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59
160화
“…….”
“아버지 지금 어디 계셔.”
“……지하.”
본저의 지하에는 100여 년 전 뤼켄의 선조들이 새겨 넣은 거대한 악마 소환진이 있었다. 듀엔은 첫째 아들이 간신히 저택 주변의 포위망을 뚫고 저택으로 이동해 온 것을 보자마자 지하로 내려갔다. 유레인은 저택의 방어 결계를 지키고 있었다.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잖아, 엘제니아.”
엘제니아는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꽉 깨물었다. 안다. 뤼켄의 세 직계는 각자 맡은 바가 뚜렷했다.
첫째 라나크는 전 대륙에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명실상부한 뤼켄의 후계자. 둘째 엘제니아는 뤼켄의 숨겨진 임무들을 도맡아 하는, 위급 시 후계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역할.
그리고 막내 아시어스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뤼켄의 명맥을 이어 나갈, 최우선으로 가장 온전히 살아남아야 할 아이다.
라나크가 악마를 소환할 상태가 아닌 지금 누가 첫째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서 네 역할을 해.”
“…….”
“네가 티스베의 주인이 되어라. 엘제니아.”
엘제니아는 결국 라나크의 뜻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 *
리즈벨 일행이 에엘로 돌아왔을 때, 뤼켄의 영지 주위에는 거대한 성력의 벽이 세워져 있었다.
[늦었어. 포위망이 벌써 수 겹에 걸쳐서 저택을 둘러싸고 있다.]라제가 인상을 쓰며 마력을 도로 몸 안으로 불러들였다. 몇 번이나 성력의 경계를 뚫어 보려 애썼으나 사정없이 튀는 스파크 덕에 소용없었다.
“제기랄. 라나크 놈은 어디를 또 얼마나 다쳤길래…….”
리즈벨은 라제의 욕설을 들으며 냉기 흐르는 성력의 벽을 더듬었다. 아그네스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헬라르께서 명령을 내리셨어요.”
“……뭐라고?”
“라타에에 있는 모든 성전에 명령하시길, 모든 병력을 이곳으로 집결토록 하라고…….”
“직접 강림하려는 거구나.”
이미 뤼켄의 본저 주위에 포진한 성기사와 신관들의 수만 해도 몇백 명이었다. 성녀를 그들에게 빼앗긴 지금, 헬라르는 또다시 지상에 직접 발을 디디려는 게 분명했다. 제 신도들의 희생을 담보 삼아.
“그렇게는 안 되지.”
리즈벨은 라제를 옆으로 밀어내고 직접 성력의 벽 앞에 섰다. 이미 헬라르에게 존재를 들킨 마당에 힘을 숨길 이유는 없었다. 막 불투명한 금빛 막 안으로 그녀의 권능을 흘려 넣는 순간이었다.
“아!”
리즈벨은 짧은 신음을 지르며 손을 떼었다. 할퀴어진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뚝 떨어졌다.
“……!”
아시어스가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켜며 그녀의 손을 당장 잡아 올렸다.
“리즈벨. 손이…….”
거부 반응이다. 그러나 리즈벨은 손바닥에 난 상처에 오래 신경을 쓰지 못했다.
[리즈벨.]금빛 요정이 그녀의 로브 자락을 잡고 가까이 붙었다. 명확한 소녀의 형태를 하고 있던 요정의 얼굴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권능이 서서히 힘을 잃어 간다.
리즈벨은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서 무언가가 거세게 들썩였다. 희고 가느다란 수억 개의 실들. 시간의 선이 요동치고 있었다.
“자매님…….”
아그네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소녀의 바싹 마른 손이 리즈벨의 손에 얹혔다.
“……!”
그와 동시에 눈앞이 화악 밝아졌다. 무의식의 세계로 잠겨 들어야만 보이던 시간의 선들이 이제는 눈앞의 풍경에 또렷이 겹쳐 보였다. 그녀의 몸에 감긴 실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멍하니 고개를 돌리니 아시어스의 몸 주위에도 비슷한 색의 실이 느슨하게 감겨 있었다.
[이 시간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요정이 웃음기 싹 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시간의 선들이 흔들리고 있어, 리즈벨.]“벌써…….”
리즈벨은 망연히 중얼거리다 입 안쪽을 세게 짓씹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돌파해야 한다.
리즈벨은 성력의 벽을 빽빽이 둘러싼 시간의 실타래로 손을 뻗었다. 잡고, 그대로 당겼다. 실이 길게 늘어난다. 늘어난 실타래 사이로 요정이 휘두른 금빛 낫이 번개 같은 궤적을 그렸다.
서걱-. 성력의 벽을 둘러싼 시간의 타래가 끊어졌다. 그 시간 선 위에 놓여 있던 모든 것들이 수억 개의 조각으로 부서졌다.
성력의 벽뿐 아니라 벽이 놓여 있던 자리의 땅마저도 시커멓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풀이 시들고, 땅이 검게 오염되다 종국에는 검은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렸다. 소멸. 형제조차 남기지 않는 완전한 소멸이었다. 파스스-.
“아시어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리즈벨은 아시어스가 곧바로 마력을 엮었음을 피부로 느꼈다. 푸른 마법진이 내뿜는 광채에 눈앞이 새하얗게 명멸했다.
혈관조차 얼려 버릴 듯했던 냉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숨 막히는 마력의 향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라, 라이제스 님!”
저택의 방어 결계를 지키고 있던 마법사들이 라제를 알아보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라제가 혀를 차며 재빨리 아시어스에게 검은 마력을 뒤집어씌웠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리즈벨은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뤼켄의 본저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 잡고 있던 아그네스의 손은 세차게 경련하고 있었다.
[아그네스.]접촉한 손을 타고, 거대한 헬라르의 음성이 몸 전체를 울렸다.
[네가 감히 어디로 도망치려고!]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리즈벨은 당장에 몸 안의 성력을 폭발시키듯 터뜨렸다. 콰앙-!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리즈벨의 권능 아래 놓인 완전한 성역이 선포되었다.
* * *
성역이 선포됨과 동시에 모든 마력의 흐름이 강제로 멈춰졌다. 저택에 있는 백여 명의 마법사의 모든 마력 운용을 제어하는 강력한 성역이었다.
그리고 뤼켄 저택의 지하에서, 리즈벨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악마 소환진을 보았다.
끄트머리까지 거의 다 엮인 소환진은 발디마르의 왕성 꼭대기, 루시페의 침실 바닥에 새겨져 있던 것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물론 루시페의 소환진은 지금 눈앞의 것에 비하면 조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거대한 돔 아래, 정교하고 기하학적인 수십 개의 문양이 돌바닥 가득히 음각되어 있었다. 붉은빛, 푸른빛, 녹빛이 어지럽게 섞여 거의 검은빛을 띠는 마력이 음각된 홈을 따라 펼쳐지며 거대한 마법진의 형태를 그렸다.
그러나 마력은 마법진을 끝까지 다 채우지 못하고 성역의 힘에 의해 멈춘 상태였다. 멈춘 소환진 위에 두 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리즈벨?!”
그녀를 먼저 발견한 엘제니아가 경악해서 외쳤다.
“왕녀님.”
마법진 한가운데서 마력을 주입하고 있던 듀엔 역시 뒤를 돌아보았다. 표정 없이 견고하던 얼굴에 당황과 경계가 가득했으나,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안도의 빛이 스쳤다.
리즈벨은 숨을 몰아쉬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엘제니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리즈벨의 어깨를 잡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척결령이 떨어졌길래 꼼짝없이 죽어 버린 줄 알았잖아!”
듀엔이 빠르게 말을 보탰다.
“일이 틀어진 줄 알았습니다. 계획은 실패한 겁니까?”
“실패하지 않았어요. 마지막 단계를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돼요.”
빠르게 대답한 리즈벨은 그들이 가장 걱정할 만한 사실도 얼른 덧붙였다.
“그리고 아시어스도 괜찮아요. 위험한 일도 없었고, 다치지도 않았어요.”
“……그렇습니까.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듀엔의 시선이 리즈벨 뒤쪽을 훑었다. 아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없을 것이다. 라제가 자신의 마력으로 아시어스의 존재감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즈벨은 듀엔의 잿빛 눈이 한결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 변화가 있었나 보군요.”
그 말에 리즈벨은 결국 애매하게 웃었다. 애초에 듀엔을 속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는 엄연히 라제의 주인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아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만큼 둔한 자가 아니었다.
“죄송해요. 아시어스가 저를 따라올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해서…….”
리즈벨은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듀엔은 그의 둘째 딸보다도 어린, 소녀와 여인 그 사이 경계에 있는 아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막내가 왕녀님을 따라가도록 허락한 게 바로 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