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37
138화
서늘한 느낌을 주는 눈매와 상반되는 섬세한 얼굴선은 리즈벨의 기억 속 남자와 꼭 같았다. 그러나 아시어스의 외형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사람을 홀리는 색정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였는데, 어린 그는…….
“……귀여워.”
리즈벨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아이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리즈벨은 그 모습에 또다시 하던 생각을 다 잊어버렸다. 잿빛 눈이 얇은 눈꺼풀에 덮였다가 다시 드러날 때마다 심장이 쿵, 쿵 아래로 떨어졌다.
시련과 고뇌라고는 모르는 말간 표정. 잿빛 눈에는 낯선 이를 향한 약간의 호기심과 탐색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은 또 다른 의미로 사람을 두근거리게 했다.
“아시어스. 너…….”
결국 불가항력이었다. 리즈벨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너 정말 예쁘다.”
너무 귀여워. 섬세한 도자기 인형처럼 생긴 아이가 눈을 살짝 치떴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아, 그래…….”
이 반응, 어렸을 때부터 있던 습관이었나. 너무나 아시어스다운 반응이라 약간 떨떠름했다. 그러나 아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손님이 저보다 더 예뻐요.”
잿빛 눈이 반짝거리며 그녀를 이모저모 살펴보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겪어 보았던 상황과 대사다. 리즈벨이 묘한 향수를 느끼는 사이, 소년이 그녀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제가 손님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이는 목소리는 예쁜 미성이었다. 리즈벨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다시금 누르며 말을 흐렸다.
“그냥, 너 좋은 대로…….”
“그럼 이름으로 불러도 돼요?”
아이가 이렇게 나오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리즈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름 불러.”
“리즈벨.”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처음부터 이렇게 부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소년이 그녀의 이름을 몇 번 더 되풀이했다.
“리즈벨…….”
리즈벨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아이를 보았다. 시간이 되감겼으니 지금 시간대의 아시어스는 그가 겪었던 일들에 대해 까맣게 모를 것이다. 그녀의 존재는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러니 아시어스가 그녀를 어떻게 여길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저도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그러나 소년의 눈이나 목소리에 적개심은 없었다. 그저 답을 독촉하듯 잿빛 눈을 가늘게 뜰뿐이었다. 리즈벨은 천천히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아시어스.”
서늘한 눈매가 만족스럽게 휘었다. 소년은 다시 돌아서서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리즈벨 방은 3층이에요.”
“아, 응.”
리즈벨은 소년과의 거리가 세 걸음이나 떨어진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뒤를 따랐다.
“중앙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침실, 그 옆은 형, 대각선은 누나. 그리고 이 코너를 돌면…….”
계단 앞을 지나 코너를 돌자 또 다른 복도가 나타났다.
“여기는 제 방, 그리고 리즈벨 방은……. 여기.”
아이는 제 방이라 소개한 방과 대각선으로 멀찍이 떨어진 문 앞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문을 열자 깔끔하게 정돈된 침실이 모습이 드러났다.
“욕실은 이쪽. 그리고 침대 옆의 종을 울리면 사용인이 올 거예요. 불편한 게 있다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말해 주세요.”
방 안으로 쏙 들어간 아이는 방을 한 바퀴 쭉 돌며 줄줄 읊었다.
“종종 저택 어딘가에서 폭발음 같은 게 들릴 수도 있는데, 자주 있는 일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리즈벨은 소년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아이가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귀여워…….’
“소리가 너무 시끄러우면 방음 마법을 다시 걸어 드릴게요.”
몇 마디 더 한 것 같은데 안 들린다. 리즈벨은 소년의 말이 다 끝난 뒤에야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혹시.”
리즈벨은 다소 말을 골랐다.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말투가 불쾌하거나 하지는 않아? 높일까?”
이 시간 선에서 리즈벨의 신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뤼켄의 공자라면 이런 사소한 무례에도 불쾌할 수 있으리란 데에 막 생각이 미친 참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요.”
“응…….”
생각해 보면 아시어스는 그보다 어린, 사실은 까마득하게 어린 그녀가 말을 어떻게 하든 한 번도 지적해 본 일이 없었다. 본인은 존대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것도 어렸을 때부터 이어져 온 습관의 일환일까. 리즈벨이 그렇게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아이의 얼굴에서 그녀의 남자를 덧그려 보고 있을 때였다.
“내일 아침에 와도 돼요?”
“응?”
정신을 차려 보니 아이가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리즈벨이 당황해서 얼른 대답하지 못하니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저택 안내. 어머니가 저택을 안내해 주라고 하셨는데.”
“아, 그랬지. 그래.”
리즈벨은 서둘러 대답했다. 소년은 대답을 듣고도 한동안 리즈벨을 쳐다보았다. 저 눈을 온종일 보고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안 아파요.”
리즈벨은 하마터면 그 작은 목소리를 놓칠 뻔했다.
“응? 방금 뭐라고…….”
리즈벨이 어리둥절해서 되묻자, 아이가 지금껏 그녀에게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안 아프니까, 울지 마세요.”
“아.”
“내일 올게요. 리즈벨.”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는 재빠르게 문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눈을 못 마주치고 일단 도망부터 치는 게, 꼭 부끄럼을 타는 것 같이 보였다.
“아…….”
리즈벨은 한 박자 뒤에야 그 말뜻을 이해했다.
“뭐야, 진짜.”
너무 귀엽잖아. 리즈벨은 결국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비딱하고 제멋대로이기만 하던 남자에게 저런 어린 시절이 있었다니. 실컷 놀려 주기 좋은 건수가 아닌가. 여기로 온 건 정말 잘 한 선택이었어.
리즈벨은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도도도 달려 나가 제 방 문고리를 잡는 아시어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슬쩍 그녀를 돌아보는가 싶더니,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빈 복도에 따스한 공기가 가득했다. 리즈벨은 잠시 소년의 방문을 바라보다, 천천히 물러나 문을 닫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땠어?”
침대에 금빛 요정이 앉아 있었다. 요정의 등에 달린 얇은 피막이 꼭 날개처럼 퍼덕였다. 리즈벨이 직접 시간 선을 잘라 낸 이후, 요정은 더 크고 정교한 소녀의 형태를 띠었다.
여전히 인간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려웠지만, 권능을 다루는 것은 이전보다 수월해졌다. 이제는 그녀의 곁을 조금 떠나 있어도 형체가 무너지지 않는다. 수도 에엘을 돌며 이 시간대에 대한 정보를 모아 오라는 명령 정도는 거뜬하게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시기는 아니야.]“그래?”
뤼켄가의 참극이 있었던 대륙력 5122년은 그 어떤 고서에도 정확히 실리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뤼켄이라는 가문에 대한 모든 것들도 불타 없어졌다. 왜 당시의 뤼켄이 새로운 악마를 소환해야만 했는가. 당시의 시류가 어땠기에.
리즈벨은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권능을 저택 밖으로 내보냈었다.
[넉 달 전에 에엘에서 집단 처형이 있었나 보더라.]“집단 처형?”
[그래. 색출된 이단자들, 그리고 악마 소환술사들. 그들의 일가족까지 도합 1,500여 명이 에엘의 중앙 광장에 효시되었대.]1,500명. 대규모였다. 역시 뭐가 있기는 있었구나. 그러나 이어진 요정의 말에 비하면 그것은 약과였다.
[처형을 집행한 건 성녀야.]“누구라고?”
[이 시대의 성녀. 아그네스 라그놀라.]뤼켄가의 악마 소환에 휘말려 사망한 성녀. 헬라르의 마리오네트. 그제야 리즈벨은 사태의 심각성이 명확히 인지했다.
“헬라르가 직접 나섰구나.”
지금까지 방관하던 헬라르가 그녀의 땅에 둥지를 튼 이계의 것들을 도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권능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리즈벨의 눈앞에 얇은 금빛 장막이 차르륵 떨어졌다. 장막 너머로 요정이 담아 온 장면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어느 성벽에 수십 개의 머리가 효시된 장면이었다. 까마귀들에게 눈알과 살점이 파 먹힌 머리들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도 없이 훼손되어 있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수백여 명의 무리와 대치하고 있는 성기사들의 군대가 보였다. 성기사들은 하나같이 눈을 가리고 있었다.
리즈벨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직접 전면에 나서다니. 수천 년 동안 지켜보기만 했으면서, 왜 인제 와서?”
[위기감을 느낀 거지. 이단자들을 아무리 색출해도 그 기세가 줄어들지 않는 것에. 그리고 그들이 마법사들과 손을 잡는 것에.]“손을 잡는다고.”
[라타에 황실이 끊임없이 이단자들을 잡아들이는데도 그들이 멸족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뒤를 봐 주는 세력이 있었다는 거지.]그게 뤼켄이구나. 리즈벨은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을 더듬었다.
“하지만 공녀가 아스테르반을 찾아가려 했던 걸 보면 주술의 힘을 손에 넣지는 못한 것 같던데. 그들이 겨울들과 손을 잡았다기엔…….”
[이 땅의 이단자들은 주술사들뿐만이 아니야, 리즈벨.]요정이 리즈벨의 말을 지적했다.
[헬라르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 토속 신앙을 신봉하는 이들. 여신의 축복을 거부하고 세례를 받지 않는 이들. 헬라르는 그들을 전부 이단으로 간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