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7
17화
그들 사이에 또다시 선이 그어졌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기울이면 그대로 입술이 맞닿을 거리였다. 손을 뻗기만 하면 저 약하디약한 몸을 짓누르는 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굳건한 벽이 세워졌다.
마음의 벽 따위가 아니었다. 넘실거리는 금빛 성력이 그와 그녀 사이의 바닥을 홱 긁고 지나갔다. 선명한 금빛 경계가 위협적으로 번쩍거렸다.
“간섭이 과해. 알지?”
리즈벨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이제 아시어스는 그녀가 짓는 웃음이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벽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반항은 그가 내도록 그려 온 청사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히 이어지는 말투도 곱지 못했다.
“간섭이라. 대체할 다른 좋은 단어도 있을 텐데. 걱정이라던가. 염려라던가.”
“아니잖아.”
리즈벨이 딱 잘라 단언했다.
“넌 그냥 내가 흥미로울 뿐이겠지. 밟힌 지렁이 같은 게 살아 보겠다고 꿈틀거리는 게 신기하던가.”
속을 꿰뚫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멋대로 까발린 제 속내가 썩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원색적인 표현이라 그런가. 그것보다는 더 순수한 호기심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웃기지 않나. 포장지를 벗겨 보면 본질은 같았다. 아시어스는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참견 말고 관전이나 해라?”
“정확해.”
속에서 무언가가 거칠게 일렁이다 차갑게 얼어붙었다. 상냥함을 가장하고 있던 눈매가 사납게 휘어졌다.
아, 그래. 똑똑한 여자.
그가 자신의 구원자 따위가 아니라는 걸 너무나 명확하게 꿰뚫어 본 모양이었다. 다정한 겉껍데기에는 속지 않는다는 걸까.
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사랑놀음 따위 할 생각도 없었고, 한때는 만나자마자 죽여 버리자고까지 생각했던 여자였다. 선을 그으면 어떻고 차갑게 내치면 또 어떤가. 동요할 필요 없다. 상처받는 것도 웃긴다.
리즈벨은 여전히 똑바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눈이 조용히 답을 종용했다.
“……그래요.”
아시어스는 비딱하게 웃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좋아.”
리즈벨의 얼굴에 흡족한 빛이 떠올랐다.
“이다음에는 나를 방해하지 마. 알겠지?”
나직한 명령과 함께 그녀의 손이 아시어스의 턱에서 떨어졌다. 아름다운 얼굴이 도로 정면으로 돌아갔다.
아시어스는 살짝 헝클어진 금발을 보며 이죽거렸다.
“그래서, 오라비를 정말 죽이시려고?”
리즈벨은 잠시 침묵했다.
아시어스가 그녀를 막은 뒤 로제스가 없는 이 어두컴컴한 굴로 장소가 바뀌자, 그제야 본능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이성적인 사고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딘 칼등.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살기.
리즈벨은 로제스 발디마르가 어떤 살기를 뿜어낼 수 있는 자인지 잘 알았다. 그의 검에는 항상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의 모든 형제가 그렇듯.
그러니 로제스가 그녀를 죽이려는 걸 망설인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깊게 누른대도 절대 베이지 않을 무딘 칼등. 그것은 애초에 그녀를 죽일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게 아닌가.
‘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자 리즈벨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왜? 왜 로제스는 그녀를 보자마자 죽이지 않았나? 왜 그런 말들을 했나?
“…….”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걸 여전히 머리로는 알았다.
로제스가 그녀를 죽일 마음이 없다면 리즈벨에게 그것은 곧 기회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빠르고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친남매입니까?”
“……아니.”
리즈벨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아시어스는 다시 물었다.
“그자를 죽일 생각인가요?”
“기회만 온다면.”
“그는 아가씨를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던데. 그래도?”
“글쎄, 그건 모르지. 로제스 오라버니가 정말 나를 죽이지 않을지는.”
“알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
“마법사. 그건 안 중요해.”
리즈벨은 가까스로 내뱉었다.
사실 로제스가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지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남는 건 한 명이다. 로제스와 리즈벨 사이에 존재하는 유의미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형제끼리 공유하는 처절한 생존욕뿐이리라.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
“달라지는 건…….”
리즈벨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심장 한쪽 끝이 이상할 정도로 따끔하게 아파져 왔다.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없을 거야. 없을 거야. 그 말은 곧 살고 싶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았다.
“내가, 살 거야.”
누가 누구 손에 죽든, 사라지는 건 두 명이다. 한번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는 빠르게 확률을 계산했다.
로제스가 그녀를 죽일 수 없다면, 그는 지칼을 먼저 노릴 것이다. 로제스가 지칼을 죽여 준다면…….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상황이다. 최종 승자는 리즈벨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칼이 로제스를 죽인다면. 그렇게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저 마법사가 지칼의 세력을 피해서 그녀가 지칼의 심장에 칼을 꽂을 때까지 그녀를 잘 지켜 낼 수 있을 것인가?
리즈벨은 흘끗 다시 아시어스를 돌아보았다가,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 나를 믿지 않는 건 좋은데.”
무심한 색채의 눈동자가 냉랭하게 식어 있었다. 리즈벨이 지금껏 보았던 아시어스의 얼굴 중 가장 날 서린 얼굴이었다.
아시어스가 조용히 일갈했다.
“나를 무시하지는 말아요. 굳이 우리의 그 잘난 거래 때문이 아니더라도…….”
리즈벨의 몸이 뒤로 끌려갔다. 아시어스는 그녀를 품 안에 넣고 작은 머리통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더없이 차갑고 다정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접촉이었다. 사실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너를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거든.”
“…….”
“어떻게 찾았는데…….”
리즈벨은 그의 마지막 말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 *
본성 입구 앞에서 벌어진 소동은 금세 왕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2왕자가 돌아온 5왕녀를 죽이려 시도했으나 정체 모를 검은 머리의 남자가 나타나 2왕자를 제압하고 왕녀와 함께 사라졌다더라. 그 목격담은 사용인들과 기사들, 병사들의 입을 타고 전해져 지칼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년이 돌아왔다고?”
“예.”
“돌아온 것뿐만이 아니라 웬 남자를 끌고 들어왔다, 라.”
“예, 검은 머리에…… 눈동자 색은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했다. 왕녀와 함께 나타난 의문의 남자에 관한 이야기의 주를 이루는 것은, 조각 같은 그 외형과 더불어 그가 나타나며 일대에 퍼진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지칼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뒤로 동쪽 탑에 아무도 침입할 수가 없다는 말이냐?”
“예, 이상하게도…….”
“금색 빛이 보이지는 않았나?”
“빛 말씀입니까?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만.”
지칼은 그 소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에 곧바로 병사를 보내 왕성을 뒤졌다. 그러나 5왕녀의 방이 있는 동쪽 탑은 누구도 침입할 수가 없게 막혀 있었다. 분명 멀리서 보면 문이며 창문이 전부 있는데,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대체 입구가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무슨 술수를 부리는 거지.”
지칼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막 성의 서쪽 탑 아래, 2왕자 로제스의 처소에 들어온 참이었다. 바로 어젯밤 그의 병사들이 가장 먼저 기습했던 곳이다,
물론 로제스는 그곳에 없었다. 그러나 지칼이 다시 이 방을 찾은 이유는 아우를 다시 만나기 위함은 아니었다.
“2왕자가 그년에게 칼을 겨누었나?”
“예, 분명 그리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 없다’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건가. 지칼은 병사의 보고를 들으며 신경질적으로 탁자 위에 굴러다니는 것을 손으로 쓸어버렸다.
쨍그랑-.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이 조각났다. 꽃 한 송이 꽂혀 있지 않은 빈 유리 화병이 깨어지며 속에 들었던 말라비틀어진 부스러기 몇 점이 튀어나왔다. 지칼의 가죽신이 그 파편들을 무참히 짓밟고 지나갔다.
드륵.
드륵.
책상의 서랍들. 옷장 안. 사람이 누운 흔적도 없이 반듯하게 정돈된 침대. 지칼은 손이 닿는 모든 곳을 뒤집어엎었다.
사실 그리 의미 있는 짓은 아니었다. 딱히 찾으려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 습관적으로 나오는 행동들일 뿐이었다.
리즈벨 발디마르가 돌아왔다. 닷새 동안 수도를 이 잡듯 뒤졌는데도 간데없더니 갑작스럽게 왕성으로 기어들어 왔다. 곁에 듣도 보도 못한 힘을 지닌 사내를 낀 채로.
“망할. 로제스, 그 새끼 하나만으로도 성가셔 죽겠는데.”
리즈벨 그것이 숨기고 있는 그 희한한 힘도 기분 더럽게 찜찜한데, 그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미친년의 보호자를 자처한 정신 나간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닐 것이다.
로제스는 재수 없긴 해도 그가 인정할 정도로는 강한 전사다. 그를 단번에 제압했다면…….
지칼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팽팽한 삼자 구도가 구축된 셈이다. 이런 구도는 지칼의 계획에는 없었다.
그럼 누구를 먼저 죽여야 하는가. 로제스냐, 리즈벨이냐.
“그 미친 것이 로제스에게 칼을 겨누었다고…….”
지칼은 낮게 중얼거리며 탁자의 마지막 서랍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마지막 서랍 안에는 붕대와 자잘한 상처를 치료하는 데 쓰는 잡다한 것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제 목숨 아까운 줄 이제야 안 모양-.”
지칼의 혼잣말은 중간에서 뚝 끊겨 나갔다. 서랍을 막 밀어 닫으려던 동작이 멈추었다.
“…….”
지칼은 천천히 서랍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가장 구석에서 굴러다니고 있던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작고 납작한 푸른색 통 두어개. 작은 타박상이나 상처에 바르는 연고였다.
다음 순간 뇌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리즈벨이 왕성 무도회의 홀에서 춤을 추던 날, 그 애 방의 탁자 위에서 발견했던 물건이었다. 이것과 꼭 같이 생긴 연고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