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66
167화
“…….”
“너 나 놓을 생각 없잖아. 그러니 이번에는 네 차례야.”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손목이 하얗게 되도록 움켜잡았다. 금빛 성력이 그의 손목을 휘감았다. 그녀에게서 그에게로, 어떤 정보가 흘러들었다.
항로였다. 리즈벨이 카잔과 함께 아스테르반으로 향할 때 그녀의 권능에 새겨 놓았던, 얼음의 땅으로 들어가는 항로.
“이 세계가 완벽하게 안정을 되찾으면 아스테르반으로 와서 나를 깨워. 무슨 말인지 알지?”
리즈벨은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나는 너를 믿어, 아시어스.”
“…….”
“네가 나를 놓지 못하리란 걸 믿어. 네가 나를 잊지만 않는다면 너는 나를 다시 안을 수 있을 거야.”
스치듯 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아시어스는 더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저를 놓고 일어나는 여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의 생에서 차지한 부분은 순간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그의 모든 시간을 그녀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를 구원한 사랑스러운 지배자. 그녀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했다.
“사랑해. 세상에서 너를 제일. 내가 살던 곳을 버리고 올 정도로.”
“…….”
“그러니까 기다릴 거야. 기다릴게. 너도 나를 찾으러 와 줘.”
어쩌면. 아시어스는 안간힘을 쓰며 다정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온몸이 생의 빛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 빛으로 타인을 흠뻑 물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확신한다면, 잠시의 이별을 감수해야만 그들이 마침내 행복해질 수 있는 거라면…….
아시어스는 그대로 저를 등지는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당신을 다시 찾으면.”
“…….”
“그때는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리즈벨은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남자에게서 전해 오는 떨림을 느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보내 주는 거야…….”
그녀를 안은 팔에서 힘이 풀렸다. 리즈벨은 아시어스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척을 느꼈다.
끝이 아니야. 울지 마.
리즈벨은 넘실거리는 감정을 가까스로 삭이며 걸음을 떼었다. 아시어스가 멀어진다.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는데. 그냥 품에 안겨 눈과 귀를 막고 있으면 평생 떨어질 일 없이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리즈벨은 시간을 거슬러 오면서까지 찾아낸 사람을 뒤에 남겨 둔 채 앞으로 나아갔다.
“아그네스.”
그녀의 새로운 선택이 눈앞에 있었다. 다가갈수록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아이의 형상으로 화한 리즈벨의 권능이 낮게 읊조렸다.
[이건 미친 짓이야.]“……아니.”
리즈벨은 두 팔로 작은 소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거야말로 처음부터 내가 찾아내야 했던 방법이야.”
아그네스의 선을 짓누르고 있는 헬라르의 시간 선이 보였다. 리즈벨은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인 아그네스의 실에 억지로 성력을 불어 넣었다.
위화감을 느낀 헬라르가 냉기 어린 성력을 내뿜었다. 너무 차가워서 되레 화끈거리는 열감이 손을 뒤덮었지만, 리즈벨은 아그네스를 놓지 않았다.
아그네스의 시간이 역행한다. 체념 짙던 소녀의 얼굴에 슬픔이 스쳤다가, 경악이 번졌다가, 막 고향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지었던 바로 그 표정이 떠올랐다.
리즈벨이 돌린 아그네스의 시간은 딱 10분이었다. 헬라르가 아그네스에게 강림하기 직전의 상태로, 리즈벨은 라나크 뤼켄을 되살렸듯 시간을 되감았다.
헬라르가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무슨 짓이야!]“아그네스의 몸에서 나가, 헬라르. 넌 조금 뒤에 나랑 놀자.”
아그네스의 선을 뒤덮었던 헬라르의 시간 선이 강제로 떨어져 나갔다. 리즈벨은 억지로 입매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들었다. 제 앞에 떠오른 그녀의 권능, 금빛 요정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너는 날 안 도와줄 거야?”
[……눈 감아, 리즈벨.]불투명하게 일렁이던 시간의 타래가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형체를 잃고 무너졌다.
치미는 어지러움에 눈을 감으면서, 리즈벨은 요정이 그녀를 인도하고 있음을 알았다. 귀를 울리던 굉음도, 헬라르의 으르렁거림도 한순간에 멎었다. 그녀가 감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새하얀 시간 선의 세계였다.
* * *
쉼 없이 일렁이던 시간의 타래가 멈춘 세계는 섬뜩하리만치 고요했다.
아그네스는 모든 생명이 맥동을 멈춘 그 무저갱에 홀로 서 있었다. 몇 번이나 주위에 늘어진 시간 선을 건드려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제, 금발의 성녀와 함께 있었을 때는 잘만 만져지던 실들이 지금은 손에 닿지도 않았다.
‘나는 안 되나 봐.’
어리고 약한 소녀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넘쳤다. 돌아갈 곳은 없어졌고, 리즈벨처럼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 시간을 돌릴 힘도 빼앗겼다.
아무리 도와 달라고 외쳐도 아무도 듣지 못한다. 다 자라지도 못한 날개가 세계를 지배하는 독재자에 의해 무참히 뜯겼다.
여기가 내 죽을 곳인가 봐. 하지만 죽음은 차라리 구원이요 안식이리라.
아그네스는 금발의 성녀가 한시라도 빨리 여신과 함께 자신을 죽여 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리즈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녀는 정말로 그녀 앞에 나타났다.
“아그네스.”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따스한 손이 아그네스의 손을 잡았다. 금빛 성력이 소녀의 몸에 서서히 흡수되었다. 아그네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자매님……?”
시커멓던 암경이 훅 물러갔다. 아그네스는 눈을 찌르는 새하얀 빛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하얗고 거대한 실타래가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커다란 고치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실들의 움직임에 따라 금빛 머리카락도 함께 너울거렸다.
리즈벨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는 소녀를 향해 미소했다.
“내 세계에 온 걸 환영해. 아그네스.”
“당신의 세계…….”
아그네스는 멍하니 되물었다.
“왜 저를 여기로 데려왔어요?”
“글쎄.”
리즈벨은 손을 뻗어 소녀의 뺨에 흥건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가 나랑 닮은 것 같아서?”
“제가 당신과요?”
“응. 오래전의 나와.”
“그럴 리가 없는데…….”
아그네스의 얼굴에 불신이 떠올랐다. 리즈벨은 손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빗겨 주고, 구겨진 옷자락까지 반듯하게 펴 주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지옥 같던 때가 있었어. 내 생이 나락 끝에 처박혀 있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고.”
“…….”
“철저하게 혼자 남겨져 있다고…….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밖에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아니었더라.”
“자매님은 구원받았나요?”
“응. 나도 모르는 새에.”
리즈벨은 그녀를 행복으로 가는 길목에 데려다 놓고 마지막까지 등을 떠밀어 주던 로제스의 손길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에 선, 꼭 그 시절의 그녀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절망에 잠식된 소녀를 보았다.
리즈벨은 아그네스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어린 시절 늘 바라지 않았던가. 아주 자그마한 기적이라도 일어나기를. 어떤 희망이라도 보이기를.
“결국엔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했지. 희망 같은 건 없다고. 아니야. 너는 틀렸어, 아그네스.”
리즈벨의 손이 마지막으로 소녀의 뺨에 튄 핏방울을 닦아 내고 떨어졌다.
“내가 너의 희망이 되어 줄게.”
아그네스의 눈이 커졌다. 리즈벨의 몸을 휘감고 있던 금빛 권능이 서서히 소녀의 몸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헬라르의 냉기 어린 성력이 무력하게 잡아먹혔다.
리즈벨은 공간을 가득 채운 실타래 중 한 갈래를 잡았다.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돌아올 때 잘라 놓았던 시간의 끄트머리였다. 지금은 멈추어 있는, 로제스의 시간대다.
잘린 끄트머리가 재로 화해 부스러지고 있었다. 리즈벨은 아그네스의 손을 그 시간의 타래 위로 이끌었다.
한 시대에 시간 선을 다룰 수 있는 성녀는 오직 하나.
그녀가 잘라 놓은 두 세계가 소멸하지 않는 방법은 처음부터 하나밖에 없었다. 변하지 않은 미래와 변한 과거 사이의 괴리를 메울 방법도 하나였다.
자신과 아그네스의 자리를 바꾸면 된다.
리즈벨이 존재했던 모든 미래의 시간에는 아그네스가, 아그네스가 존재한 모든 과거의 시간에는 리즈벨이. 리즈벨은 제 손안에서 움찔거리는 소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녀는 흩어지는 숨결처럼 속삭였다.
“내가 정말 많이 사랑하는 빛을 너에게 나누어 주려고 해.”
“…….”
“네 고향만큼 아름답지는 못할지라도,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따듯한 곳으로 가, 아그네스.”
두 갈래로 나누어진 시간의 타래가 어지럽게 물결쳤다. 아그네스는 리즈벨이 쥐여 준 타래의 끄트머리를 쥐고 멍하니 그녀를 마주 보았다.
“따듯한 곳…….”
“내 집. 내 오라버니의 집. 그리고 앞으로는 너의 집이 될 곳. 그곳에서 살아, 아그네스.”
“…….”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누가 어떤 말로 너의 등을 떠밀어 주었는지 기억하면서 살아. 무엇도 포기하지 말고, 무엇에도 휩쓸리지 말고 너만의 인생을 살아.”
“…….”
“너라는 존재가 간절히 필요한 세계에서, 그곳이 코웰처럼 무너지지 않도록 네 힘으로 지키면서 살아.”
리즈벨은 점차 투명해지기 시작하는 아그네스를 보며 희게 웃었다.
“……오라버니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줄래?”
그것이 아그네스에게 닿은 마지막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