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82
4화
“아. 내가 방금…….”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것을 인식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아시어스는 멈춰 서서 길게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심장은 여전히 쿵쿵 내려앉고 있었다.
라나크가 걱정스럽게 그를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괜찮은 거냐?”
“괜찮아요. 며칠째 통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니까.”
“그 뜻이 아닌 거 알잖아.”
“그럼?”
“너 아직도 불안해 보여.”
잠시의 침묵 끝에, 아시어스는 한숨과 함께 인정했다.
“티 나나 보네.”
“엄청. 리즈벨이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다.”
아시어스는 형제의 날카로운 지적에 이마를 꾹꾹 누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라나크가 진지하게 충고했다.
“너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아시어스, 이제는 다 끝난 일이다. 계속 이렇게 동요할 필요가…….”
“형은 로즈레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로 10년을 버틸 수 있어요?”
아시어스는 형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라나크가 금방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리즈벨이 코너 뒤로 사라졌다. 아시어스는 거의 기계적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뒤따라 코너를 돌고 다시 금빛 머리칼이 시야에 잡히자 그제야 한숨을 털어냈다.
“나는 버틴 내가 신기해요.”
“……잘 해 왔잖아.”
“잘 한 것으로 보였어요? 나는 아닌데.”
“…….”
“형한테 이런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것 같네. 아니, 형뿐만이 아니죠. 누구에게도 말을 안 했으니까.”
“그래. 나도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 듣는다. 계속 말해 봐.”
형제는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그들이 은은한 주황빛 불이 밝혀진 응접실로 들어섰을 때, 뤼켄의 여자들은 벽난로 앞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듀엔과 유레인은 소파에 앉아 엘리엇과 놀아 주는 중이었다. 라나크와 아시어스는 그 평온한 광경에서 조금 떨어진 대리석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그때 저 여자를 따라가지 못한 이후로 매 순간이 지옥 같았어.”
“……그랬냐.”
“네. 모든 게 다 있는데 리즈벨 하나가 없어서.”
“…….”
“인간의 욕심이란 참 끝도 없죠. 어머니 아버지가, 형이, 누나가 내 옆에 없을 때는 그렇게 사무치게 그립더니……. 막상 전부 되찾은 뒤에는 못 잡아 둔 한 사람 때문에 또다시 지옥을 걷는다는 게.”
“…….”
“심지어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라나크는 참지 못하고 동생의 말을 잘랐다.
“네가 왜 한 게 없어. 리즈벨이 마지막으로 맡기고 간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했잖아.”
“그거야 리즈벨이 다시 돌아왔을 때 겔오르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평화로운 상태여야 하니까 그랬죠. 하지만 내 힘으로 리즈벨을 다시 데려올 수는 없었잖아요. 라제가 없었다면 진작 미쳐 버렸을걸요.”
어느새 아시어스의 발밑에 나타난 검은 사자가 그르렁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라제의 매끄러운 갈기를 쓸어 주었다. 의식하지 못한 새 한마디가 더 흘러나왔다.
“덤으로 내가 리즈벨에게 정말 못 할 짓을 했다는 것도 새삼스레 깨닫고.”
“무슨 짓?”
“있어요. 그런 게.”
아시어스는 가족들에게 그가 자살이나 다름없는 선택을 했었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라나크의 의혹 어린 눈을 애써 무시했다.
“그래도 리즈벨은 내게 다시 돌아올 힘이 있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10년이나 기다렸으니까 역시 내가 더 힘들었던 게 맞지. 물론 이렇게 말하면 내 예쁜 사람은 어이없어하겠지만.”
라나크는 그렇게 말하는 동생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했다. 옅은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던 잿빛 눈은 리즈벨을 담는 순간 차오르는 충만한 사랑에 덮였다.
아시어스가 이렇게 그늘 한 점 없이 웃는 것은 열세 살 꼬마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라나크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래. 이제 보니 저 아이가 없던 10년간 너 살던 게 제대로 산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겠다. 괜찮은 척했던 건 다 허세였냐?”
“대부분은 그랬죠. 사실 지금도 그래요. 하루라도 못 보면 사는 이유가 없어지는 듯한 기분이거든요. -아, 졸음이 오나 본데.”
아시어스는 리즈벨의 눈의 깜빡임이 차츰 느려지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너도 참 중증이다.”
라나크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그 자신도 아내를 얻기 위해 5년이나 끈질기게 구애했지만, 열 살이나 어린 막냇동생의 집착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형이 헛웃음을 짓거나 말거나 아시어스는 리즈벨의 옆얼굴을 집요하게 살폈다. 엘제니아가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는 것 같았다. 잠기운에 조금 풀려 있던 리즈벨의 얼굴이 금세 행복감에 물들었다. 그 얼굴에 못난 질투심이 고개를 삐쭉 들었다.
“저 표정은 나한테만 보여 주는 건데…….”
잘생긴 얼굴이 못내 서운한 티를 감추지 못하고 흐려졌다. 라나크는 결국 괜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마디 더 했다.
“아시어스 너, 과한 집착은 너뿐만 아니라 리즈벨도 갉아먹을 뿐이라는 걸 명심해라. 불안할 필요가 없는 일에 흔들리는 건 멍청한 짓이야. 네 중심을 잘 잡아야지.”
“내 중심을 잡으라고요…….”
아시어스가 그 말을 곱씹는 사이, 난롯가에 앉아 뱅쇼를 홀짝거리던 리즈벨이 불쑥 고개를 돌렸다. 아시어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시어스는 라나크에게 대답하는 것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리즈벨이 어깨에 두른 담요를 손으로 여미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라나크에게 살짝 눈인사하고는 그에게 바짝 붙었다.
“왜요, 갑자기?”
“예뻐서.”
쪽. 따끈한 입술이 그의 왼뺨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시어스는 조금 굳었다.
“사랑해.”
소곤소곤 들려오는 속삭임에 달큼한 포도 향이 감돌았다. 리즈벨은 그의 오른뺨과 코끝에까지 입을 맞춰 준 뒤 생글 웃고는 도로 난롯가 앞으로 돌아갔다. 라나크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대체 오늘 결혼한 게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매일같이 곁에 끼고 사는데도 저리 좋을까.
물론 아시어스는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지 않았다. 멍한 얼굴로 리즈벨의 입술이 닿은 뺨만 만지작거리다가 그늘 없이 웃었다.
“날 죽이려나 봐, 진짜.”
아시어스가 풋사랑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처럼 들뜬 얼굴을 했다.
“가끔 보면 숨이 막혀. 너무 예뻐서. 내가 저 사람에게 전부 물들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아요?”
옛날에는 그녀에게 그를 새기는 데에 급급했었다. 그러면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아시어스는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그녀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사랑의 감정은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불려 가기만 했다. 이러다 터져 버릴까 봐 무서울 정도로 크게, 더 크게 자라난다.
“나는 하루에도 수천 번씩 내 중심을 잃고 저 사람에게 빠져들어 가요. 질투도, 집착도, 불안도, 사랑도, 행복도, 전부 내가 느끼는 감정인 동시에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시어스는 진심으로 웃으며 라나크를 돌아보았다.
“형. 리즈벨이 이제야 내 생을 완벽히 지배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그게 미치도록 좋아.
라나크는 그렇게 덧붙이는 동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보다 열 살이나 어리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었던 막냇동생이 열 오른 음성으로 속삭였다.
“수도 없이 오랜 시간을 형을 위해서, 누나를 위해서,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 살았으니까. 나는 이제 저 사람만 보면서 살 거예요.”
“…….”
“원하는 건 뭐든 해 줘야지. 내 모든 시간, 나를 이루는 모든 걸 다 줘서라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건 아시어스의 인생에 세 번째로 내려진 사명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앞으로도 나는 수없이 많은 날을 불안에 떨겠지만…….”
리즈벨의 행복이라는 절대적인 목표 앞에서 그의 질투나 불안 따위는 불씨 꺼진 잿더미만큼이나 하찮아졌다. 아시어스는 평온한 미소와 함께 말을 맺었다.
“지금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매 순간이 행복하니까.”
라나크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한다. 아시어스의 사랑이 마침내 그만의 궤도에 올라 있음을. 그녀의 빛이 들지 않는 순간에조차 위성처럼 그녀 주위를 돌고 있음을. 그리고 라나크는 동생을 보는 리즈벨의 눈에서 같은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예감은 곧 확신이 되었다. 라나크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호선이 떠올랐다.
“너희는 행복할 거야.”
“고마워요. 그리고…….”
아시어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찰랑이는 와인이 담긴 잔 두 개가 각자의 앞에 놓였다. 아시어스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끗했다.
“이 말을 하기에는 조금 늦은 것 같지만, 결혼 축하해요, 형.”
“그래. 고맙다.”
형제의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와인이 다디달았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