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62
163화
생명의 실을 타고 검게 번져가던 죽음이 서서히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역행하기 시작한다.
손상된 세포의 시간이 되감기고, 육체를 떠나려던 영혼이 도로 끌려 내려왔다.
사경을 헤매던 남자의 호흡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억.”
마침내 남자의 숨이 다시 트였을 때, 방 안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 * *
뤼켄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성력의 벽을 경계로 한 충돌의 여파는 거셌다.
붉은 여우가 일으키는 꼬리 긴 화염과 독성을 품은 회색 안개, 내리치는 번개가 휘몰아치며 일대를 쓸어버렸다.
마력을 다루는 자들을 귀신같이 피하고, 조금이라도 성력에 물든 자들만 귀신같이 잡아내는 마력 운용은 보통의 마법사로서는 엄두도 못 낼 만큼 섬세하고 정교했다.
헬라르의 현신을 위한 제물로 끌려왔던 대륙 곳곳의 신관들이 전부 악마의 마력에 물들었다.
악마의 힘에 물든 자들은 신관의 자격도, 헬라르의 제물이 될 자격도 잃는다.
반항이 거센 이들은 자비 없이 목이 꺾이거나 화염에 휩싸였다. 저 밖은 비릿한 피 냄새와 매캐한 잿가루로 점철되어 있으리라.
엘제니아는 창밖을 내다보며 떨떠름하게 턱을 긁적거렸다.
“이제 막내라고 마냥 귀여워해 주지도 못하겠네…….”
지금 저택 위에 무겁게 내려앉은 존재감에 숨쉬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이건 분명 열서넛에 불과한 꼬마가 가질 존재감은 아니다.
게다가 그녀가 아는 귀염성 있는 막내는 저렇게 무자비한 성정도 못 되었다. 그럼 지금 지붕 위에 올라앉아 있는 건…….
“먼 미래…….”
아득히 먼 미래에, 혼자 남아 대륙의 마법사 전부를 능가하는 강대한 힘을 쥐었을 마지막 뤼켄.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마냥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구나. 아마 저만한 강자의 등장을 누구도, 심지어 헬라르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 멀리 급히 철수하는 이국의 깃발이 보였다. 족히 수만은 되어 보였던 군대는 이미 반의반으로 줄어 있었다.
사태가 잠시의 소강상태를 맞이한 것까지 확인한 후, 엘제니아는 라나크의 침실로 달려갔다. 그녀는 벌컥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멀쩡히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는 오라비를 발견하고 꽥 소리쳤다.
“왜 멀쩡해, 오빠?!”
“불만이냐?”
라나크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엘제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제 뺨을 꼬집어 보았다.
“정말 멀쩡한 건 맞아? 아까까지만 해도 죽어 갔잖아.”
“그러게 말이다. 나도 놀라운데…….”
“어디 봐!”
아시어스는 창밖 테라스에 기대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저택의 방어 결계를 몇 겹으로 치고 막 지붕에서 내려온 참이었다.
그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던 티스가 아래로 폴짝 뛰어 방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 저가 보는 시야를 곧바로 그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엘제가 사나운 기세로 라나크의 셔츠를 홱 들추었다. 그녀는 아물었다기보다 처음부터 상처 따위는 없었던 것같이 매끈해진 복부를 보고 침음성을 삼켰다.
“진짜 다 나았잖아?”
“뭐 하는 짓이야.”
“세상에, 정말 흔적도 없네……?”
라나크가 인상을 찡그리며 여동생의 손을 쳐 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보다 그 금발 여자는 누구야. 그리고 우리 막내는 어디 갔어? 티스베는 네가 소환한 게 맞아?”
“막내는……. 아니, 일단 티스베의 소환은……. 아, 젠장.”
대체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해. 엘제니아가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자, 라나크가 싸늘하게 질책했다.
“너 대체 아는 게 뭐냐? 엘제. 지금까지 어디서 뭐 했어?”
“안 그래도 머리 어지러워 죽겠으니까, 환자는 좀 닥쳐!”
아시어스는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 만에 보는 얼굴들인지 모르겠다.
아시어스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은 형제들의 기억은 그들의 최후뿐이었다. 그가 먼저 잃었던 형제인 엘제니아가 어떤 모습으로 최후를 맞았는지 아시어스는 몰랐다.
그래서 누이는 늘 다른 모습으로 그의 꿈에 나오곤 했다. 언젠가는 온몸에 화상을 입어 끔찍하게 뒤틀린 모습으로, 또 언젠가는 온몸의 관절이 기괴하게 비틀린 모습으로…….
라나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그가 목을 꿰뚫리는 걸 봤으니까.
“일어나. 아버지께 가 봐야겠으니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라나크가 엘제니아의 소매를 질질 끌어냈다. 아시어스는 형제들이 왁왁 싸워 대며 방을 나서는 것까지 본 뒤에 마법을 엮었다.
장소가 바뀌었다. 그는 저택의 빈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기억 속에서도 흐릿해진 저택 3층의 복도는 100여 년 만에 만난 형제들의 얼굴만큼이나 낯설었다.
아시어스는 낯선 단어를 입 밖으로 뱉어 보았다.
“집.”
그가 이 저택에서 보낸 시간 중 제대로 기억하는 건 10년이 채 안 되었다.
머리는 이미 옛적에 저택의 구조를 잊었는데도 몸은 아직 저택의 구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복도 중간, 계단 맞은편의 문 앞에 멈추어 서서 열린 문틈에 눈을 가져다 댔다. 어울리지 않게도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책상과 책장 사이사이를 장식하고 있는 아버지의 서재가 보였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 될 모양이에요. 내일 새벽 동이 틀 때 계획을 실행에 옮길 거라고 했으니까.”
“그렇습니까. 땅의 흐름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군요.”
“헬라르가 최후의 공격을 가하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어요. 결계의 영역을 더 넓게 잡아야 할 것 같아요. 이 영지 전체로요.”
차분하게 주고받는 대화 소리에 그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방 안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원혼 같은 게 아니었다. 주섬주섬 그간의 일을 토로해도 듣지 못하는 원혼 같은 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완전히 끊긴 숨이 다시 이어 붙은 경우를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아시어스는 깨달았다. 그가 사랑한 여자가 제 죽음에서 한 번 돌아왔듯이, 그의 죽음도 되돌렸음을.
“리즈벨.”
그 이름이 혀끝에 달게 맴돌았다. 빛바랜 무덤에 불과했던 그의 과거를 생생한 현실로 바꾸어 놓은 사람의 이름이었다.
아시어스는 서재를 등졌다. 내딛는 발걸음에 점차 조급함이 실렸다. 어느 순간 그는 텅 빈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마지막 코너를 돈 순간, 아시어스는 그가 지독하리만큼 간절하게 사랑했던 금발을 눈에 담았다.
* * *
리즈벨은 저택 복도의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시어스가 바깥 정리를 끝마쳤는지, 더는 굉음도 지진도 마력의 파장도 없었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는 않았어도 영지가 황무지가 되어 있을 것은 뻔했다. 그렇게 뒤엎고 불태웠는데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리즈벨은 시선을 저택 동쪽으로 돌렸다.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던 그곳은 끝 모를 무(無)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몇 시간 전에 보았을 때보다 영역이 넓어진 것 같진 않다. 결계가 소멸의 궤도에 들어선 땅을 둘러싸 진행을 막고 있는 덕분이었다.
뤼켄의 저택을 사수한 이상 일을 미룰 필요는 없다. 마지막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 리즈벨은 입을 열었다.
“해가 뜨면.”
“……해가 뜨면?”
어둠 속에서 누군가 느리게 되물었다. 리즈벨은 창가를 등지고 돌아섰다.
“성역을 해제할 거야. 너도 그때 저택의 결계를 없애.”
저택의 보호막이 모두 사라지면, 틀림없이 헬라르가 아그네스를 노리러 올 것이다.
“아그네스의 권능을 각성시켜 보려고 해. 그럼 헬라르의 목표는 십중팔구 나로 바뀔 테고. 그때 그녀에게 역종속을 걸어 아스테르반으로 이동할 거야.”
리즈벨은 그 대목에서 말을 잠시 멈추었다. 숨을 훅 들이켠 뒤에, 복도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같이 갈래, 아시어스?”
“…….”
“너도 헬라르의 최후는 보고 싶을 것 같은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달을 가린 구름이 걷히며 복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에 은은한 달빛이 덧씌워졌다.
아시어스는 딱 한 가지 감정으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즈벨.”
그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내게서 무슨 말이 가장 듣고 싶어요?”
그건 그녀가 건넨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무슨 말이 제일 하고 싶은데?”
“……너무 많아서 잘 모르겠어.”
아시어스가 벽에 기대고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와 조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턱이 들려 올라갔지만, 그는 늘 하던 대로 입술을 가르는 대신 가만히 맞대고만 있었다.
리즈벨은 눈을 감고 옅게 불어오는 숨결과 마른 입술의 감촉을 느꼈다.
길고 긴 찰나가 지나고,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