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79
1화
외전 1. 뤼켄가의 결혼식
볕이 좋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파랗고 청명했으며, 이따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을 훅 날려 보냈다. 흰 천이 크게 펄럭이며 긴 테이블 위에 덮였다. 사용인들이 먹음직스럽게 장식된 다과들을 쉴 새 없이 테이블 위로 옮겼다.
와인과 위스키, 브랜디 등 각종 술도 바스켓에 담겨 테이블 한쪽에 놓였다. 색색의 계절 꽃들이 테이블과 의자를 장식했다. 파릇한 잔디 위에는 오늘의 주인공들을 위한 새하얀 카펫이 깔렸다.
준비는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러나 유레인은 연신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포크와 나이프 짝이 안 맞잖니, 제시. 촛대는 또 왜 이렇게 지저분하고…….”
그녀가 아주 작은 검댕이 묻은 은촛대를 어루만지자 손톱만 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촛대는 곧바로 새것처럼 반짝이는 은빛으로 돌아왔다.
“서둘러야겠는걸. 이러다가 시간 내로 준비를 못 끝마치겠어.”
“뭐 어때요, 어머니. 어차피 다 아는 얼굴들이 오는 걸 텐데.”
정성스럽게 세팅해 놓은 테이블에 걸터앉은 아들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유레인은 눈을 크게 뜨고 막내를 다그쳤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시어스! 평생에 한 번뿐인 날인걸.”
“처음부터 소소하게 치르기로 한 거잖아요.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은데.”
아시어스는 따분하게 대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작게 하품까지 했다. 요 며칠 늦게까지 깨어 있었던 여파가 한꺼번에 닥쳐오는 중이었다.
유레인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방울을 슥 닦아 내는 아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아이 중 가장 제멋대로인 막내를 다루는 법은 하나였다.
“아시어스. 너 그러다가 나중에 사랑 못 받는다.”
아시어스는 목을 답답하게 죈 단추를 하나 풀어내다 말고 멈칫했다.
“어머니. 괜한 말 마세요.”
“미안하지만 더없이 진심이야. 그렇게 세심한 부분에 죄 무심하다간 오래지 않아 소박맞을 거란다.”
아시어스는 그제야 마지못해 정원에 마련된 식장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완벽했다. 꽃 장식에서부터 테이블과 의자, 준비된 음식들까지. 대체 어디가 부족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설령 부족하다고 한들 무슨 상관인가.
아시어스는 유레인의 성화에 못 이겨 화단에 물을 주며 부루퉁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내 결혼식도 아닌데.’
오늘은 뤼켄의 가주이자 뤼켄 공작, 라나크의 결혼식이었다.
* * *
“이건 어때요? 리시안셔스. 은은하고 예쁜걸요.”
“리시안셔스는 잎이 여려서 메인으로는 조금 부족해. 차라리 이 붉은 다알리아는 어때? 화려하게.”
엘제니아가 흰 드레스에 꽃을 이리저리 대어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닌가, 드레스가 얌전하니 은은한 쪽이 더 나은가……? 그러게, 로이. 드레스를 좀 더 파격적인 것으로 하자고 했잖아.”
“공작께서 쇄골 밑으로는 절대 살이 드러나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고 가셨잖아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라나크의 신부, 로즈레아가 곤란한 듯 웃었다. 엘제니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튼, 나이 먹어서는 막내한테 이상한 것만 배웠지. 우리 집 남자들은 다 왜들 그러나 몰라.”
얌전히 소파에 앉아 그들의 공방을 구경하던 이가 흠칫 반응했다. 엘제니아는 씩 웃으며 돌아섰다. 양손에 리시안셔스와 다알리아를 한 송이씩 든 채였다.
“네가 골라 볼래?”
리즈벨은 제 앞으로 불쑥 내밀어진 두 개의 꽃송이에 적잖이 당황했다. 엘제니아가 장난스럽게 그녀를 재촉했다.
“일 대 일이야, 리즈. 네 선택에 신부의 머리를 장식할 꽃이 달렸어.”
“하지만 로이가 고르는 게…… 오늘의 주인공이잖아요.”
“나는 리즈벨이 고르는 것으로 하고 싶어.”
소매와 끝단이 섬세한 레이스로 짜인 하얀 드레스를 입은 로즈레아가 리즈벨의 옆에 앉았다.
“네가 골라 줄래?”
“어…….”
푸른 눈이 황급히 움직였다. 꽃잎 낱장을 하나하나 파헤칠 기세로 고심하는 모습에 엘제니아와 로즈레아는 몰래 눈을 맞추며 웃었다.
리즈벨은 사소한 부분에서 한없이 진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함께 갈 여행지를 고른다거나, 지금처럼 결혼식에 쓸 꽃을 고른다거나 하는 작은 일에도 심각하게 집중하는 모습이 언니들의 눈에는 한없이 귀엽기만 했다. 예쁜 아이가 예쁜 것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걸 보면 눈이 즐거워지는 건 덤이었다.
“저는…… 이 꽃이 좋은 것 같아요.”
리즈벨은 장장 몇 분에 달하는 고민 끝에 겨우 꽃을 골랐다. 붉고 화려한 꽃송이의 다알리아였다. 엘제니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리시안셔스가 더 리즈 취향일 줄 알았는데. 왜 다알리아를 골랐어?”
“꽃말이 더 마음에 들어서요.”
리즈벨이 맑게 웃었다. 붉은색 다알리아의 꽃말. 당신의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그 누구보다 더 아름답고 또 행복해 보여요, 로이.”
이렇게 하늘이 맑고 바람이 좋은 날,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신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리즈벨은 다알리아에 작고 하얀 은방울꽃 몇 개를 엮어 금세 화관을 만들었다. 어린 시절 하릴없이 꽃이나 꺾어 화관을 엮던 습관이 남아 그런지, 완성된 화관은 엘제니아가 마법으로 만들어 내는 것 못지않게 예뻤다.
리즈벨은 그것을 로즈레아의 머리에 씌워 주며 말했다.
“가주님께도 작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요? 결혼식에 꼭 어울리는 고백이나 다름없잖아요.”
“응…….”
“이미 많이 말했지만, 또 할게요. 결혼 축하해요, 로이.”
애정 어린 축하에 로즈레아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공들인 화장이 흐트러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즈벨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 리즈.”
“별거 아닌데…….”
리즈벨은 겸연쩍게 웃었다. 로즈레아는 코맹맹이 소리로 종알거렸다.
“예뻐라. 엘제 언니. 나는 역시 이 애를 데리고 살고 싶어요. 마탑주님과 어떻게 합의를 볼 수 없을까?”
“아서라, 로이. 막내는 네가 상대할 만한 놈이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로즈레아는 뤼켄에서 제일 무서운 남자를 떠올리고는 울적하게 수긍했다. 엘제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리즈벨을 일으켰다. 리즈벨은 어리둥절해서 엘제니아가 떠미는 대로 거울 앞에 앉았다.
“우리 막내, 어렸을 때는 그보다 더 귀여울 수가 없었는데. 크면서 성격을 아주 다 버려 놨다니까.”
그런가? 리즈벨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긴, 아시어스가 어디 가서 성격 좋다는 말을 듣고 온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녀도 그가 말 잘 듣도록 길들이는 데 두어 달이나 걸리지 않았던가.
“막내가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란 말이지.”
리즈벨은 한창 아시어스의 반항기를 떠올리다, 이어지는 엘제니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엘제니아는 대답 대신 회심의 미소와 함께 빗으로 리즈벨의 금발을 빗어 내렸다. 엘제니아의 의중을 대번에 눈치챈 로즈레아가 화장대에서 붓과 화장품을 집어 들었다. 리즈벨은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고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엘제니아와 로즈레아에게는 최근 들어 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겼다. 아시어스가 심심한 날이면 늘 리즈벨을 데리고 의상실을 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부터 생긴 취미였는데, 바로 리즈벨과 함께 하는 인형 놀이였다.
“로이는 아까 스무 벌 입어 본 거 봤지? 리즈는 딱 열 벌만 입어 보자.”
물론 리즈벨은 인형 역할이었다.
“네에…….”
“좋아, 그럼. 이 연노란색 드레스부터 시작해 볼까?”
리즈벨은 어쩔 수 없이 웃어 보이며 앞으로 몇 시간은 풀려나지 못하리란 것을 예감했다.
* * *
솨아아아-. 허공에 둥둥 뜬 물뿌리개가 저절로 기울여지며 화단에 물을 뿌렸다. 파릇한 잔디와 봄꽃이 물을 머금고 햇빛을 반사해 한층 더 싱그럽게 피어났다. 구석의 텅 빈 텃밭에 푸른 마력이 휙 얽히자 금세 작은 수풀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시어스는 팔짱을 끼고 무심한 눈으로 화단을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다행히 그의 기다림은 오래지 않아 끝났다. 정원 바깥쪽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이가 밝게 조잘거리는 소리, 그에 맞추어 조곤조곤 대답해 주는 목소리. 잔디를 밟는 가벼운 발소리. 아시어스는 등 뒤로 다가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박사박. 발소리의 주인이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걸음을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조용히 그의 등 바로 뒤까지 다가온다. 아시어스는 웃음을 참으며 기다렸다.
“뭐 해?”
그리고 불쑥 그의 옆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에게 잽싸게 키스했다.
“어…….”
몰래 다가왔다가 도리어 입맞춤을 당한 리즈벨이 눈을 크게 떴다. 제 딴에는 그를 놀래주고 싶었는지, 리즈벨은 두 손으로 그를 밀려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진작 들켰다는 걸 깨달은 리즈벨이 손을 내리며 민망하게 웃었다.
“알고 있었구나.”
“그렇게 티 나게 다가오면 당연히 알죠, 아가씨.”
“티 났어?”
“응, 엄청.”
아시어스는 그녀의 하얀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애교스럽게 비볐다.
리즈벨 특유의 꽃과 풀이 뒤섞인 듯한 싱그러운 체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