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47
148화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운 파편이 속삭였다.
‘너는 저 여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욕정했지. 입을 맞춘 순간 그 입술과 안쪽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았어.’
마음이 지끈거리며 몸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게 정상인 건가. 그는 회의적이었다.
이틀 전,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르던 밤 창가 앞에 서 있던 저 여자를 처음 보았다. 그때 눈물이 툭 터졌었지. 막 깨어나 뭐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도, 몸을 제대로 운신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정의 둑만 대책 없이 무너졌었다.
저 여자는 언젠가 틀림없이 그를 아프게 했었다.
“으…….”
가느다란 신음에 아시어스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모로 누운 자세가 불편한지 리즈벨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찡그려져 있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려 축축한 이마와 볼에 달라붙은 금빛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리즈벨의 손목에 찍힌 붉은 낙인 위에 그가 짜 넣은 마법진이 떠 있었다. 낙인이 퍼뜨리는 성력의 파장을 차단하는 결계의 진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강렬한 두 기운이 여자의 몸 안쪽에서 맞부딪히고 있었다. 몸에 오는 반동이 클 것이다. 그녀의 뺨이며 목덜미, 움푹 팬 빗장뼈 아래에 얼룩덜룩한 열꽃이 피어 있었다.
“신열…….”
아시어스는 다시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에 손을 대었다. 이마와 뺨은 불덩이 같은데 한기를 느끼는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서늘한 손이 반가운지 그녀가 그의 손에 바짝 얼굴을 묻고 연신 뼘을 비볐다. 더 만져 달라는 것처럼.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는 한 손으로는 여자의 목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아 그녀를 제 위로 올렸다. 몸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품에 안고 나니 얼굴이 정면에서 내려다보였다.
“……이렇게 예쁜 인간은 처음 봐.”
라제는 그의 중얼거림에 헛웃음을 지었다. 기억이 온전하든 온전하지 않든, 리즈벨을 처음 보고 느끼는 감상은 이전과 똑같았다.
초록빛 마력이 리즈벨의 이마에 스며들었다. 당장 열을 내리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으응…….”
여자가 잠시 신음했다. 꼭 고양이가 가늘게 우는 것 같은 소리였다. 예쁜 소리.
그녀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서늘한 체온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풀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 뺨을 기대었다.
“……아시어스.”
그녀가 중얼거린 제 이름에 심장이 끝을 모르고 낙하했다.
“아파…….”
“……많이 아파?”
“응…….”
아시어스는 힘없이 늘어진 손을 찾아 쥐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마디를 쓸어 보았다가 깍지를 꼈다. 버겁게 벌어진 하얀 손가락에 불쑥 음심이 고개를 들었다.
“리즈벨.”
아시어스는 그녀의 이름을 각인이라도 하듯 되뇌었다.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밤은 처음으로 그녀와 몸을 겹치던 날이었다. 아시어스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깍지 낀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손등에 열상을 내듯이. 꾹.
“으응…….”
눈이 마주쳤다. 몽롱한 푸른빛이 모닥불의 강렬한 그림자에 이리저리 이지러졌다. 리즈벨이 그에게 붙들린 손을 움직였다. 깍지 낀 손이 그대로 그의 뺨에 닿았다. 그녀와 닿는 모든 곳이 불씨가 되어 화르륵 타올랐다.
“뭐야…… 드디어 꿈에 나와 준 건가.”
리즈벨이 작게 웅얼거렸다. 뭐라 더 말하려는 것 같은데 발음이 뭉개져 잘 들리지 않았다. 아시어스는 그녀의 입가로 고개를 내렸다.
“다시…… 말해 봐요.”
리즈벨은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입을 다물었다. 아시어스는 살짝 벌어진 입술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채근했다.
“아무 말이라도 해 봐.”
“너 진짜…… 진짜 미워. 항상 네 멋대로…….”
기어이 입술이 그녀의 콧등에 닿았다. 그가 밉다고 하는데도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더 듣고 싶어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가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꿈에도 안 나와서 진짜 많이 미웠단 말이야.”
정신없이 목소리를 듣는데, 돌연 그녀가 입술을 붙여 왔다. 뽀뽀라기엔 깊고 키스라기엔 얕은 접촉이었다. 말캉한 살덩어리가 아랫입술을 머금고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간,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툭 끊겼다.
“뭐 하다가 이제-.”
그는 힘없이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반쯤 벌어져 있던 입술 틈을 파고드는 건 쉬웠다. 서늘한 입술과는 달리 뜨거운 점막과 뭉근한 혀가 그에게 달라붙었다. 혀 밑에 고인 맑은 타액이 다디달았다.
중독될 것만 같은 확신이 몰려왔다. 그는 그를 피해 달아나는 작은 혀를 제게로 끌어와 포개었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가 받아들이기엔 거친 키스였으나, 아시어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달아. 미치게 달았다.
“응…….”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그녀가 나직이 신음했다. 자꾸만 뒤로 몸을 빼는 게 거슬려 아예 제 아래에 눕히고, 그는 본격적으로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다. 숨이 모자란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 할 때마다 억지로 턱을 붙들고 끝까지 따라붙었다.
리즈벨은 몽롱한 사고 속에서도 제 몸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등에 딱딱한 바닥이 닿는 걸 느끼고 눈을 떴을 때는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이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시야 아래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하아…….”
나른한 숨소리와 함께 그녀에게 키스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리즈벨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들짐승인 줄로만 알았다. 불빛을 등지고 있어 온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진 가운데 애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만이 선명한 탓이었다.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남자가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핥았다. 입가에 비스듬히 걸린 미소가 뇌쇄적이기까지 했다.
“……잘못 본 게 아니네.”
아직 숨이 모자라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입을 맞춰 왔다.
그녀를 마음껏 휘저어 유린하는 키스가 마침내 끝에 다다랐을 때,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던 리즈벨의 의식이 마침내 툭 끊겼다.
“리즈벨.”
아시어스는 갈증 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계속해서 부르고 어깨를 흔들어 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종전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가라앉은 고른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자는 거야?”
이대로? 나를 이렇게 두고?
안고 싶은데. 추잡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다. 입술만으로도 이렇게 중독적인데 맨살은 어떨까. 가장 은밀한 곳은? 생각만으로도 목덜미가 오싹했다.
그러나 편안히 잠든 얼굴에 양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또다른 아시어스가 그에게 경멸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미친놈, 이미 충분히 멋대로 굴었잖아. 그만 자게 둬.
“아…… 제기랄.”
아시어스는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손으로 얼굴을 마구 쓸어내렸다. 기억나는 거라곤 이 여자를 안고 수도 없이 그를 새겼던 것뿐인데 그럼 어쩌라고. 신경질적으로 자문해 봤자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애욕의 순간들을 품은 파편이 더는 사그라지지 않고 기억의 빈자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 * *
리즈벨은 그날 새벽의 일이 꿈이라고 여겼다. 이틀이 넘도록 고열에 시달린 탓에 기억도 온전하지 않았다.
열은 내릴라치면 다시 비정상적으로 치솟았다. 식은땀이 마를 새가 없으니 갈증도 지독했다.
이따금 입술 사이로 차가운 물이 흘러들어올 때면 그것을 정신없이 받아 삼키고 다시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분명 종전까지는 어느 곳에서 쏟아질 듯한 별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낯선 곳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리즈벨은 멍하니 천장의 나뭇결무늬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잡힌 걸까. 잡혔다면 또 어떻게 나가야…….
손목이 떨어질 것처럼 아팠다. 리즈벨은 천천히 손목을 움직이려다, 누군가 이미 그녀의 손을 쥐고 있음을 알았다. 크고 서늘한 손이었다.
“어…….”
아시어스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렇게 경악스럽지는 않았다. 리즈벨은 그의 시원스러운 턱선을 물끄러미 보다 상체를 일으켰다.
손을 놓지 않은 채 일어나느라 시트와 손이 흔들리는데도 남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시어스…….”
리즈벨은 유심히 그를 살펴보았다.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뜨는데도 눈앞의 환상은 일그러질 기미가 없었다. 리즈벨은 곧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꽤 오래 이어지는 꿈이네.”
나쁜 놈. 오랄 땐 죽어도 안 오더니, 대차게 앓고 나서야 나와주는구나. 그녀는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