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61
162화
금이 간 채로 모여 있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원상태로 아물었다. 불투명한 장막이 씌워져 있는 것 같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명료하게 밝아졌다.
“못 본 새 말버릇이 많이 나빠졌구나, 티스.”
잿빛 눈에 마계의 용암이 반사하는 시뻘건 빛이 어른거렸다. 티스베의 마력이 흘러듦과 동시에,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능력이 완전히 개화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했다. 아시어스는 서서히 가동을 멈추는 마법진에 다시 마력을 불어넣었다.
“바일라도르.”
통로가 다시금 진동했다. 짙은 회색빛 안개가 공간 안을 자욱이 채웠다.
[저 미친놈.]라제가 뒤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저 괴물 같은 놈이 악마 두서넛 정도 소환한다고 크게 타격받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리즈벨은 회색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아시어스에게로 모여드는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뒤섞인 남자의 시간이 순서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핏빛 과거와 무채색 생, 그리고 죽음. 그리고 모든 것을 잊은 채로 다시 한 번 마주한 생. 본래 갖고 있던 기억도, 힘도 완벽하게 되찾은 남자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리즈벨은 그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다시 살아난 기분이 어때?”
“……그다지.”
긴 잠에서 막 깨어난 듯 몽롱한 음성이었다. 아시어스는 제 손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현실 같지는 않네요…….”
그때였다. 쩌적. 무언가 단단한 것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내리꽂혔다.
“……!”
소리의 근원지는 천장이었다. 돔 한가운데 날카로운 균열이 가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지하 공간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택에 선포된 리즈벨의 성역이 격동하고 있었다. 아주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 성역을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아……!”
성역에 가해지는 충격은 그대로 시전자에게로 흘러들게 되어 있었다. 리즈벨이 뒤늦게 방어벽을 치려던 순간이었다. 휙. 푸른 마력이 리즈벨의 몸을 감쌌다.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끔과 동시에 그대로 시야가 뒤바뀌었다.
휘릭-. 세찬 바람에 금빛 머리칼이 제멋대로 휘날렸다.
장소는 지하의 소환진에서 저택의 지붕 위로 바뀌어 있었다. 리즈벨은 그제야 저택을 둘러싼 전경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저택의 동쪽은 시커먼 구멍이 되어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쪽과 남쪽, 북쪽에는 흰개미 떼처럼 몰려든 성기사들의 무리와, 헬라르를 신봉하는 국가들에서 보내온 기사 군단이 빽빽이 밀집하고 있었다.
포위되었다.
조금 전에 그녀의 성역을 공격한 것은 수십 개의 성력의 창이었다. 창공에서 저택을 향해 똑바로 겨눠진 창들이 또다시 내리꽂히기 직전, 소용돌이치며 뻗어 올라간 검은 마력이 성력의 창을 낚아챘다. 챙캉, 챙캉, 챙캉-. 금빛으로 빛나던 창이 연쇄적으로 부러지기 시작했다.
“먼저 내려가 있을래요?”
다정한 목소리가 리즈벨의 정신을 깨웠다. 큰 손이 그녀의 양 뺨을 감싸고 들어 올렸다. 입술에 도무지 이 상황과는 맞지 않은 달콤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열셋짜리 아이도, 그녀에게만 맹목적인 파편에 불과해 그녀가 지켜 줘야 할 남자도 아니었다.
아시어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정리하고 내려갈게요. 조금 이따 봐요, 리즈벨.”
리즈벨의 발밑에 푸른 이동진이 떠올랐다. 금색 빛무리가 반짝이며 사라졌다.
“…….”
아시어스는 리즈벨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잠깐 닿았던 따스한 입술의 감촉이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중얼거려 보았다.
“꿈인가?”
“정말?”
[그래.]가까이 다가온 라제가 주둥이로 그의 허벅지를 툭 쳤다.
[간만이다, 아시어스. 그간 잘 지냈냐.]“글쎄…….”
아시어스는 제가 딛고 있는, 기억에서도 차츰 잊혀 가던 어린 시절의 집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이들의 기척을 한참이나 느끼다가.
“하…….”
억눌린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잿빛 눈동자 주위에 핏발이 불거졌다.
콰앙-. 분개한 헬라르가 다시 한번 리즈벨의 성역을 공격했다. 휘릭. 잿빛 눈이 뒤편을 향했다. 성역 밖에 도사리고 있는 냉기를 인식한 순간, 그가 광기 어린 폭소를 터뜨렸다.
“하, 하하…….”
이게 다 꿈이 아니란 말이잖아. 그가 전운이 감도는 공기를 코와 입으로 크게 들이마셨다. 파편일 때는 느끼지 못했던 전율이 그를 사로잡았다.
최후의 순간 망막에 새겨 넣었던 저주스러운 금빛 치맛자락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결국 망령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채 죽어버린 게 유일한 한이었다. 허리까지 꺾어 가며 시원하게 웃어젖힌 아시어스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미친년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거잖아. 지금.”
이윽고 다시 허리를 세운 그의 얼굴에는 거짓말처럼 웃음기가 싹 빠져 있었다. 아시어스의 주위를 맴돌던 마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라제가 흡족하게 이를 드러냈다.
[그래, 이래야 내 주인이지.]주인에게 감응한 티스베가 저택의 높이를 가볍게 뛰어넘는 거대한 화염으로 화했다. 두 갈래로 나뉜 회색 안개가 서로 교차하며 지면을 내달렸다. 아시어스가 라제의 갈기를 매만졌다.
“가만히 있을 거야?”
[그럴 리가.]사자가 길게 포효하는 소리가 천지를 갈랐다. 이윽고 어두운 하늘에 뇌기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 * *
리즈벨은 저택 3층의 복도를 걸었다. 커튼이 전부 젖혀진 창밖에는 공격성 짙은 검붉은 마력이 용처럼 꿈틀거리며 휘돌고 있었다.
“…….”
리즈벨은 잠시 멈춰서 밖의 참사를 지켜보았다. 아시어스는 조절 따위는 전혀 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족히 수백 개는 될 법한 마법진이 내뿜는 광채에 집채만 한 불길, 뇌우까지 쏟아지니 세상이 어두워질 새가 없었다.
저 정도로 초자연적인 마법을 내리꽂는 건 처음 본다. 발디마르에서 그녀를 돕던 때 썼던 대단위 마법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였다.
“……정말 돌아왔네.”
이번이야말로 제대로 된 재회였다. 리즈벨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고 다시 걸음을 떼었다. 그를 다시 마주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불타고 무너지는 밖과는 정반대로, 저택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녀의 성역 안에서 움직이는 이들의 모든 기척이 감각으로 흘러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걸음이 복도 오른편에 있는 문 앞에서 멈추었다.
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한 인간의 생이 꺼져 가는 소리였다.
“리즈벨.”
아들의 곁에서 녹빛 마력을 불어넣고 있던 유레인이 지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신탁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했는데.”
유레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유레인의 손은 차게 식어 있었다.
“아그네스 라그놀라를 데려왔다고 들었어요.”
리즈벨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헬라르에게 조종당한 아그네스와 최전선에서 부딪혔던 뤼켄 일가가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리즈벨은 확신할 수 없었다.
“미리 상의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질게요.”
“책임을 물으려는 게 아니에요.”
유레인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누군가를 더 잃는 게 두려워서 그래요. 아무리 각오했던 일이라도 초연해지기는 쉽지 않아서…….”
리즈벨은 그녀의 눈 밑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았다. 공격당한 본저, 죽어 가는 첫째 아들, 지상을 디딘 두 마리의 악마. 수세에 몰렸던 것이 무색하게도 완전히 반전된 저택 밖의 상황. 돌아가는 상황이 혼란스러울 법도 한데, 유레인은 그녀를 더 추궁하지 않았다. 리즈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누구도 더 잃지 않으실 거예요.”
온기가 감도는 성력이 부드럽게 유레인을 감쌌다. 이 세계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생명의 기운이 그녀에게로 번졌다. 유레인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제가 예정하지 않은 죽음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적어도 이 저택 안에서는요.”
리즈벨은 라나크의 몸 위에 얽힌 시간의 실을 보았다. 그의 실은 군데군데 검게 물들어 있기는 했지만 아직 바스러지지는 않았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리즈벨은 유레인에게 작게 웃어 주었다.
“피로해 보이세요, 부인. 조금 쉬셔도 될 것 같아요.”
유레인을 물린 뒤, 리즈벨은 죽어 가는 뤼켄의 장자 곁에 섰다. 아시어스나 가주 듀엔과는 달리 온화하고 부드러운 선의 남자, 라나크 뤼켄. 아시어스가 눈앞에서 마지막으로 잃었던 형제다.
리즈벨은 잠시 가만히 서서 숨을 골랐다. 아그네스가 그녀에게 접촉한 순간부터 시간의 선들을 그녀의 의지대로 다루는 게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녀조차 무의식의 세계에서나 건드릴 수 있었던 시간의 타래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드러났다는 건, 역으로 말하면 이 시간 선의 세계가 서서히 무너져 간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그 증거로 세계에 가득 들어찬 시간의 타래가 끄트머리부터 삭고 있었다. 그러나 리즈벨은 망설이지 않고 라나크의 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곁을 맴돌던 요정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시간의 실을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네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점점 많아져, 리즈벨.]“알고 있어.”
[각오는 되어 있는 거야?]“물론이지.”
리즈벨의 손끝에서 온기 도는 생명력이 반짝였다. 리즈벨은 싱긋 웃었다.
“이 시간으로 오면서부터 결심했던 일이야. 아시어스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 주겠다고.”
[…….]“그리고 이런 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잖아. 게다가…….”
리즈벨의 푸른 눈이 깊어졌다.
“그 뒷감당이라는 거, 생각보다 그렇게 가혹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이건 확신이야.”
[어디서 기인한 확신인데?]“헬라르에게서 벗어난 성녀는 나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만큼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성녀가 한 명 더 있는 거잖아.”
가는 손가락이 라나크의 몸에 드리워진 시간의 선들을 훑고 지나갔다. 리즈벨은 천천히 말을 맺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