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53
154화
* * *
봄 제의가 코앞까지 닥친 주시케는 며칠 전보다 더욱 북새통을 이루었다. 타국의 사절단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외지인이 많으니 검열도 자연히 더 엄격해졌지만, 반대로 외지인이 많아 불순한 무리가 잠입을 시도하는 횟수는 더 잦아졌다.
“크억!”
리즈벨은 제 앞의 사내가 성기사의 창에 무참히 꿰뚫리는 것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리엔으로 숨어들려는 이단자 종파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즉결 처분당한 사내의 심장 부근에서 솟구친 피가 마른 땅에 흩뿌려졌다.
“……쯧.”
정말 정나미 떨어진다.
리즈벨은 혀를 차며 후드 끄트머리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 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러나 아시어스가 그녀보다 더 빨랐다. 완연한 불쾌감이 어린 얼굴로, 그가 후드에 묻은 핏자국을 문질렀다. 하얀 성의에 밴 핏자국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아시어스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안 지워지는데.”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라고 하려 했다가 리즈벨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든 말든 아시어스의 온 관심이 제게만 쏠려 있는 걸 그제야 눈치챈 것이다. 리즈벨은 헛웃음을 지으며 남자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네가 문제야. 아시어스.”
다음 차례는 그들이 속한 무리였다. 대륙 중부의 어느 작은 왕국에서 파견된 신관들로 위장한 ‘겨울’. 시체들을 질질 끌어내느라 검문은 잠시 멈추었다. 그 사이를 틈타 리즈벨은 재빨리 아시어스의 멱살을 잡고 가까이 끌어 내렸다.
“이리 와.”
“……?”
리즈벨은 그의 후드를 살짝 젖히고는 검은 머리카락 위에 성수를 들이부었다.
“윽.”
졸지에 물벼락을 맞은 아시어스가 즉각 인상을 썼다.
“뭐예요, 이거? 느낌이 이상한데.”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시어스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이마의 물기를 닦았다. 리즈벨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뜯어보았다.
“너무 눈에 튀어.”
“뭐가요?”
“너.”
안경이라도 씌울 걸 그랬지.
리즈벨은 새삼스럽게 아시어스가 늘 안경을 고집한 이유를 다시금 깨달았다. 어디에 내놓건 이목을 너무 끌었다.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마력이 성수에 덮인 것을 확인하며 로브 끈을 조였다. 약간의 투덜거림은 덤이었다.
“이럴 땐 네 얼굴이 도움이 안 돼. 왜 이렇게 예쁘게 생겼어?”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후드를 씌워 놔도 시선을 끄는 게 누군데.”
후드 밑 그늘진 잿빛 눈에 불만이 가득했다. 로브 위로 드러나는 어깨의 곡선이나 금빛 머리카락 한 올, 살짝 스치는 발목 같은 것. 다른 이의 눈에 보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하는 것도 싫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아까 수도 없이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들어가면 뭘 해야 하는지 알지?”
“응.”
바리엔 안으로 잠입하고 나면 갈라져야 한다. 아시어스가 해야 하는 일은 성전 일대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결계와 파괴의 마법진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리즈벨이 해야 하는 일은, 아시어스가 마법을 엮는 동안 성역 어딘가에 있을 성녀와 헬라르를 찾아내는 일이다.
결계가 완성되고 바리엔의 성역이 헬라르의 손아귀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그때가 기회였다. 헬라르에게 종속을 걸고 곧바로 아스테르반으로 이동할 기회.
“잘할 수 있겠어?”
“아이 취급 하는 건 사양이에요.”
하지만 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보다 키가 작은 꼬마였는걸.
리즈벨은 그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능력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내면은 금 간 유리처럼 아슬아슬해도, 그의 마법적 능력만은 언제나 완벽했으니까.
선두에 서 있던 겨울의 대장이 무리를 향해 약하게 고갯짓했다.
성벽 서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미끼가 활동을 시작했다.
* * *
바리엔 성전 안쪽으로 들어서는 데는 겨울의 대장이 말했듯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미끼는 그 짧은 시간을 버는 것으로 임무를 충분히 수행했다.
그들은 별다른 위기 없이 무사히 성전 안으로 잠입했다. 바리엔 내부는 리즈벨이 기억하는 것과 거의 일치했다.
‘하긴, 파괴되었다가 복구된 후로는 113년 동안 그대로였으니까.’
혹시라도 구조가 바뀌어 있으면 어쩌지 했던 걱정은 다행스럽게도 기우였다. 리즈벨은 이동하는 내내 주위를 살펴 묘실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해 냈다.
묘실은 왕좌의 홀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묘실은 성녀와 선택받은 신관들만이 드나들 수 있다. 슬쩍 보니 경비가 삼엄하긴 하지만…….
리즈벨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어때 보여?”
리즈벨의 소매 속에서 금빛 요정이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날파리들이네. 문제없겠어.]“좋아, 그럼.”
겨울 일행이 타국의 신관들을 위해 마련된 처소로 안내되자마자, 리즈벨은 무리를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묘실 입구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게 좋겠어. 만약 안으로 들어가는 데 실패하면 총공격을 감행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성수의 유효 시간은 최대 두 시간이었다. 넉넉잡아 한 시간 반 정도가 리즈벨에게 허용된 최대의 시간이다. 그 안에 성녀, 아그네스를 제압해야 했다. 아그네스를 조종하고 있는 헬라르의 권능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가장 좋았다.
“다녀올게.”
리즈벨은 마지막으로 아시어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시어스가 입술에 와 닿는 따듯하고 말랑한 감촉을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그녀가 떨어져 나갔다.
“…….”
아시어스는 식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잿빛 눈에 금빛 머리칼의 광휘가 서서히 사라졌을 때, 그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스라이 떠도는 체향을 등지고 홀린 듯이 걸었다. 이윽고 아시어스는 어느 한 곳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넓고 싱그러운 풀밭으로 나와 있었다. 우측에는 기둥이 늘어선 회랑. 좌측 멀찍이는 제의가 열릴 신도들의 뜰. 낯익은 장소였다. 아시어스는 커다란 바위 앞의 풀밭을 내려다보았다.
“여기…….”
이곳 역시 기억의 파편에 존재하는 곳인가. 아시어스는 눈을 감았다. 느릿하게 기억의 파편으로 넘실거리는 사고의 바다를 유영했다.
“절대 지지 마. 아시어스.”
형. 그 한 글자가 떠오름과 동시에 주위의 모든 풍경이 뒤바뀌었다.
기둥이 무너지고 싱그러운 풀밭이 무참히 짓밟혔다. 붉은 마력과 금빛 성력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형이 어린 그를 뒤로 세차게 밀어 넘어뜨렸다. 동시에 날카로운 성력의 창이 그의 목울대로 튀어나왔다.
콱. 눈앞에 피보라가 일었다. 목뼈가 부서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아시어스는 다시 눈을 떴다.
“…….”
그는 여전히 파편이었다. 그래서 이성이 감정보다 더 먼저 기능을 시작했다. 차분하고 고요하게.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입 맞추고 간 여자와 닮아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으로.
조각들이 전부 엉뚱한 곳에 끼워진 퍼즐 같던 기억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 한 조각이 마침내 제 자리를 찾았다.
“……여기구나.”
내가 형을 묻은 곳이. 그래. 그에게는 형이 있었다. 리즈벨이 말한 가족이란 게 있었다.
아시어스의 발밑에 핏빛 마력이 옭아 들어갔다. 마력이 보이지 않는 지하의 흙을 타고 성역 전체로 구석구석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견고한 결계가 성전을 감싸듯 펼쳐지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시어스는 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니야.”
잿빛 눈에 불씨가 튀었다. 눈앞에서 목이 꿰뚫려 죽은 형제와 그에게 입 맞추고 사라진 여자의 얼굴이 겹쳤다.
“부족해.”
단순히 결계를 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리즈벨은 그에게 결계 이상의 것을 명령하고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시어스는 본래 생겨 먹기를 지독하게 말을 안 듣는 종자였다.
리즈벨에게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아무 안전장치도 없는 위험한 곳에 가도록 순순히 보낼 생각이 없었다.
방금 떠올린 기억처럼 그녀가 목을 꿰뚫려 죽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지? 리즈벨이 이곳에서 무엇이든 하고자 한다면, 이곳은 그녀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되어야만 했다.
붉은 마력은 계속해서 뻗어 나갔다. 아시어스는 아직 완벽하게 자신의 마력을 운용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는 그냥 본능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마력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마침내 붉은 마법진이 바리엔 성전의 지하 전체를 장악할 때까지.
“라제.”
아시어스는 서늘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바깥쪽에도 진을 그려 놔.”
라이제스는 아직 그의 사역마가 아니었으나, 악마와 뒤섞인 파편의 공명은 그의 목소리를 멀리, 성전 바깥을 지키고 있던 악마에게 전했다.
[하여튼, 제멋대로기는.]라제가 투덜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그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셈은 아니었다.
이윽고 바리엔 성전 외곽을 따라 성전 안쪽을 장악한 것과 정확히 같은 모양의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