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44
145화
“……!”
이 기운. 이 기시감.
리즈벨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그녀는 다급히 복도의 양 끝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밤 깊은 저택은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등골을 타고 전율이 올라왔다.
몰라볼 리가 없다. 수도 없이 입을 맞추고, 그보다 많이 숨을 얽고 몸을 겹쳐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남자의 존재감인데! 리즈벨은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달싹였다.
“아시…… 어스.”
덜컹. 느슨하게 채워져 있던 창문의 걸쇠가 풀리며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물이 타고 흐른 볼이 얼어붙을 듯 차게 굳었다.
“아시어스.”
오른쪽 복도 끝에서 무언가가 스슥 움직이는 기척이 잡혔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리즈벨은 달리기 시작했다. 금빛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달빛으로 물든 복도에 금빛 궤적을 그렸다.
가깝다. 바로 지척이었다. 막 리즈벨이 복도 끝에 다다라 코너를 돈 순간이었다.
[아, 깜짝이야.]투덜거리는 음성이 귀를 때렸다. 리즈벨은 앞을 막은 무언가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라…… 제?”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커다란 흑사자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이제 나오냐. 듀엔이랑 이야기는 잘 끝냈어?]리즈벨은 멍하니 라제를 바라보았다. 착각이었나? 무의식 깊이 잠들어 있던 그리움이 달빛에 홀리기라도 한 듯 현실로 튀어나온 것인가? 그걸 착각했다고?
“잘 끝냈어. 그런데 라제.”
리즈벨은 잠깐 사이에 잠겨 버린 목으로 물었다.
“라제. 너 여기서, 혹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코너 뒤에 등을 기대고 선 남자에게로 흘러들었다.
“혹시, 아시어스 못 봤어?”
[걔야 제 방에 있겠지.]남자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그는 지금 제가 왜 여기에 서 있는지도, 왜 숨어서 저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기억은 조각난 채로 꼬이고 본능과 뒤섞였다.
발현하기 시작한 파편이 혼란스럽게 떨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참기 위해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이는 것이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 말이 그 뜻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지금 이 기운. 그러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바로 여기…….”
여자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실렸다.
“여기, 아시어스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남자의 핏발 선 눈에 투명한 액체가 가득 고였다. 지금 그를 움직이는 기억의 조각은 딱 하나였다.
“당신의 모든 걸 다 알고 싶지만,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해요. 알면 내가 아플 것 같아.”
저 여자를 보게 되면 아플 거야.
코너 뒤로 비쭉 튀어나온 라제의 꼬리가 미세하게 탁탁 흔들렸다. 남자의 발치에 흥건했던 검은 마력이 다시 흑사자에게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잠깐만. 비켜 봐, 라제. 확인할 게 있어.”
[……!]리즈벨은 고집스럽게 라제를 뿌리쳤다. 착각일 리가 없다. 이 기운. 이 향. 이 존재감. 그녀의 영혼에 몇 달간이나 깊숙이 각인된 것과 같았다.
[쯧……!]라제가 혀를 차며 재빨리 몸을 일으켜 리즈벨의 뒤를 따랐다. 지금 그놈이 이 앨 만나면 버티지 못할 텐데! 라제는 리즈벨의 드레스 자락을 물어 멈춰 세우려고 했지만 그녀가 더 빨랐다.
리즈벨은 단숨에 라제를 지나쳐 코너 벽을 짚었다. 그리고 코너를 돌았다.
“…….”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리즈벨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커튼이 내려져 있는 복도를 한달음에 지나 아시어스의 방 문 앞에 섰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덜덜 떨리는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며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리즈벨은 더듬더듬 목소리를 꺼냈다.
“너…… 너 거기 있어……?”
문고리를 잡은 손 위로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혹시. 어쩌면. 만에 하나. 희망을 품게 하는 그 모든 말들이 기어이 둑을 터뜨렸다.
“아시어스.”
혹시 이 안에 없으면 어떡하지. 그 존재감이 전부 허상이었으면 어떡하지. 리즈벨은 아무 말이나 띄엄띄엄 뇌까렸다.
“보고 싶지 않다는 거 거짓말이었어.”
그 말은 고스란히 문 반대편에 기대선 남자에게 닿았다.
“안아 줘.”
“…….”
“제발, 얼굴 한 번만…….”
물기가 가득 어린 목소리였다. 잿빛 눈에 혼란이 가득 들어찼다. 여전히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이 스르륵 떨어졌다. 아시어스는 손등 위에 선명히 그어진 흉터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기억의 파편이 낯선 대화들을, 낯선 장면들을 토해 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내 생각이 궁금하면 읽으면 되잖아.”
“읽고 싶지만. 당신의 모든 걸 다 알고 싶지만.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해요. 알면 내가 아파질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해?”
“네.”
기억 속 시야에는 온통 금빛이 가득했다. 보드라운 체취를 흠뻑 들이켜고, 살갗을 지분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가는 몸을 품에 가득 끌어안는다.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을 때의 그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에게 얌전히 안겨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잘 길이 든 짐승처럼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게 무슨 기억이지.
덜컥.
“……!”
문고리가 돌아갔다. 아시어스는 정말로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발치로 라제의 검은 마력이 왈칵 쏟아졌다. 파편을 발현시켰던 마력이 도로 빠져나간다. 손목과 옷 아래 상체에 가득하던 흉터가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불쑥 뇌리를 치고 올라오려던 기억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끼익. 문이 작은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헉.”
작은 숨이 터졌다. 소년은 번쩍 눈을 떴다. 시야가 까맣게, 하얗게 점멸했다.
“……아시어스?”
리즈벨이 그를 불렀다. 소년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을 한 여자가 있었다. 소년은 제 얼굴도 그녀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리…….”
“왜, 울어.”
리즈벨이 다가왔다. 온기 도는 손이 아이의 흠뻑 젖은 얼굴을 닦아 냈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상해. 이상한…….”
“무슨 일…… 있었어……?”
리즈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소년은 숨을 몰아쉬며 기억을 더듬었다. 시야에 차는 금빛 머리카락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이제는 꿈이라고 도저히 치부할 수 없는, 누군가의 또렷한 기억이었다.
* * *
듀엔과의 독대가 무사히 끝난 이후,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듀엔은 뤼켄의 이름 아래 진행되고 있던 모든 사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티스베 소환 또한 무기한 연기되었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던 뤼켄의 방계들이 속속들이 저택으로 올라왔다. 정보가 새어 나간 구멍을 찾기 위해 철저한 검열이 이루어졌다.
리즈벨의 떠날 채비 역시 빠르게 이루어졌다.
“바리엔의 봄 제의는 일주일 뒤부터 시작입니다. 1년에 딱 한 번, 바리엔이 외지인을 받아들이는 날이지요. 잠입할 기회는 그때뿐입니다.”
이 시대의 바리엔은 옛 위명만 남은 낡은 성전이 아니라 헬라르의 성력으로 가득 차 있는 그녀의 소왕국이다. 헬라르의 신관이 아닌 이들은 받지 않는다.
“봄 제의 기간에는 검문이 엄격해질 겁니다. 바리엔뿐 아니라 바리엔 주위의 모든 소도시에 불심 검문이 행해지지요. 마법사, 혹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단자들을 색출해 내는 작업입니다. 들키지 않고 잠입하는 게 과연 가능할지…….”
“방법은 있을 거예요.”
리즈벨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매번 제의 때마다 이단자들이 난동을 부린다죠. 이단자들, 특히 ‘겨울’들이라면 분명 이번에도 바리엔 포위망을 뚫고 잠입할 계획을 세워 두고 있을 거예요.”
리즈벨이 엘모와 카잔의 이름, 그리고 그들이 그녀에게 준 주술석을 가지고 있는 한 이 땅의 모든 겨울들은 그녀의 편이었다.
“게다가 제 힘은 얼핏 보면 헬라르의 성력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눈속임에 불과할 거예요, 리즈벨. 우리도 단번에 당신의 성력과 헬라르의 힘을 구분하는데, 그들이 몰라볼 리가…….”
“잠시면 돼요, 부인.”
리즈벨은 가볍게 웃었다. 이 세계로 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계획을 풀어 놓는다.
“제게 필요한 건 단 한 시간, 아니 30분이라도 괜찮아요. 일단 바리엔 안으로 들어가서 성녀를 찾기만 하면 되니까요.”
일단 이 시대의 성녀를 포획해 그녀 안에 있는 헬라르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헬라르를 붙잡은 그 찰나에, 주술석을 이용해 아스테르반으로 이동한다. 이계의 땅을 밟음과 동시에 헬라르의 힘은 절반 이하로 무력화될 것이다.
듀엔이 인상을 찡그렸다.
“성녀, 아그네스 라그놀라는 잔악한 여자입니다. 그녀만큼 헬라르에게 절대복종하는 성녀도 또 없을 테지요. 사흘 밤낮으로 1,500명의 목을 베는 모습이 흡사 악귀 같았습니다.”
“…….”
“그러니 성녀를 보면 망설이지 말고 죽이십시오.”
듀엔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리즈벨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이 시대의 성녀가 제 손으로 죽인 숱한 인간 중 상당수는 뤼켄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아그네스 라그놀라. 리즈벨은 그 이름을 입 속으로 되뇌었다. 헬라르의 마리오네트라.
유레인이 덧붙였다.
“헬라르의 인형들의 약점은 눈가리개예요, 리즈벨.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눈가리개를 벗기면 헬라르의 권속에서 순간적으로나마 해방되는 모양이니까.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 딱 그 상태가 되어요.”
“네, 명심할게요.”
리즈벨은 그들이 주는 정보를 차곡차곡 저장했다. 떠날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 * *
리즈벨이 바리엔으로 떠난다고 했다. 소년은 며칠간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방에 틀어박혀 기억을 뒤졌다.
그 밤, 기이한 꿈을 꾸다 깨어나자마자 리즈벨과 마주했던 밤. 저가 꿈을 꾸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아이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라제는 알 것이다.
아시어스는 검은 돌 사자를 앞에 두고 눈을 빠릿빠릿하게 떴다.
“말해.”
[…….]“말해, 라이제스. 너는 전부 알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