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43
144화
Chapter 13. 파편
저녁 식사 직후, 리즈벨은 저택의 3층 중앙에 있는 가주의 서재에 와 있었다. 널찍한 서재 한쪽에서 벽난로가 타올랐다. 방 안은 별다른 조명 없이 은은한 난로 빛에 잠겨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푸른 눈이 벽난로 위에 올려진 자그마한 수공예품과 창문 걸쇠에 걸린 자그마한 종 모양 장식을 차례로 스쳤다. 가주의 취향이 아닌 게 확실했다. 곳곳에 공작부인의 손길이 가득 묻어 있었다.
“와인 혹은 브랜디. 어느 쪽이 좋습니까?”
“와인으로 하겠습니다.”
“취향이 같군요. 독한 술은 즐기지 않아서.”
듀엔이 손수 와인을 잔에 따랐다.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유리잔에 담긴 술이 꼭 피처럼 붉었다.
“들지요.”
잔이 부딪치며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났다. 와인의 첫 모금은 썼지만, 뒷맛이 달짝지근했다. 듀엔은 맞은편에 앉은 여인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에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는 그의 은신 마법을 단번에 간파해 낸 예리한 감각. 군더더기 없는 예법, 그리고 그만한 거물을 대면하고도 주눅 들지 않는 몸가짐. 고요히 내리깔고 있으나 결코 아랫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푸른 눈.
절대 평민은 아니겠고, 귀족. 혹은 일국의 왕족쯤 되려나.
듀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리를 만들었으니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여자가 눈을 들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이미 오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예정하고 계신 악마 소환을 중지해 주시는 것.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있어 제게 협조해 주실 것.”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 하면, 헬라르의 봉인을 뜻합니까?”
“네.”
듀엔의 후한 평가와는 달리, 리즈벨은 떨리는 마음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와인으로 타는 목을 축였다.
오전에 가주가 응접실에 함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필요 이상의 말을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거짓으로 그녀의 정체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대륙에서 첫손에 꼽히는 강자에게 협조를 요청할 때 조금의 거짓도 있어서는 안 됐다.
리즈벨은 잔을 놓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발디마르 왕가의 인장이었다. 검과 왕관이 교차한 문양이 난로의 불빛 아래 드러났다. 리즈벨은 그것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발디마르의 왕녀입니다.”
듀엔의 잿빛 눈이 잠시 커졌다. 리즈벨은 옅게 웃었다.
“그리고 짐작하고 계시다시피, 이 시간 선의 인간이 아닙니다.”
“증명해 보이셔야 할 겁니다, 왕녀.”
날카롭게 따라붙은 답에 가는 손이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사르륵. 금빛 빛 무리가 허공으로 흩뿌려지듯이 퍼지다가 이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서서히 금빛 요정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등에 거대한 낫을 멘 자그마한 어린아이가 리즈벨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기대었다.
“그건…….”
리즈벨의 권능이 형상화되어 나타나자 그녀의 몸에 은은하게 덧씌워져 있던 성력이 일순 폭발하듯 뛰쳐 나왔다.
듀엔이 짧은 침음성을 내었다. 분명 헬라르의 성력과는 달랐다. 얼핏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온기가 면전으로 훅 끼쳐 들었다. 꽃 내음 같기도 하고, 풀잎의 향 같기도 한 오묘한 향 사이로 듀엔에게 익숙한 마력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이런 향을 가진 자는 대륙에 몇 없었다. 마력의 삼색, 그리고 악마의 힘을 다루는 자들에게 배어 있는 특유의 향이 아닌가.
“가장 명확한 증명이라 하면 역시 시간의 타래를 끊어 시간을 되감는 것뿐인데, 그리하여 과거로 도로 돌아간다 한들 아무 소용 없겠죠. 하여 직접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직접 보여 주시고자 한다면.”
“일전에 공녀께서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가주께서는 공녀께서 보신 것보다 더 정확히 저를 파악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리즈벨이 손을 내밀었다. 듀엔은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 손에 제 손을 얹었다. 듀엔의 마력이 여자의 손을 타고 느리게 흘러들었다. 이미 누군가의 마력이 한 차례 휘감았던 흔적을 타고 영혼 깊숙이 침투했다.
혼에 손상되었다가 아문 흔적이 역력했다. 영혼끼리의 결속. 종속의 마법임이 틀림없었다. 성력에 덮여 있던 마력의 향이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했다.
리즈벨이 조용히 묻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많은가요?”
“……과연.”
마법이 해제되고 나서도 이 정도의 흔적을 남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종속의 마법은 그조차 섣불리 시도할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아마도 그 마법사는…….
리즈벨의 목소리가 그의 생각의 고리를 자르고 고요히 떨어졌다.
“제 이름은 리즈벨 발디마르.”
“…….”
“대륙력 5234년을 기준으로 발디마르에 남은 마지막 두 명의 왕족 중 한 명이며, 113년 만에 나타난 헬라르의 성녀이고.”
리즈벨은 담담히 말을 맺었다.
“뤼켄의 참극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법사이자 라타에 마탑의 유일무이한 주인과 종속의 계약을 맺었던 여자입니다.”
“마탑…….”
마법사들의 탑. 마탑은 뤼켄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준비해 온 가장 큰 사명 중 하나였다. 대륙의 그 어느 군주에게도, 여신 헬라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마법사들만의 탑.
“왕녀께서 온 시간대에서는…… 마탑의 건립이 성공했습니까?”
시종일관 무뚝뚝하던 듀엔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마탑의 유일무이한 주인이라면. 아니, 그 이전에. 뤼켄의 참극에서 살아남은 마법사라면…….”
만일 뤼켄에게 최후의 날이 닥친다면 살아남을 이는 누구인가. 아직 어린 막내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듀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애가 살아남았습니까?”
“살아남았다면 제가 이곳으로 오지 않았겠지요.”
푸른 눈이 깊이를 모르고 침잠했다.
“그러나 시간은 되감겼고, 그 일은 이 시간대에서는 혹시 일어날 수도 있는 유력한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리즈벨의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희한하게도 그 웃음에 사납게 들썩이던 감정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저는 이 시간을 바꾸려 이곳까지 왔고, 제가 알고 있는 미래대로 흘러가게 둘 생각이 없습니다, 가주님.”
“……그러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무엇을 피해야 할지도 알 수 있겠군요. 그래서 악마 소환을 막으려는 겁니까?”
“악마 소환은 실패합니다. 헬라르가 소환식을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요.”
리즈벨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속으로 몇 가지를 계산해 보았다. 가장 유력한 가정은 이랬다.
“이미 소환식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갔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곧, 뤼켄 내부에 헬라르, 혹은 성녀의 첩자가 숨어들었다는 뜻.”
첩자. 듀엔이 의구심을 품고 있던 지점과 정확히 일치했다. 바리엔의 성기사들이 갑자기 남부로 내려간 데는 필시 이유가 있었을 터. 누군가 악마 소환에 대한 정보를 성녀에게 의도적으로 흘렸다면?
“그러니 가주께서 급선무로 두셔야 할 것은 뤼켄 내에 숨어든 첩자를 색출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왕녀께서는 무얼 하실 생각입니까?”
“저는…….”
리즈벨은 말을 흐렸다.
“제가 나타난 시점부터 헬라르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을 거예요.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신탁이 내려오지 않을까 합니다. 저를 찾아 바리엔으로 데려오라는 신탁이요.”
“그럼 당분간은 숨어 있어야…….”
“그 신탁이 내려오기 전에, 제가 먼저 바리엔으로 가고자 합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듀엔은 다소 아연한 기분으로 리즈벨을 보았다. 제 발로 바리엔으로 가겠다고?
리즈벨이 단호히 쐐기를 박았다.
“저는 이곳에 도망치러 온 것이 아니에요, 가주님.”
“가면 죽을 확률이 높을 텐데.”
“세상에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아주 많이 있으니까요.”
그녀 인생을 통틀어 몇 안 되는 진리였다. 목숨이 아까웠다면 애초에 이런 선택을 하지도 않았으리라. 리즈벨의 눈에 결의가 반짝이고 있었다.
“누구보다 가주께서 가장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닐까요?”
“……부정할 수 없군요.”
듀엔이 마침내 탄식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단번에 남은 와인을 목 뒤로 삼킨 그가 리즈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즈벨의 낯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기꺼이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 * *
“성공한 거겠지. 그렇지?”
[잘 말해 놓고 왜 그래.]다시 손가락만 한 크기로 줄어든 요정이 리즈벨의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리즈벨은 막 가주의 서재를 나온 참이었다. 빈 복도에는 따스한 밤공기가 가득했다.
“후…….”
듀엔과 독대하는 것은 아무리 리즈벨이라 해도 긴장의 연속이었다. 듀엔의 마력은 아시어스의 것과는 달랐다. 아시어스의 마력은 언제고 그녀에게 닿을라치면 뭉뚝하게 누그러졌지만, 듀엔의 마력은 그렇지 않아서.
하지만 정체를 밝힌 것에 후회는 없다. 듀엔이 그가 몇 년 동안 준비해 온 악마 소환식을 미루도록 하려면 그만큼의 이유가 있어야 했으니까. 리즈벨은 다소 우울하게 생각했다.
‘충격받으신 거였을까…….’
따지고 보면 아버지에게 아들의 죽음을 예고한 셈이 아닌가. 유레인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게 다행일 수도 있겠다. 하긴, 부인께서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겠지만…….
막 거기까지 생각하며 그녀의 침실로 가는 마지막 코너를 돌던 순간이었다. 리즈벨의 걸음이 멈칫, 멈추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멈춰 선 곳은 커다란 창가 앞이었다.
창은 상앗빛 커튼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리즈벨은 충동에 몸을 맡겼다. 커튼 끝자락을 잡고 단숨에 걷었다. 새카만 밤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유독 크게 떠 있던 은빛 달.
그날도…… 꼭 저런 달이 떴다. 폭우가 멈춘 뒤 거짓말처럼 구름이 물러간 하늘에 그 어느 때보다 요요히 빛나던 달이. 리즈벨은 홀린 듯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날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아시어스가 그녀의 기억을 없애고 재워 버린 것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시어스가 최후를 직접 눈에 전부 담았다면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오후에 아시어스의 갑작스러운 물음을 받고 요동쳤던 감정이 다시금 목을 치고 올라왔다. 리즈벨은 결국 걸음을 돌렸다.
그 애를 봐야겠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아이.
그러나 막 코너를 돌던 순간, 이곳에는 있을 리 없는 기운이 감각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