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73
1화
* * *
아시어스 뤼켄에게는 근 몇 년간 생긴 새로운 취미가 있다. 바로 연인과 함께 휴가를 보낼 여행지를 물색하는 일이었다.
사실 휴가라기보다는 나들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모른다.
아시어스와 리즈벨은 거의 매주 주말마다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왜 하필 주말이었느냐 하면, 2년 전부터 리즈벨이 다니기 시작한 아카데미가 그녀의 평일을 전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스피타 나사즈, 약칭 바사즈. 몹시 극악한 커리큘럼을 자랑하는 그 명문 아카데미는 심지어 방학에도 심화 강좌를 열었다. 성실한 우등생인 데다 조기 졸업을 목표로 하는 리즈벨은 당연히 여름과 겨울 방학에도 평일 내내 아카데미에 다녔다.
처음 리즈벨이 아카데미를 다니기 시작할 때, 그 문제로 한 번 대판 싸운 적이 있다.
“방학에도 공부할 거라고요? 그럼 우리 휴가는?”
“놀러 갈 시간이 어디 있어. 얼른 졸업하기도 바쁜걸.”
“졸업하면 또 바로 황립 장서관 시험 볼 거잖아요. 그러면 또 매일 일하러 갈 거고.”
“그렇겠지, 아마도?”
“그럼 나는 버려지는 건가?”
“무슨 소리야. 우리 같이 살고 있어. 매일 보고 있고.”
“겨우 얼굴 보고 저녁만 같이 먹는 것뿐이잖아요.”
“그리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지. 마음에 안 들어?”
“네.”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제냐고?
그걸로는 충분치 않은 게 문제다.
아시어스는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그녀가 부족했다.
고개를 들면 리즈벨이 보여야 하고, 이름을 부르면 다정하게 대답해오는 목소리가 있어야 하고, 두 팔을 벌리면 나비처럼 품으로 날아드는 그녀가 필요했다.
그러나 리즈벨은 딱히 그렇진 않아 보였다.
그녀는 학업과 사랑을 정확히 반반의 비율로 균형 맞춘 일상에 꽤나 만족해했다. 그것이 아시어스를 무척이나 불행하게 만들었다.
반반이라니. 내가 리즈벨의 삶의 절반밖에 차지하지 못한다니. 9대 1이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나 아카데미가 가고 싶다는 리즈벨의 말에 덥석 바사즈를 소개해준 멍청한 새끼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므로, 아시어스는 늘 속으로만 이를 갈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뒷전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고. 당신 시간은 전부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까지 해 놓고서.’
리즈벨이 아카데미에 가고 없는 평일 낮 시간을 홀로 보낼 때면 왈칵 서러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럴 거면 아카데미로 안 보냈지.’
물론 때늦은 변명이었고, 리즈벨에게는 씨알도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들은 연인이었고, 식만 올리지 않았다 뿐이지 한 지붕 아래 같은 공간에서 몇 년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그 덕에 리즈벨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시어스가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것을 안 그녀는 결국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면 주말마다 놀러 갈래? 아시어스.”
“…주말마다?”
“응. 우리 매주 주말마다 여행 가자.”
매주 주말을 다 합치면 일수로는 대충 방학 기간과 맞먹지 않을까? 그런 계산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어차피 이동 시간은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고, 가고자 하는 곳은 대륙 어디든 갈 수 있다. 감히 막아설 이도 없고.
아시어스는 잠깐 수지타산을 재어 보다, 그것이 꽤 좋은 대안임을 인정했다.
“좋아요. 대신 여행지는 내가 정하는 걸로. 그리고 휴가 동안에는 아카데미나 과제 이야기는 일절 금지예요.”
“그래, 뭐.”
리즈벨이 가볍게 수긍하는 것으로 합의가 끝났다.
적어도 일주일에 이틀, 삶 전체로 보면 인생의 30퍼센트 정도는 오롯이 아시어스의 차지가 되었다. 그 외에도 평일에 함께 보내는 저녁과 밤 시간까지 다 합치면 얼추 반 이상은 될 것이다.
“별 괴상한 계산법도 다 있네.”
라제가 대놓고 혀를 찼지만, 아시어스는 나름대로 만족했다.
여전히 10 중에 6 정도의 지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이상 그녀의 시간을 독차지하는 건 욕심임을 사실은 그도 잘 안다.
리즈벨의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넓어져 갔고, 그녀는 그 속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실은 그것만으로도 잠깐의 외로움 정도는 어떻게든 참아졌다.
그래도 이왕 투쟁 끝에 소중한 주말을 얻었으니, 헛되이 날리는 일 없이 가장 완벽하고 밀도 있게 보내야지.
주말의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아시어스의 남은 5일은 전과는 비할 바 없이 행복해졌다.
* * *
여느 때처럼 휴가를 위해 라타에를 떠날 준비를 하던 금요일이었다.
마침 남부로 내려와 있던 라나크가 그들의 저택을 방문했다.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엘제니아까지 들이닥치는 바람에 빈 별장이 금세 북적거렸다.
아시어스는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급작스런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아직 리즈벨이 돌아오지 않은 시간이라 망정이지, 그녀와 함께 있었다면 아무리 형제들이라도 문도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주에는 어디를 간다고?”
“브리엔 군도. 리즈벨이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해서. 작은 무인도를 하나 사서 별장을 지어 놨어요.”
“무인도? 바다 보러 가는데 뭘 굳이 그렇게까지….”
“언제 한 번 인어가 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거든요.”
브리엔 군도는 대륙에서 몇 안 되는 인어의 서식지였다. 운이 좋으면 갯바위에서 꼬리를 말리는 어인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너를 누가 말려.”
라나크는 그만 고개를 젓고 말았다. 막냇동생이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휴가에 진심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철저히 준비할 줄은 몰랐다.
라나크는 혀를 끌끌 차다 말고, 문득 생각난 의문을 입 밖에 냈다.
“그런데 너희 가족계획은 아직도 없어?”
“뭐?”
“아이 말이야. 생각 없냐고.”
아시어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형을 돌아보았다.
라나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딱히 강요하려는 건 아니고. 어머니 아버지도 은근히 궁금한 눈치이시길래 대신 물어보는 거야. 그렇게 한시도 떨어지는 걸 싫어하니 웬만하면 소식이 있을 법도 하지 않나 싶어서. 괜한 질문이었으면 미안하다.”
“아니, 뭐. 딱히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흥미롭게 지켜보던 엘제니아가 한 마디 얹었다.
“의외로 털끝 하나 못 건드리는 거 아냐? 좀 애지중지해야지.”
“…누가, 내가? 리즈벨을?”
“그건 또 아냐?”
아시어스는 기가 차 실소했다.
이건 또 처음 들어보는 말이네.
그는 딱 잘라 못을 박았다.
“전혀 별개야, 누나.”
“그럼 왜? 딱히 생각이 없어?”
“생각해본 적이 없어.”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막내를 보는 라나크와 엘제니아의 눈이 동시에 가늘어졌다.
먼저 납득한 쪽은 엘제니아였다.
“너희는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오죽 죽고 못 살아야지.”
“하기야…. 뭐, 너희 둘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따라 고개를 주억거린 라나크가 지나가는 어조로 덧붙였다.
“그래도 조심은 해, 아시어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덜컥 아이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 * *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리즈벨.”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난간을 타고 넘어왔다.
짙푸른 밤바다가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발코니는 두 사람분의 뜨거운 호흡과 띄엄띄엄 이어지는 대화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분이 오실 줄 알았으면 일찍 돌아갈 걸, 아쉽다….”
“다음에 만나러 가면 되죠. 형 생일 때.”
발코니의 난간 위에 주먹만 한 빛의 구가 여러 개 떠올랐다. 아시어스의 마법이었다.
은은하게 빛을 흩뿌리는 그것들은 하늘의 달을 작게 축소시켜 놓은 것만 같다.
난간에 등을 기댄 리즈벨은 빛에 흠뻑 젖어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벗어던졌다.
리즈벨의 머리칼을 고정하고 있던 핀까지 풀어 내린 아시어스가 작게 키들거렸다.
“그나저나, 형이랑 누난 내가 아직도 마냥 어린애 같나 봐. 그렇게 대책 없을 줄 아나.”
“아니야?”
“아니죠. 그래도 도합 120년을 넘게 살았는데. 밤을 보낼 때 뭘 조심해야 하는지는 알아요.”
“너 내가 처음이잖아.”
“이론이란 게 괜히 있나.”
톡 대꾸한 아시어스가 스스럼없이 그녀의 앞에 몸을 낮췄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아시어스가 리즈벨의 종아리에 쪽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감촉에 그녀가 따라 키득거렸다.
그 웃음소리가 허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시어스의 입술이 그녀의 살결을 훑으며 올라갔다.
그는 하얗고 동그란 무릎에 키스한 다음 허벅지 안쪽에 촘촘히 자국을 만들어 나갔다. 투명하리만큼 흰 피부와 붉은 낙인의 조화는 늘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체취를 흠뻑 빨아들인 아시어스가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털끝 하나 못 건드리는 거 아니냐니. 아무리 생각해도 취급이 좀 너무한 것 같아.”
“걱정하시는 거지, 뭐.”
“뭘 걱정해요. 내 정력을?”
리즈벨의 대꾸에 아시어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그 뜻이 아니라고 해명하려다가, 예고 없이 닥친 자극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시어스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깊이 입술을 묻은 것이다.
특별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