 올려야 할 것 같은데.”
“그…….”
할 말이 궁했다. 푸른 눈이 정처 없이 방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