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8
18화
지칼은 입매를 비틀었다.
“……하.”
지나친 망상인가?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사납게 이를 갈았다.
“로제스, 그 재수 없는 눈으로 잘도 그런 거짓을…….”
그러나 또다시 퍼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지칼의 푸른 눈에 번뜩이는 안광이 스쳤다.
로제스 발디마르는 막내 누이를 못 죽인다.
그 잘난 입으로 친남매라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어쩌니 지껄였지만, 실상 누이의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겠지. 발에 난 그딴 작은 상처조차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아주 다정한 오라비신데.
그렇다면 리즈벨, 그것을 잡으면 로제스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지칼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순서가 정해졌다.
* * *
해는 아주 늦게 졌다. 어둠이 가라앉으면 피비린내 나는 왕위 계승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아시어스는 창문 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숨통을 압박하는 고요가 왕성 전체에 무겁게 내리깔려 있었다. 누군가 활시위를 당기기만 하면,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기만 하면 곧바로 전투가 재개될 것이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 밤이 깊도록 철이 맞부딪히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의 고요였다.
아시어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귓바퀴 끝에 걸린 검고 작은 구슬 모양의 장신구를 한 번 톡, 건드렸다.
“바일.”
즉시 짙은 회색빛 안개가 그의 손에서 휘돌았다. 아시어스는 몇 자 대강 휘갈겨 접은 종이쪽지를 바일에게 내밀었다.
“전해. 위치는 서쪽 국경. 아마 반도 못 왔을 테지.”
쪽지는 곧 회색 안개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명을 받은 바일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시어스는 창을 열었다. 짙은 안개가 열린 창문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갔다. 금세 허공에 녹아들어 사라진다.
아시어스가 라타에의 사절단에게 보낸 쪽지의 내용은 딱 한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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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엉망일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사절단을 전부 데리고 올 것을 그랬지. 아시어스는 드물게도 후회라는 것을 했다.
라타에의 사절단에서 마법사는 그가 유일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만한 장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마법진을 만들 수 있는 자도 대륙에 오직 그뿐이었다.
그러나 왕성을 비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잠시라도 혼자 두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왕녀는 정말로 그에게 이 왕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믿지 않으면.
하지만 감 하나는 인정할 만했다. 아시어스는 입꼬리만 올려 조소했다.
어쩌면 저렇게 똑똑할까. 그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은 왕녀의 구원자는 아니었다. 지옥으로 끌고 내려갈 또 다른 사신에 가깝다.
아시어스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살짝 내려진 캐노피 너머로 죽은 듯 잠든 여자의 신형이 비쳤다.
리즈벨은 제 방으로 그를 데려오고 나서도 한동안 허공을 보며 고심했다. 보다못해 억지로 밀어 눕히자, 누운 채 몇 시간 동안 눈만 깜빡이고 있더니 결국 그에게 넌지시 부탁했다.
“나 좀 재워 줄래?”
“…….”
“네가 나를 재우는 방식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꿈을 꾸지는 않는 것 같아서.”
지난 닷새간 그가 자신을 억지로 재워 버렸다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지.’
아시어스는 가까스로 헛웃음을 삼키며 순순히 그녀에게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자신이 헬라르의 딸을 너무 얕봤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먼저 찾아내기만 하면 손쉽게 종속시킬 수 있을 거라고, 사실 그렇게 생각했던 게 맞다. 어차피 헬라르를 죽일 무기에 지나지 않으니까.
저렇게 경계심이 높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종속의 마법은 기본적으로 쌍방의 합의를 전제로 했다. 종속당하는 쪽이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면 시도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찌어찌 불완전하게 마법을 건다고 해도 금방 깨어진다.
‘헬라르가 찾아내기 전에 먼저 종속시켜야 하는데.’
그의 손끝이 초조하게 들썩거렸다.
아시어스는 성녀를 찾아 여신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수많은 밤을 버텨 온 인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침내 찾아낸 그의 성녀는 보고 있으면 눈이 아플 만큼 빛이 났고, 그리고 악독할 만큼 천진한 비웃음과 함께 자꾸만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나는 네 것이 아니야.”
보란 듯이 그의 여유를 산산조각내면서.
‘웃기지 마.’
한동안 묻어 두고 있었던 아시어스의 낡은 분노가 불쑥 튀어나왔다. 으르렁거리며 머릿속의 회상에 대고 지껄였다.
너는 내 건데. 너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 손 안에 들어올 운명을 타고난 인간인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감정이 성난 바다처럼 들썩거렸다. 기껏해야 각성을 끝마치지도 못한 약하고 어린 성녀 주제에. 제물에게 거부할 권한 따위가 있던가?
그녀는 지금 그가 저를 봐주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가 악물리고 눈앞이 뻘겋게 물드는 착각이 인 찰나, 아시어스는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예리하게 날을 벼리며 뻗어나가던 살기가 멈추었다. 잿빛 눈이 흘끗 캐노피 내려진 침대를 향했다.
이래서는 왕녀가 금방 깨어날 것이다. 굳이 속을 긁는 얼굴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무심코 생각한 직후 아시어스는 기가 차 헛숨을 뱉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봐주고 있는지, 맞춰주고 있는지.
아시어스는 여태 쓰고 있던 성가신 안경을 없앴다. 그리고 왕녀에 대해 지금 이상의 것을 생각하는 걸 멈추었다.
사실 정말로 거슬리는 건 따로 있었다. 왕성 전체가 그녀에게 겨누고 있는 살기였다. 곁눈질로만 봐도 퍽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은 현 상황.
용케 제국에까지 숨긴 내전이라. 본래라면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녀가 제거의 대상이 되어 위협받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시어스는 그녀가 이곳에서 숨을 다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가 곁에 있는 한, 저 여자가 싸늘한 시체로 변하는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리즈벨 발디마르는 그가 아닌 다른 누구의 손에도 죽을 수 없다.
아시어스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티스.”
즉각 그의 두 번째 사역마, 검은 눈의 붉은 여우가 창틀 위로 뛰어내렸다.
어리광 많은 여우는 금세 주인의 손에 주둥이를 묻고 비볐다. 아시어스는 티스의 머리와 등을 쓸어 주며 명령을 내렸다.
“보고 와.”
왕성에 들어서는 내내 수상쩍게 여겼던 것이 있다.
발디마르의 왕이 거처하는 곳. 돔 형상을 한 왕성의 심장부에 가장 높이 치솟은 본성. 첨탑의 뾰족한 꼭대기를 휘돌고 있는 괴이한 암운이 자꾸만 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실 작금 벌어진 모든 사달의 원흉은 현 발디마르의 왕, 루시페 발디마르였다. 대체 무슨 명령을 어떻게 내렸기에 형제들끼리 서로 칼을 겨누는가.
아시어스는 창문을 조금 더 젖혔다.
“샅샅이. 하나도 빼놓지 말고 보-.”
“소용없을걸.”
그러나 다음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막았다. 아시어스는 이제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쓸데없이 예민하긴. 그는 못마땅한 기색이 다분한 시선을 던졌다.
“언제 일어났습니까?”
“방금.”
사락. 흰 잠옷 자락이 침대에서 미끄러졌다. 가늘지만 굴곡 있는 여체가 얇은 슬립 위로 달빛 아래 드러났다.
“네가…… 제대로 못 재운 탓이야.”
아직 잠기운이 남았는지 명료한 기색은 아니었다. 푸른 눈이 그를 똑바로 향하지 않고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아시어스는 저도 모르는 새 그녀의 낯을 살피다가 그녀의 몸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성력을 감지했다.
‘눌러 놓았던 건 역시 소용이 전혀 없나…….’
그러나 그가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리즈벨이 크게 휘청거렸다. 이번에도 몸은 머리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그러나 아시어스가 리즈벨을 제대로 잡아 세우기도 전에, 리즈벨이 그의 품으로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아시어스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뚝 부러져 나갈 것 같은 가느다란 팔이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이어 여리고 부드러운 몸이 그에게 밀착해왔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시야 아래를 온통 차지했다.
리즈벨의 긴 옷자락이 아시어스의 발목을 부드럽게 스쳤다. 그녀의 얇은 슬립과 그의 셔츠가 맞닿은 몸 사이에서 엉망으로 구겨졌다.
그새 새어 나온 성력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분명 늘 그를 분노케 했던 향인데 어째서 이 여자가 풍기는 향은 이렇게…….
아시어스는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다시 재워 줄게요. 잠시만 떨어져 보…….”
“있잖아.”
리즈벨이 그의 가슴 언저리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티가 났다. 소리는 작더라도 명확하던 발음이 반쯤 뭉개져 있었다.
“네가 대단한 마법사라는 거 알아. 무시하는 거 아냐.”
“……왕녀.”
“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우리 아버지는 못 죽일 거야.”
“확신입니까?”
아시어스는 그렇게 물었다가 그녀가 제 왼쪽 가슴 언저리에 귀를 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왕녀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있었다.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한 둔중한 울림을.
잠자코 청각에만 집중하던 리즈벨이 겨우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너도 그래 봤자 인간일 거잖아.”
“…….”
“이렇게 품이 따듯하고, 심장이 뛰는 인간.”
아시어스가 그 말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 사이, 그의 두 번째 사역마, 붉은 여우 티스가 신호를 보내왔다.
막혔다. 들어갈 수가 없다. 왕이 있는 본성에.
아시어스는 사납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그에게 이름이 묶인 사역마라지만, 이 대륙에 티스가 못 들어갈 곳이 있던가?
리즈벨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너를 믿지 않는다는 건 진심이지만.”
“…….”
“사실 아주 조금은 믿고 싶기도 해.”
아시어스는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 분명 뭔가를 생각했던 것 같은데 거짓말처럼 잊어버렸다. 보이는 건 차분하게 늘어진 금빛 머리칼과 아래로 내리깔린 긴 속눈썹뿐이었다.
리즈벨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이제는 숨소리와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너는 분명 나를 구하러 온 사람은 아니겠지.”
“…….”
“하지만 그런 너라도 내게 와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웃기게 들리지. 그렇지만 나는…… 이제껏 내 편이 하나도 없었거든.”
리즈벨은 그 말을 뱉으며 뭐가 웃긴지 픽 웃었다.
“나는 네가 싫지 않아. 그러니 화내지는 마.”
그 말에 마음이 순식간에 붕 떴다가.
“그냥 딱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하다가, 열흘이 지나면 미련 없이 끝내면 돼. 불필요한 감정 소모할 필요 없이.”
이어지는 말에 다시 스산하게 가라앉는다.
급작스레 심한 단절감이 몰려들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왕녀는 그의 심사를 비트는 법을 꿰뚫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싱글거리며 자극했다가 차갑게 선을 긋고,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다가…….
그러다 마음이 아릴 정도로 애달픈 표정을 보이고. 겁도 없이 안기고.
“이제 재워 줘. 자고 싶어.”
이렇게 아이처럼 어리광도 부리고.
그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 속에 깎아지른 벼랑이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는 제 꼴도 함께 비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