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67
168화
헬라르의 마지막 마리오네트는 미래의 시간을 쥐고서 떠나갔다. 일렁이는 시간의 타래가 아그네스와 함께 반짝이는 빛이 되어 사라졌다.
“…….”
리즈벨은 한참을 아그네스가 사라진 자리에 머물렀다. 선택에 후회는 없다.
로제스의 세계는 무사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떨던 시간의 타래가 확연히 안정을 찾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하지만 시간 선이 완벽하게 복구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단지 리즈벨과 아그네스의 자리만 뒤바뀌었을 뿐, 변해 버린 다른 것들의 괴리는 여전하니까. 수습하는 데 몇 년이나 걸릴까…….
푸른 눈이 내리깔렸다. 그녀의 무릎 아래, 까마득한 허공에서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실이 있었다. 그녀의 몸에 휘감긴 시간과는 영영 닿을 것 같지 않은, 평행선에 있는 시간.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실을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마지막까지 저를 붙잡고 울던 남자의 낯이 지독하게 선연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대한 후회마저도 넘어서는 확신이 있었다.
아시어스는 그녀를 절대 잊거나 포기하지 못한다.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맹목적인 집착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정말 하나뿐이었다. 헬라르. 리즈벨의 목에 걸린 주술석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래. 이제 끝내야 할 때가 왔다.
솨아아-. 하얀 실들의 세계가 무너졌다.
리즈벨의 발이 다시금 단단한 지표면을 디뎠다. 시간은 밤이었고, 그녀는 뤼켄의 저택 뒤쪽으로 펼쳐진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리즈벨은 은하수가 수 놓인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한한 우주 어딘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절대자를 향해 음성을 내었다.
“들려? 헬라르.”
아그네스가 더 이상 이 시간대에 존재하지 않으니 헬라르의 그릇이 될 성녀는 이제 리즈벨 하나였다.
“네 마지막 남은 마리오네트가 여기 있어.”
헬라르의 권능 아래 있는 땅과 공기가 점차 크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리즈벨은 평온하게 말을 맺었다.
“와서 가져가. 네 ‘그릇’.”
더운 계절조차 얼려 버릴 냉기가 살을 에었다. 금빛 성력이 리즈벨의 팔다리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리즈벨은 그녀를 집어삼키려는 헬라르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순간이라도 의식을 놓으면 끝장이다. 다행스럽게도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여신의 음성이 낙뢰처럼 내리꽂혔다.
[너는 어디에서 온 누구지?]“궁금하지 않은 건 묻지 마. 길게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리즈벨은 냉랭하게 대꾸했고, 헬라르는 코웃음을 쳤다.
[건방진 것. 뭘 믿고 여전히 자신만만할까.]“너야말로 나랑 말장난할 시간 없을 텐데?”
리즈벨의 눈매가 휘고 입꼬리가 양쪽으로 부드럽게 끌려 올라갔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온 헬라르의 시간 선을 손가락으로 죽 쓸어내리며 매끄럽게 속삭였다.
“지금 당장 날 갖지 않으면 내가 너를 어떻게 할 줄 알고, 헬라르.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않아?”
이대로 내가 죽으면 또다시 백 년을 넘게 기다려야 할 텐데.
보란 듯 키들거리자 곧장 리즈벨의 몸에 새로운 종속의 사슬이 드리워졌다. 아시어스가 그녀에게 걸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완전한 지배의 사슬이었다.
차르륵. 무거운 쇠사슬이 목과 허리, 팔목과 허벅지, 발목까지 친친 감았다. 성녀와 여신의 영혼이 연결되었다.
리즈벨은 눈을 내리깔고 헬라르가 그녀의 영혼을 샅샅이 얽어매는 것을 느꼈다.
[호오, 너. 이 시대의 아이가 아니구나…….]그녀의 기억 한 부분을 읽었는지, 헬라르가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다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었다.
[시간.]휘릭. 리즈벨 앞에 여신의 금빛 옷자락이 내려앉았다. 형체가 불분명한 금빛 여인의 형상을 한 헬라르가 그녀의 양어깨를 세게 틀어쥐었다.
[시간의 힘이구나.]헬라르의 음성에 광기가 섞였다. 5,000여 년간 대륙을 지배해 오면서 그녀가 건드릴 수 없었던 단 한 가지. 그건 운명이나 자연의 섭리 같은 게 아니었다.
[그래. 시간, 그것이었는데. 왜 몰랐을까!]기괴할 정도로 높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공을 전부 내 손에 쥘 수 있어! 정신없이 웃어젖히는 헬라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리즈벨은 빠르게 몇 가지를 계산했다.
이대로 이동할까. 목에 걸린 주술석이 때가 왔다는 것을 안 것처럼 부르르 진동했다. 지금 당장 아스테르반으로 곧장 가기만 하면 그녀의 할 일은 다 끝난다.
‘아냐.’
그러나 리즈벨은 생각을 바꾸었다.
헬라르의 힘. 공간의 권능. 그걸 뽑아낸 뒤에 가자.
리즈벨은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녀의 몸을 서서히 차지하는 절대자를 역으로 더듬어 보았다.
‘틈이 안 보이는데…….’
속으로 중얼거리자 리즈벨의 권능이 곧바로 응답했다.
‘틈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그 속삭임에 리즈벨은 영혼의 종속이 갖는 특성을 떠올려 냈다. 영혼을 담보로 한 종속이 끊어지면 양쪽 모두에게 타격을 입힌다.
종속이 끊어질 정도의 충격을 가하면 아무리 절대자라 한들 찰나의 틈 정도는 생기리라.
뜨거운 열기가 리즈벨이 움켜쥔 부분을 시작으로 사슬 전체로 퍼져 나갔다. 금빛 사슬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헬라르가 지글거리는 열기에 움찔하는 것이 생생히 전해졌다. 리즈벨의 요정이 사슬에 후욱 숨을 불어넣었다.
리즈벨이 끌어 올린 열이 금세 불꽃처럼 사슬 위를 내달렸다.
“아……!”
[잘 버텨, 리즈벨.]사슬이 옥죄고 있는 몸의 모든 부분이 인두에 지져지고 있는 듯했다. 요정이 그녀의 몸에 옅은 막을 덧씌워 주지 않았다면 살갗이 시커멓게 타 버렸을 것이다.
반면 냉기로 무장하고 있던 여신의 존재는 점차 열기에 물들어갔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헬라르가 즉각 성력을 끌어 올렸다. 차가운 힘은 종속의 사슬을 타고 그대로 리즈벨에게로 흘러들어 왔다. 금빛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헬라르의 기운이 스며들수록, 온 우주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무한히 넓은 별들의 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심해, 든든하게 몸을 받치는 땅.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형체 없는 절대자의 힘.
리즈벨은 간신히 눈을 떠 사슬이 칭칭 얽힌 제 두 손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은빛에 가까울 만큼 밝은 헬라르의 권능이 손 위에서 흘러넘쳤다. 그것은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급박한 흐름을 그려 내듯 이리저리 휘날렸다.
[이런 얕은 수로 네가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네가 죽지 않는 한 이 종속은 풀리지 않아.]헬라르가 비웃으며 그녀의 힘을 더 크게 개방할수록 리즈벨의 몸이 권능으로 가득 채워졌다.
리즈벨은 화끈한 열기를 참으며 가만히 기다렸다. 의식만은 주지 않고, 헬라르의 모든 힘이 그녀 안에 고스란히 담길 때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빠져나갈 생각 없어.”
리즈벨은 펼쳤던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듯 주먹 쥐었다. 헬라르의 권능이 넘쳐흐르던 굵직한 종속의 사슬이 두 손 가득 잡혔다. 이번에는 리즈벨에게서 새된 웃음이 터졌다.
“난 널 내 안에 가둘 거야.”
리즈벨은 사슬을 움켜쥐고 그대로 홱, 제 쪽으로 당겼다.
헬라르의 존재감이 그녀 쪽으로 쏠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종속이 뒤집혔다.
[무슨……!]리즈벨의 몸에 둘려 있던 금빛 사슬이 점차 힘을 잃고 가늘어졌다. 반대로 헬라르를 묶은 사슬은 순식간에 굵고 단단해졌다.
[무슨 짓이야!]리즈벨을 억누르던 존재감이 깃털보다 못할 만큼 가벼워졌다. 성공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야 숨이 탁 트였다.
“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힘이 온몸의 세포를 채우고 있었다. 그녀에게 완벽히 흡수된, 헬라르의 성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