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51
152화
리즈벨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열이 또 오르려는지 양 뺨이 뜨거웠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본 아시어스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차라리 내가 해 줄게요.”
“뭐?”
“최대한 안 아프게, 긁어 내 줄 테니까…….”
리즈벨의 표정에 약간의 의구심이 어렸다.
“할 수 있겠어?”
“무슨 뜻이에요?”
“또 울 거잖아.”
그 말에 정말로 아시어스의 낯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그 기억이 맞았어. 당신 옆에 있으면 내가 아파질 거라는 거.”
“그래. 그러니까 내가 할게.”
“아냐. 내가 해.”
아시어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 같은 눈을 한 주제에 퍽 고집스러웠다.
그가 택한 방법은 불이었다. 리즈벨도 차라리 불로 낙인을 지워 내는 게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몸에 이만큼의 상처가 나는 건 발디마르에서 광인 행세를 하던 시절 이후로는 처음이다. 심지어 화상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별수 없이 우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파.”
“당연하죠.”
아시어스는 제 손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줄곧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낙인을 지져 없애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수천 개의 미세한 바늘로 상처를 난폭하게 쑤셔 대는 듯한 통증에 절로 눈물이 맺혔다.
“아, 진짜. 너무 아픈데…….”
리즈벨이 인상을 구기며 칭얼거릴 때마다 아시어스의 얼굴이 점점 더 파랗게 질렸다. 낙인은 생각보다 깊이 새겨져 있었다. 손목의 혈맥을 끊어 버리지 않도록 낙인을 태우고 나니 손목 안쪽에는 흉측한 화상 자국이 생겼다.
낙인이 전부 불에 타 뭉그러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녹색 마력이 내려앉았다. 벌겋게 올라왔던 수포가 톡톡 터지더니 진물이 증발했다. 상처 위에 얇은 피부막이 생기고, 순식간에 딱지가 져 아물었다.
“와…….”
리즈벨은 아픈 것도 잊고 감탄했다. 본질적인 의미의 치료가 아니라고는 해도 역시 대단하다. 이윽고 통증까지도 언제 닥쳤었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붉은 낙인이 찍혀 있던 자리에는 꼭 그만한 크기의 흉터가 생겼다. 보기에 좋지는 않았지만 이만큼이 어딘가.
“고마워. 이쪽이 훨씬 낫다.”
“이런 건 좋지 않아요…….”
아시어스는 또다시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흉 졌어. 흉터도 없애 버리고 싶은데.”
엉뚱한 곳에서 능력의 한계가 보였다. 이전 같았으면 흉터조차 없이 싹 지워 버릴 수 있었을 텐데.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전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손끝 하나 안 다치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아시어스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는 본능처럼 알았다. 오늘 같은 일은 오늘로 끝이 아닐 것이다.
제 손목을 잘라 버리려던 리즈벨의 눈에 망설임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를 위해서라면 제 몸을 희생하는 걸 당연시하겠지. 그건 싫었다…….
“그냥 나랑 떠나면 안 되나요?”
아시어스가 불쑥 물었다. 잠깐 새에 아랫입술을 또 잘근잘근 씹었는지 입술이 터져 있었다.
“꼭 바리엔으로 가야 해요?”
“가야 해.”
“왜? 손목 하나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그곳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뭔데? 거기에 뭐가 있는데요?”
헬라르. 여신. 복수. 가족.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남자가 간절하게 매달렸다.
“그냥 나랑 있어요. 어제처럼. 오늘처럼.”
아시어스가 연신 중얼거렸다.
“아팠던 데는 이유가 있겠지. 난 기억해 낼 생각도 없고, 기억해 내서 다시 아파지고 싶지도 않아요. 눈을 떴을 때부터 내게 남아 있던 건 당신 하나니까.”
“…….”
“그냥 평생 너 하나만 보고 살아도 좋을 것 같아.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잖아.”
리즈벨이 더 이어지려는 그의 말을 부드럽게 막았다.
“너는 많이 아팠어, 아시어스.”
“내가?”
“응. 나를 만나기 이전에도 많이 아파했고, 많이 울었고, 많이 고민했고. 나를 만나고 나서는 더했지. 이전에는 내가 그것들을 함께해 주지 못했으니까. 내가 너를 너무 몰라줘서…….”
“…….”
“내가 미안해서.”
“그럼.”
아시어스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당신은 안 아팠어요?”
“…….”
“당신은 안 울었어?”
조각조각 찢어진 아시어스의 마음이 울었다. 리즈벨은 그의 기척을 처음 잡아내던 날 밤 분명히 말했었다.
“나 힘들어. 안아 줘.”
리즈벨은 담담히 수긍했다.
“나도 인간인걸.”
상실은 두렵다. 희생은 싫다. 그러나 가장 아픈 것은 잃고 나서야 깨닫는 애정의 무게였다. 로제스가 그랬고, 아시어스가 그랬다. 리즈벨은 늘 한 박자 늦었고 그게 미안해서 몇 번이나 울어야 했다.
“힘들지 않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야. 손톱만 한 희망에 기대어서 나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더라. 별을 쫓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어.”
희망이라는 이름의 별은 늘 지독하리만치 예쁘게 반짝였다. 순순히 그녀 손에 떨어져 줄 것도 아니면서 보고 있자면 가슴만 쓰리게.
“하지만 그렇다고 별이 그 자리에 없는 것은 아니니까.”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긴 하니까. 아무리 앞을 더듬어도 암흑뿐이었던 발디마르에서조차 희망의 빛은 분명히 존재했다. 권능이라는 이름의 희망이, 로제스라는 이름의 빛이 있었다.
그것들이 동력이 되어 리즈벨을 이끌었다. 걷다 보면 언젠가는 닿을 거니까 멈추지 말라고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이 산만 넘으면 닿을 수 있을 거야. 이 도랑만 건너가면. 이 물살만 헤치고 나아가면…….
오늘을 버티면 내일이 올 거야.
“그러니까 결국에는 너를 내 앞으로 되돌려 놨잖아.”
리즈벨은 아시어스에게로 몸을 기울여 그의 턱을 매만졌다.
“그러니 너도 언젠가는 전부 기억해 내야 해, 아시어스.”
“왜…….”
“도망치고 회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니까. 도망친 곳에 행복은 없어, 아시어스.”
“…….”
“쫓기는 자의 불안감.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럼에도 우리가 손을 잡고 있다면, 그때 느낄 감정은 아마도 함께 죽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
리즈벨의 목소리는 다정다감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단호했다.
“하지만 그런 건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
“그렇게 절박하게 살고 싶지 않아. 이미 너무 지독하게 겪어 왔으니까.”
“그럼 당신에게 의미 있는 건 뭔데요?”
“아침에 일어나서 너에게 다정하게 키스할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여유. 너랑 마주 앉아서 오늘 저녁엔 뭘 먹을까. 내일은 마당에 꽃을 심어 볼까?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하루.”
“…….”
“다정한 친구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좋은 식사를 함께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그런 평화로운 날들. 나한테 의미 있는 건 그런 거야.”
리즈벨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내일을 꿈꾸고 싶었다. 그것을 온 마음으로 바랐다. 아시어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고요.”
“지금이 행복하다면 내일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지 기대되지 않아?”
그런 걸까. 아시어스는 숨도 못 쉬고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오늘보다 내일 더 너를 사랑할 거고. 그러니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할 텐데.”
리즈벨이 까맣게 화상 자국이 난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어렴풋하게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응.”
마침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리즈벨의 이마에 닿았다.
“그래요……. 당신이 바라는 게 그거라면.”
“착하다.”
“하지만.”
아시어스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조급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이런 짓은 이제 하지 말아요. 나랑 같이 내일을 살고 싶으면 당신 몸도 소중히 해 줘. 오늘 하루 살고 끝날 거 아니라고 당신 입으로 말했으니까.”
화상은 아물었지만 흉터는 고스란히 남았다. 아시어스는 그저 한 줌밖에 안 되는 손목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흉터 위에 입술을 눌렀다. 아마 이 상처를 볼 때마다 지금 이 떠오르겠지.
내일. 희망. 리즈벨이 말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래도 그것들이 그를 앞으로 밀어낼 동력이 될 거란 건 분명했다.
“그리고, 참.”
리즈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네 가족은 정말 좋은 분들이야, 아시어스.”
“내가 가족이 있어요?”
“세상에 혼자 온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가…….”
“너도 다 기억하고 나면, 아마 내 말을 듣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아시어스는 여전히 그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 두려웠다. 이대로 무엇도 기억하지 않고 이 달콤하고 빛나는 여자를 안고만 살아도 좋았다.
하지만 리즈벨의 말대로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할 거라면. 그러면 두렵더라도 나아가는 게 맞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