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38
139화
리즈벨은 기가 막혀 물었다.
“아무런 죄가 없어도 처형한단 말이야?”
[반항은 곧 죽음. 이단은 곧 파멸. 비단 이단자들뿐일까? 그녀의 존재를 의심하는 무수히 많은 영웅이 역사에 단 한 줄 이름을 남기지도 못하고 죽어 갔어.]리즈벨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요정이 천천히 말을 맺었다.
[이 세계는 그 모든 불만이 한계치까지 차올라 있는 세계야.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마치 시한폭탄 같은.]“……그렇구나.”
리즈벨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헬라르가 성녀를 통해 지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던 이 시간 선은 리즈벨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잔혹했다.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불안정한 시기일 줄은 몰랐다. 리즈벨은 이리저리 생각의 퍼즐을 맞춰 보았다.
“그럼 뤼켄이 악마 소환에 실패한 것도 헬라르가 방해했기 때문인 게 분명해. 그렇지?”
이 시대의 헬라르는 성녀의 몸을 입고 지상에 그녀의 권능을 완전히 풀어 놓을 수 있다. 아무리 뤼켄이라 한들 세계의 흐름을 지배하는 성력이 전력으로 부딪혀 왔다면 막을 수는 없었을 터.
“일단은 뤼켄을 이 일에서 발 빼도록 하는 게 우선인데…….”
과연 가주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그녀는 아직 뤼켄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하다시피 했다.
애초에 뤼켄이 왜 전면에서 헬라르를 상대해 온 건가. 라타에 황실은 헬라르와 성녀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데, 라타에에 귀속된 뤼켄은 왜, 언제부터? 그걸 알아야 가주를 설득할 수 있는데.
그러나 리즈벨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다음 날 아침, 뤼켄 남매가 손을 잡고 그녀의 방 문을 똑똑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 * *
“좋은 아침이에요, 리즈벨!”
이튿날, 아시어스는 약속대로 그녀를 찾아왔다.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리즈벨의 코앞에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잘 잤어요?”
엘제니아였다. 리즈벨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잘 잤어요…….”
“누나가 저택 안내를 같이 해 주고 싶다고 했어요.”
옆에서 소년이 거들었다. 생김새가 똑 닮은 남매가 그녀의 눈앞에서 똑같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다. 생경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자, 그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상황에 리즈벨이 당황한 사이, 엘제니아가 재빨리 그녀의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유쾌하게 외쳤다.
“시작해 볼까요, 뤼켄 저택 탐방!”
* * *
뤼켄 저택은 에엘에서 황성 다음으로 화려하고 규모가 컸다. 엘제니아는 동생과 리즈벨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온 저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또래 여자 친구가 생기니 좋네. 뤼켄의 제자들은 사내놈들이 대부분이라 지겹던 참이거든요.”
아시어스는 웃음이 떠날 줄 모르는 누이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엘제니아가 이렇게 신나 하는 건 오랜만에 본다. 리즈벨은 엄청나게 어색한 모양이었다.
“제게……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것 같아요.”
“가만 보면 은근히 팍팍한 삶을 산 것 같다니까. 손님에게 친절한 게 뭐가 어때서요.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푸른 눈이 엘제니아를 스쳤다가, 아시어스에게 닿았다. 그리고 잠시 파르르 떨리나 싶더니 이내 얇은 눈꺼풀이 내리깔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양새였다. 타인의 호의에 익숙하지 않은 게 어린 소년의 눈에도 보였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어 본 적이 많지 않아요.”
리즈벨은 가늘어지는 두 명분의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실수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게 불쾌함을 드릴 수도 있을 거고요.”
“흐음.”
엘제니아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보면 볼수록 희한한 아이다. 새로운 관계를 맺는 데에 어색한 티를 풀풀 내면서도, 막상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그냥 서툰 건가.
엘제니아는 슬쩍 물음을 던졌다.
“리즈벨은 왜 이곳으로 왔어요?”
“아, 그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에 뤼켄이 휘말리지 않았으면 해서요.”
“왜요?”
“위험하니까요.”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일면식도 없는 우리를 지켜 주려고 할까?”
리즈벨은 하릴없이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뤼켄은 실패할 테니까. 과거와 똑같이 흘러가서는 안 되니까. 아시어스가 다시 아프면 안 되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엘제니아는 그런 그녀를 꼼꼼히 살폈다. 이 아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진심이라는 건 알겠다. 단지 믿고 싶을 뿐인지도 모르겠으나, 엘제니아는 오랜만에 자신의 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일단 리즈벨. 하나 말해 두자면.”
“네.”
“그렇게 말해서는 절대 우리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해요.”
“네?”
리즈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엘제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아버지, 물론 어머니께는 한없이 무르시지만, 기본적으로는 굉장히 엄하신 분이라 신념이 무척 확고하시거든요.”
“아, 그럼…….”
“그리고 리즈벨이 생각보다 우리에 대해서 많이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인데, 이렇게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해 주는 편이 낫겠어요.”
“네?”
“내가 지금부터 보여 주는 것들을 보고 난 뒤에도 생각이 같다면 나도 더 이상 말리지 않을게요.”
리즈벨이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엘제니아의 마력이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리즈벨은 다음 순간 나타난 저택 복도의 변화에 눈을 크게 떴다.
복도에 난 수많은 문이 움직이고 있었다. 위로, 아래로, 대각선으로. 얼기설기 엮인 푸른 마력이 사라질 즈음 복도의 벽은 종전과는 전혀 다른 문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뤼켄은 어떠한 가문인가.”
엘제가 흥얼거리듯 말하며 손을 우아하게 휘저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방 안쪽 벽에는 누군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검은 곱슬머리에 옅은 회색빛 눈을 가진 남자의 흉상이었다.
“고대에 이 땅에 존재하던 모든 초현실적 힘을 정제해 ‘마력’이라는 힘으로 구체화한 최초의 마법사, 레오델의 먼 후손.”
휙. 맞은편 방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세 가지 색의 마력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얽혀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력의 파장을 구분하여 세 가지 색으로 나누는 데 성공한 대마법사 아이델타의 직계 혈족들이며.”
엘제니아의 걸음이 떨어졌다. 리즈벨은 다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대륙력 4020년. 라타에의 건국을 도와 제국의 공작 위를 하사받은 개국 공신 가문이자 천년 가문.”
엘제니아가 지나가는 곳마다 방문이 활짝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방문 안에는 뤼켄이 이룩해 낸 수많은 업적과 공로들로 채워져 있었다.
“대륙에서 마법으로는 감히 대적할 가문이 없으며, 뤼켄의 가주는 대륙에 현존하는 가장 강한 마법사임에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
마지막으로 열린 문 안쪽에 있는 것을 리즈벨은 분명히 보았다. 거대한 건축물의 설계도였다. 마탑이다.
리즈벨은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문들은 뤼켄의 과거를, 이 앞에 있는 문들은 뤼켄이 앞으로 이뤄 나가야 할 사명들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명실상부 대륙 마법의 역사를 견인하는 마법 가문. 또한.”
엘제니아가 우아하게 돌아섰다. 그들은 어느새 긴 복도 끝까지 다다라 있었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제4의 마력. 즉 마계의 존재들을 소환하는 데 성공한 가문.”
엘제니아의 눈매가 앙큼하게 휘어 올라갔다.
“즉, 뤼켄은 이 세계의 독재자에게 유일하게 반기를 들 능력을 갖춘 마법사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등진 복도 끝의 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안쪽은 온통 암흑이었다. 엘제니아가 손짓했다.
“따라와요.”
리즈벨은 망설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엘제니아가 보여 주려 하는 것은 그녀가 이 시간 선으로 와서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목표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엘제니아가 문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암흑이 그녀를 빨아들이듯 집어삼켰다.
“헬라르. 잔인하기 그지없는 이 땅의 지배자. 축복이라는 이름의 지배. 자애와 풍요라는 이름의 독점.”
문 안쪽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단순한 암경이 아니라 검은 마력이었다. 엘제니아가 딛는 곳이 은빛 징검다리가 되어 리즈벨을 인도했다.
“역대 성녀들은 마법사들을 적대시했죠. 헬라르는 대륙에서 자신보다 큰 영향력을 갖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거든. 하여 반항은 곧 죽음. 이단은 곧 파멸.”
“반항은 곧 죽음…….”
“하여 뤼켄이 찾은 것은 헬라르의 영역 밖에 있는 이계의 힘이죠. 악마들의 세상, 마계.”
암흑 사이로 시뻘건 운석들이 쏟아져 내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마계의 전경이었다. 열기가 살갗을 태울 듯했으나 깎아지른 검은 절벽과 쏟아지는 운석 비가 가히 장관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환영이었다. 불구덩이 속을 걸으며, 엘제니아가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마계와의 연결점을 연구하기를 수백 년, 마침내 우리 아버지의 증조할아버님께서…… 맞나, 아시어스?”
“고조할아버님이야.”
“아, 그래.”
엘제니아가 생글생글 웃었다.
“그분께서 마계의 악마를 소환하는 데 성공하셨죠. 본질의 이름으로. 대가는 영혼으로 하여.”
리즈벨은 홀린 듯 엘제니아의 설명을 들었다.
“그렇다면 뤼켄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냐…….”
엘제니아가 그녀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그녀의 잿빛 눈이 단단한 빛을 띠고 리즈벨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독재자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가문의 존속.”
깨달음이 왔다. 어쩔 수 없이 헬라르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거구나.
뤼켄과 헬라르 간의 앙금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진, 지배하려는 자와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자 간의 대립이었다. 리즈벨은 뤼켄을 이 일에서 빼려는 계획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엘제니아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더 필요해요. 우리는 라제를 얻었지만, 악마가 헬라르의 영역에 발을 딛는 순간 그들의 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약해지니까.”
“라제를 이미 얻었다고요?”
리즈벨은 급히 그녀의 말을 잘랐다. 엘제니아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뤼켄의 악마, 라이제스. 대륙에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공공연하게 퍼진 사실이죠.”
“그렇다면…….”
뤼켄이 소환을 시도하였다가 성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악마는 라제가 아니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