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77
5화
잠시 할 말을 잃고 아기를 내려다보던 유레인이 천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기를 깨끗한 천으로 잘 감싸 안은 다음, 그녀의 막내들에게로 다가갔다.
“인사해야지, 아시어스. 리즈벨.”
맥없이 늘어진 리즈벨과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 아시어스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레인은 한숨짓듯 웃으며 아기를 리즈벨의에게 안겨 주었다.
리즈벨은 얼결에 작고 따듯한 생명체를 품에 안게 되었다. 세상이 떠나가라 울던 아기는 놀랍게도 그녀의 체온이 닿자마자 울음을 그쳤다.
리즈벨은 생경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네가 나랑 열 달이나 같이 보낸 아이구나.”
반면 아시어스는 섣불리 아기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그의 팔뚝 길이보다도 훨씬 작은 것 같았다.
아시어스는 손바닥만 한 인형 손이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은 조그만 손을 보고는 더욱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리즈벨이 작게 속삭였다.
“너도 안아 봐, 아시어스.”
“나는, 좀….”
혹시 잘못 만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 불안감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이었다.
어딘가에서 휙 치솟은 푸른 마력이 아시어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곤 그대로 끌어당겼다.
리즈벨은 물론이고 아시어스의 눈까지 크게 뜨였다. 그의 손이 얹힌 곳은 주먹만 한 아이의 머리였다.
잠시의 당혹스러운 침묵이 흐른 끝에, 아시어스가 기가 찬 실소를 흘렸다.
“아하, 쓰다듬으라 이거야?”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기의 조그만 손가락 사이사이 푸른 마력 줄기가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리즈벨이 얼떨떨하게 아시어스와 유레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유레인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 집안 막내들은 대대로 뭐가 있나 보구나. 새로운 아이도 여러모로 범상치 않겠어.”
“제 앤데요, 그럼.”
언제 불안해하고 쭈뼛거렸냐는 듯, 아시어스가 아기를 살며시 들어 안았다. 조카를 여러 번 안아 봤던지라 리즈벨보다는 폼이 덜 어색했다.
“마법에 천천히 적응하게 두는 게 좋다니. 완전히 틀리셨네요, 어머니.”
“그래. 내가 오판을 했다. 당연히 너를 닮을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 하는데.”
“뭐, 저도 이렇게까지는 예상 못 한 일이라.”
아시어스가 키들거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주위로 붉고 푸르며 녹 빛을 띄고 검은색으로 변한 색색의 마력이 느리게 휘돌기 시작했다. 그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아기의 손가락에 얽힌 마력이 살랑거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가만히 아이가 가지고 태어난 마력의 농도를 측정하던 아시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세상이 아주 답이 없어지진 않으려나 봐요, 리즈벨.”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만면에 차츰 나른한 만족감이 어리는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얼핏 매혹적이기까지 한 미소를 흘리며,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드디어 찾았네, 나만 한 천재.”
글쎄, 과연 그것뿐일까.
리즈벨은 멍하니 꼬물거리는 아기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아이는 비단 아시어스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주위의 시간선이 파도에 흔들리듯 일렁거리고 있었다.
리즈벨은 아기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제 몸에 얽힌 시간의 실을 건드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성녀의 권능은 여전히 오롯이 리즈벨만의 것이었지만, 그녀만이 인지할 수 있는 시간 선의 세계를 똑같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한 명 더 나타났다. 그 거대한 실타래의 세계는 그녀가 아시어스와 공유할 수 없었던 유일한 것이었다.
리즈벨의 입가가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선물. 아시어스를 위한, 그리고 그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선물.
아,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부터 알게 되겠구나.
그런 예감이 들었다. 뻗어진 손이 아직 붉은 열이 오른 아기의 뺨을 어루만졌다.
곧 달콤한 인사가 건네졌다.
“안녕, 새 친구.”
잘 지내보자, 루.
리즈벨은 그들의 새 가족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이가 꼭 그녀의 인사를 알아들은 것처럼 작게 울었다.
루시안 뤼켄.
코스모스가 만발한 가을의 한중턱에서 태어난 그들의 아이는, 꼭 여자아이처럼 예쁘장한 아들이었다.
* * *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로제스였다.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수 있겠냐는 누이의 부탁에, 로제스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을 내어 놓았었다.
루시안. 그들 남매의 어머니가 리즈벨을 임신했을 때, 딸이면 리즈벨, 아들이면 루시안이라고 부를 거라며 이야기해 주던 것을 떠올린 덕분이다.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외삼촌이라서인지, 루시안은 유독 로제스 앞에서만 순한 양이 되곤 했다.
“루, 외삼촌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알겠지?”
뿌우. 루시안이 뾰루퉁하게 양 뺨을 부풀렸다.
리즈벨은 짐짓 엄격하게 못을 박았다.
“시간 선의 금기 안 잊었지? 일주일 뒤에 네 실을 붙잡고 다시 돌아오는 거야. 일주일 동안 마법은 절대 금지. 알지?”
푸우우. 오리 입을 한 루시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리즈벨은 일 년에 두 번 로제스를 찾아갈 때 늘 아들을 데려가곤 했다. 그녀처럼 시간 선의 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루시안은 어느 시간선에서든 그곳이 본래 제 자리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세계가 아이를 이물질이나 불청객으로 간주하지 않으니, 다른 시간선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 자체는 리즈벨보다 훨씬 길었다.
그래서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리즈벨은 일 년에 두 번, 일주일가량 로제스에게 루시안을 맡겼다.
오라버니에게 조카를 보여주려는 의도도 물론 있지만 실은 본 목적이 따로 있다.
“루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맘껏 혼내 줘, 오라버니. 우리 중에선 걜 다그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 ‘우리’에는 리즈벨과 아시어스는 물론이고 뤼켄 가 식구들까지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루시안 뤼켄에게 쓴소리를 가리지 않을 사람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저 생글생글 웃는 예쁜 꼬마를 앞에 두면 말이다.
아무리 비정한 심장을 가진 이라도 저 애 앞에서 미소를 감추지는 못할 것이다. 백 번 살아난대도 백 번 다 처단해 마땅할 폭군 루시페도 저 아이만큼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까?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로제스는 조카에게 손짓했다.
“루.”
발디마르의 왕성 성벽을 이리저리 들쑤시던 루시안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네에!”
“이리 와라. 점심 먹을 시간이야.”
“네에에!”
대답은 정말 야무지게 잘 한다. 로제스는 성벽에서 폴짝 뛰어내려 이쪽으로 총총총 달려온 조카를 번쩍 안아들었다.
오늘 그의 시간선으로 건너온 다섯 살짜리 조카는 검은 고수머리를 앙증맞게 양 갈래로 묶었다.
큰 눈망울이 깜빡일 때마다 인형 같은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누구들 자식 아니랄까 봐, 아이는 인간 세계를 탐방하러 내려온 아기 천사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다만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천사기는 한데 날개 한 쪽이 새카맣다는 것 정도.
“루, 손 펼쳐 봐라.”
“으으응.”
입을 합 다문 루시안이 싫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럴 때는 감정을 얼굴로 표출하는 데 서툰 로제스의 성정이 무척이나 유용했다.
“루시안 뤼켄.”
무뚝뚝한 음성으로 애칭이 아닌 풀네임을 부르자, 루시안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내가 직접 펼쳐 줘야 하나?”
로제스의 서늘한 눈매와 고저 없는 음성, 단호하기까지 한 말투의 조합은 루시안이 당장 꼬리를 내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이가 우물쭈물 작은 양손을 펼쳐 보였다. 아직 다 갈무리되지 못한 마법진이 손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로제스가 미간을 좁히자, 루시안이 눈을 도로록 굴려 그의 눈치를 보았다.
“리즈벨이 이곳에서는 마법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을 텐데?”
“그랬어요….”
“그런데 왜 어머니 말을 안 듣지?”
루시안이 대답 대신 입술을 앙다물었다. 답할 말이 없을 때 보이는 습관이다.
“거짓말은 나쁜 거다, 루. 약속을 어기는 건 더 나쁜 거고. 입 밖으로 나가는 모든 말에는 무게가 생기는 법이야.”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했는데….”
“누가?”
“아빠가요!”
대답이 한없이 해맑다.
로제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숨지었다. 다섯 살짜리에게 자꾸 예외부터 가르치면 어쩌자는 건지.
그런데 사실 제 누이라고 썩 다를 것 같진 않았다. 리즈벨이 지금이야 얌전히 역사 공부에 매진하며 지낸다곤 해도, 그녀의 한때는 왕위 계승을 위한 살육전을 치렀던 발디마르의 왕녀였다.
광녀 행세를 10년이나 한 전적까지 있어 그런지 아무래도 사고방식이 범인과는 달랐다.
“갖고 싶은 건 가져야지, 루. 대신 네 손으로. 남이 주는 게 뭐 필요가 있어, 네가?”
루시안과 키득거리며 그런 대화나 나누는 애다.
그래서 지나치게 비범한 이 아이는 이 정도 천재성쯤은 몹시 당연하게 여기는 성녀와 마탑주 사이에서 더더욱 유별나게 자라나는 중이었다.
갖고 태어난 마력의 절대량이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아시어스 뤼켄과 비등한데다, 마법은 호흡과 같고 마력을 열 갈래 스무 갈래로 나눠 동시에 뜨개질하듯 엮어내는 건 사소한 취미에 불과하다.
심지어는 리즈벨의 권능을 일부나마 물려받아 절대의 영역인 시간선을 마음대로 넘어 다니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히도, 리즈벨은 루시안에게 적절한 브레이크를 걸어 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는 하는 모양이었다.
“책에서 봤는데, 천재는 교만에 빠지기 쉽대.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살아남질 못할 텐데 왜 그런 걱정을 하고 사나 싶지만, 현명한 사람들이 입 모아 말하는덴 이유가 있겠지.”
그래서 이곳으로 아들을 보낼 때 그녀는 늘 루시안과 협상을 했다. 마법을 쓰지 않고 외삼촌과 잘 놀다 오면 마탑에 있는 아시어스의 창고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물론 아시어스는 루시안이 조르면 길게 생각하지 않고 창고 문을 벌컥벌컥 열어주곤 했으므로, 애초부터 조건이 잘못된 협상이었다.
리즈벨과 아시어스의 훈육은 늘 서로 앞뒤가 맞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결국 루시안을 훈육하는 건 늘 로제스의 몫이었다.
“히잉, 죄송해요, 외삼촌….”
하지만 역시, 이렇게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훌쩍거리는 아이를 다그치는 역할만 하기에는 억울한 감이 있다.
특히 리즈벨과, 그리고 로제스 그 자신과도 꼭 닮은 푸른 눈을 보기만 하면 다짐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건 순간이었다.
“그래.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기로 약속하렴.”
“네! 약속!”
훈육은 내년에 또 하면 되니까….
그렇게 루시안의 다섯 살의 봄도 평화롭게 흘러갔다.
특별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