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42
143화
다행스럽게도, 늦지 않게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 안 죽었어.”
리즈벨은 옛 습관처럼 속내를 가리는 불투명한 유리 가면을 뒤집어쓰고 웃었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아시어스.”
“……그냥. 아까 리즈벨이 어머니께 했던 말이 그런 뜻인 것 같아서요.”
“내가 말을 잘못 했나 봐.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리즈벨이 확언하자 잿빛 눈에 조금 안도감이 들어섰다.
소년이 오늘 꾼 꿈은 기괴했다. 몸도 영혼도 조각조각 나 산산이 부서지는 꿈이었다. 그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죽음. 죽음이다.
그 꿈은 꼭 예지 같기도 했고, 과거의 편린 같기도 했다. 게다가 자꾸 들려오는 환청과 눈앞에 덧그려지는 환영까지. 아이는 그것들을 떨쳐 내기 위해 여자에게로 바짝 붙어 섰다.
“괜찮아, 아시어스.”
그녀의 한마디로 순식간에 모든 것이 정말 괜찮아졌다.
“저는…… 괜찮아요. 그냥, 리즈벨의 표정이 어쩐지 슬퍼 보여서.”
아래로 늘어뜨려진 가는 검지를 살짝 쥐자 리즈벨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위로해 주는 거야?”
“으응.”
“그러면 좀 슬픈 척 더 할 걸 그랬다. 위로 더 받게.”
리즈벨이 그의 손을 다시 제대로 잡아 주었다. 전해 오는 온기에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버리고 가다니, 나쁜 사람이에요. 리즈벨은 아니라고 했지만.”
조금 투덜댈 여유도 생겼다.
“내가 더 예쁘니까 이제 나랑 놀아요.”
“그래, 그래. 일단 아시어스. 너 지금 눈 밑이 까매. 저녁 식사 전에 조금이라도 자는 게 어때?”
“으응…….”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저녁도 먹고, 가주님과 회포도 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이는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시어스는 그날 저녁 식사를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
* * *
그날 저녁, 듀엔의 귀환을 맞는 저녁 만찬이 준비되었다.
공작가의 주방장이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했는지, 커다란 테이블 위에 커다란 접시들이 틈 없이 빽빽하게 놓였다. 화려한 샹들리에에 엘제니아의 마법이 더해지며 다이아몬드 수백 개에 맞먹는 광채를 내뿜었다.
공작 내외는 리즈벨과 엘제니아, 그리고 아시어스가 도착하고 난 뒤 모습을 드러냈다. 리즈벨은 그제야 가주 듀엔을 제대로 마주했다.
그는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에 굉장히 굵고 단단한 선을 가진 사내였다. 마법사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검사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체격도 좋았다.
“어젯밤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인사를 못 나누었지요.”
아시어스는 전반적으로 생김새는 어머니 쪽을 더 닮은 듯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닮은 점도 있었다. 서느렇게 뻗은 눈매와 우아한 존대가 그랬다.
“뤼켄의 가주, 듀엔 뤼켄입니다.”
“……리즈벨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가 뤼켄의 가주이며 라타에의 공작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정중한 존대였다. 잿빛 눈은 차갑고 무뚝뚝하기는 했지만, 말투나 태도는 깍듯했다.
이렇게 상냥하게 먼저 인사해 줄 줄은 예상치 못했던 터라, 리즈벨은 다소 생경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퍼뜩 오전의 기묘한 만남이 떠올라 눈을 내리깔았다.
“오전에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혹 기분이 상하셨다면…….”
“아…… 닙니다. 무례했던 것은 이쪽이지요.”
유레인이 마침 뒤에서 듀엔의 등허리를 꼬집는 바람에 그의 발음은 살짝 뭉개져서 나왔다.
“독대를 청하셨다지요. 식사한 뒤 아내와 가볍게 와인을 들 생각인데, 함께 하시겠습니까?”
아, 내 이야기를 들어 줄 마음이 있구나. 푸른 눈에 안도의 빛이 깃들었다.
소년은 그 모습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리즈벨의 조언대로 서너 시간 잠을 자고 왔는데도 여전히 상태는 좋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다.
지끈지끈. 쑤셔 오는 쪽이 머리인지, 아니면 심장 언저리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소년을 제외한 모두의 식사 시간은 평화롭게 흘렀다. 주로 엘제니아가 분위기를 주도했고, 유레인이 딸의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남편의 대답을 끌어내는 쪽이었다. 평온하지 못한 건 아시어스 하나였다.
삐끗.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혀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순간적으로 테이블 위에 정적이 감돌았다.
“아시어스, 괜찮니?”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소년은 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리깐 눈을 들 수가 없었다. 눈을 들면 환영이 보인다.
“모순덩어리.”
그를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너의 모든 걸 가졌다고, 그렇게 말했으면서.”
꿈속에서 여자는 울고 있었다.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듯했다. 반짝이는 금빛이 그의 어깨와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시야에서 반짝거렸다.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미안하다고…… 했었나…….
결국 아이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의자가 거칠게 대리석 바닥을 긁었다.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시선이 전부 아이에게 쏠렸다.
“저 먼저 일어나 볼게요.”
“어디 아픈 거니, 아시어스?”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해서요.”
내뱉는 어투가 절로 날카로워졌다. 듀엔이 다정하게 아들을 얼렀다.
“그래, 가서 쉬어라. 몸이 많이 안 좋으면 주치의를 부르고.”
“네, 아버지.”
소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시야를 덮은 금빛에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기억의 파편이 겨울 서리 앞에 놓인 연약한 잎새처럼 불안정하게 떨렸다.
“으…….”
식당을 나서자마자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소년은 어쩔 수 없이 마력을 엮었다. 푸른 이동진이 발동한 다음 순간, 그는 그의 침실로 돌아와 있었다.
‘머리 아파.’
아이는 비척비척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가며 몽롱하게 생각했다. 창밖에서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작게 그 존재를 불렀다.
“라제.”
기다렸다는 듯 창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어둠 자체를 짐승으로 형상화한 듯한 악마가 창문을 넘었다.
[꼬마. 괜찮아?]“……아니.”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라제가 그의 목과 어깨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비볐다. 그러나 라제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두통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라제…… 윽.”
[생각보다 상태가 좀 안 좋은데…….]라제는 혀를 차며 마력을 소년의 몸 안으로 흘려 넣었다. 기억의 파편이 녹아 있는 자신의 마력을 좀 흘려 넣어 주면 무언가라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다.
“흐…….”
라제의 목을 끌어안은 소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눈앞을 채운 환영과 현실 중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내기는 내가 이겼어, 아시어스.]골을 후벼 파는 음성이 있었다. 불쑥 이는 것은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살심이었다. 수십 수백 개로 쪼개진 기억의 파편 중 하나가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아시어스-!]적을 코앞에서 놓친 여신의 분기찬 울부짖음을 마지막으로, 소년의 의식이 뚝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창밖의 어두운 하늘에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크고 둥근 보름달이었다. 은은한 달빛이 창틀 위를 온통 은빛으로 물들였다.
“…….”
호흡은 안정적이었다. 그 곁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라제가 그가 깨어난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예상 못 했다.]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바스락. 이불이 짓눌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두 발이 바닥을 디뎠다. 한 발짝. 두 발짝. 침대 맞은편에는 크고 길쭉한 거울이 걸려 있었다. 그가 늘 옷매무새를 다듬었던 곳이었다.
잠시 멈추었던 걸음이 다시 떨어졌다. 그는 달빛이 내려앉은 방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거울이 바로 눈앞이었다.
“…….”
뻗어 나간 손이 거울 테를 움켜잡았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 파르라니 핏줄이 돋았다. 손등에 새겨진 깊은 흉터 자국이 달빛에 하얗게 빛났다. 끄트머리가 소매 안쪽까지 이어질 만큼 깊은 흉터였다.
너른 어깨가 파르르 경련했다. 푹 숙인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 연신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지독한 두통에 시야가 흐렸다. 골을 쪼개고 뇌를 제멋대로 휘젓는다. 코끝에 스치는 것은 비릿한 피비린내였다가, 어느 순간 그리운 이의 체향으로 바뀌었다.
“흐…….”
짐승 같은 울음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곧바로 마른기침을 두어 번 뱉어 냈다. 쿨럭.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바로 앞에 놓인 거울 속의 이와 눈이 마주쳤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벌겋게 핏발이 선 눈. 엉망으로 짓씹힌 입술. 마른침을 삼키는 듯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 창백한 양 뺨.
“…….”
거울에 비친 눈은 죽은 잿더미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라제가 그에게 다가왔다. 사자의 입매가 서서히 뜻 모를 호선을 그렸다. 기이하게 들끓는 듯한 목소리로, 라제는 파편만 남아 다시 지상을 디딘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아시어스.]“…….”
땅거미가 지고 요사스러운 달빛이 지상을 내리비추던 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파편이 발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