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83
5화
* * *
오랜만에 모인 뤼켄의 사람들이 대화를 마무리한 건 자정이 훌쩍 넘어서였다. 엘리엇을 재워야 한다며 엘제니아가 먼저 들어가고, 신혼부부인 라나크와 로즈레아가 그 다음으로 침실로 돌아갔다.
“눈에 졸음이 가득하네, 리즈벨.”
리즈벨은 빈 잔을 쥐고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누군가가 담요를 여며 주는 손길에 퍼뜩 깨어났다. 유레인이었다. 그녀는 10년이 넘게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유레인이 웃으며 리즈벨의 뺨을 도닥였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자고, 내일 조찬을 같이 하자.”
“네…….”
리즈벨은 겨우 대답하며 고개를 흔들어 졸음을 털어 냈다. 유레인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작게 미소하고는 거실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듀엔. 막내는 그만 놓아주고 우리도 올라가요. 벌써 자정이 넘었어요.”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심각한 얼굴로 아시어스에게 뭐라 당부하고 있던 듀엔이 부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아시어스. 내 말 잊지 말고. 알겠지?”
“정말 걱정하실 필요 없다니까. 제가 어련히 알아서 잘 안 하려고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걱정 마세요. 어머니, 이만 올라가 보세요. 리즈벨은 제가 데리고 들어갈게요.”
아시어스가 얼른 듀엔을 데리고 가라는 듯 유레인에게 눈짓했다. 아버지의 잔소리는 때로는 어머니의 것보다 엄격하고 집요한 면이 있었다. 듀엔과 유레인이 마지막으로 거실을 나선 후에야 거실에는 아시어스와 리즈벨 둘만 남게 되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리즈벨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 팔을 뻗었다. 나를 안으라는 뜻이었다. 아시어스는 금방 그 뜻을 알아듣고 그녀의 허리와 무릎 뒤를 받쳐 가볍게 안아 올렸다. 리즈벨이 작게 바르작거리며 그의 목을 껴안았다.
“많이 졸려요? 들어갈까?”
“아니……. 조금 깼어.”
리즈벨은 고개를 몇 번 흔들어 졸음을 마저 털어 냈다. 아시어스가 싱긋 웃었다.
“다행이다.”
그는 아까까지 듀엔과 유레인이 앉아 있던 소파 위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 옆에 앉았다.
“겨우 며칠 만에 우리 둘만 남아 있게 됐는데, 잠들어 버렸으면 좀 서운할 뻔했어요.”
리즈벨은 몸을 틀어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아시어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먼저 시선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벽난로가 타오르는 소리와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섞여 평화로운 운율을 만들어 냈다. 아시어스의 얼굴에는 주황빛 조명이 드리워져 있었다. 리즈벨은 손을 뻗어 높은 콧대에 걸쳐져 있는 은테 안경을 벗겼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아시어스가 그녀에게로 바짝 붙어 왔다. 이미 가까웠던 거리를 순식간에 훅 좁히더니 입을 맞추었다. 짧은 접촉이었다. 그러나 집요했다. 입맞춤이 수도 없이 내려앉았다. 간간이 낮은 소리의 속삭임도 함께였다.
“아까 왜 뽀뽀해 줬어요?”
“말했잖아. 예뻐 보였다고.”
“당신이 날 예뻐하는 건 내가 당신을 예뻐하는 것만큼이나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요.”
리즈벨은 성가실 정도로 딱 달라붙어서는 코끝이며 입술, 귓불까지 잘근잘근 씹는 남자를 겨우 밀어냈다. 물론 헛된 반항이었다.
“왜 갑자기 내가 더 예뻐 보였을까?”
리즈벨은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접고 대신 입맞춤을 피해 고개를 요리조리 돌렸다.
“말 안 하면 오늘 못 잘 줄 알아요.”
“아무것도……. 넌 내 말을 도통 안 믿는, 윽. 알겠어, 말하면 되잖아.”
결국 항복한 쪽은 리즈벨이었다. 그녀는 답지 않게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엘제 언니에게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아시어스는 끈질겼고 리즈벨은 잠시 망설였다. 엘제니아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시어스의 지난 10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남자가 저 없이 10년을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중에서 리즈벨의 마음에 깊숙이 박힌 것은 아시어스가 정말 불안정할 때마다 네키엘의 별장에 틀어박혔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리즈벨이 그와 함께 겨울을 보냈던 방이나, 저택 앞 수풀 속 공터에 한번 들어가면 몇 주씩이나 두문불출했다고 했다. 보다 못한 라제가 억지로 질질 끌어냈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이 말을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지만, 늦지 않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 리즈.”
“저한테 고마우실 일이 아닌데……. 아시어스가 잘 찾아와 준 덕이니까요.”
“그럼 늦지 않게 깨어나 줘서 고마워. 사실 이러다 우리 막내 상 치르는 거 아닌가 하고 어머니랑 나랑 정말 고민 많이 했거든. 멍청이 라나크랑 둔한 아버지는 막내가 괜찮다고 하는 걸 곧이곧대로 믿은 모양이지만…….”
돌아온 지 반년 하고도 세 달이나 더 지났지만, 엘제니아가 그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리즈벨이 이곳에 완벽히 적응하기를 기다려 준 게 분명했다.
“애교 많은 꼬마는 어디로 가고, 완전히 성격이 삐딱해져서는…… 아, 물론. 리즈 탓을 하는 건 아냐. 원래 성격이 저렇게 생겨 먹을 운명이었던 거지.”
그 말을 들으니 다소 죄책감이 느껴졌다.
열세 살의 아시어스가 원래 어떤 성격이었는지는 리즈벨도 잘 알았다. 딱 그 나이대의 아이답게 순진하고 귀여웠다. 하지만 기억을 전부 되찾은 후로는 마냥 아이로 남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돌아올지 돌아올 수 없을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재회를 기다리면서 무슨 마음으로 살았을까.
어렴풋이 짐작이야 했다. 리즈벨 자신조차 아시어스가 죽었을 때 이성을 유지하는 게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괴롭지 않았던가. 하지만 혼자 짐작한 것과 타인에게 직접 듣는 것은 느껴지는 바가 달랐다.
“솔직히 내 눈엔 쟤 아직도 불안정해 보여. 그러니까 성격 좀 나빠도 잘 데리고 살아 줘야 해, 알겠지? 네가 아니면 누가 쟬 거둬 줄지 사실 잘 모르겠거든.”
거기까지 듣고 나니 당장 아시어스에게 입 맞춰 주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가족들이 있을 때는 스킨십을 자제하라고 제 입으로 말했던 게 떠오른 건 다시 난롯가로 돌아온 다음이었다.
리즈벨이 머뭇머뭇 그 이야기를 하자, 아시어스가 김샌 표정을 지었다.
“난 또, 뭐 대단한 이유라고.”
“나한텐 대단한 이유야. 마음 아프게…… 뭐 한다고 네키엘에 한 달씩 박혀 있었어.”
“우리가 함께 보냈던 장소 중에 이 시대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잖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탑도 없었고, 바리엔은 그 전에 이미 무너졌으니까.”
아시어스는 이제 입맞춤을 그만두고 대신 그녀의 손을 가져와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나야말로 당신이 그렇게 반응하면 기분이 이상한데. 그런 내 모습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요?”
“내가 뭘?”
“당신은 내가 매달리고 우는 걸 좋아하잖아요. 당신 없인 제대로 못 사는 거.”
리즈벨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부정하지는 못했다. 사실이기는 했으니까.
“내가 좀…… 성격이 나쁜가 봐.”
그러다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그게 다는 아니야. 기분은 조금 나빴겠지만, 그래도 네 행복은 내 행복이기도 하니까, 나 없는 동안 네가 잘 지냈으면 더 좋았을 거야.”
“변명하기는.”
“진짜야!”
소파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앉은 아시어스가 나른하게 웃었다. 평소답지 않게 말을 늘이는 그녀가 귀여워 보인 모양이었다. 아시어스가 깍지 낀 손을 그대로 올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어느 쪽이어도 괜찮아요. 나는 당신이 나를 가엾게 여겨 주는 것도, 내가 아팠다는 걸 들으면서 만족스러워하는 것도 다 좋거든.”
그러나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하게 들렸다. 리즈벨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작게 항변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네요, 아가씨. 이제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키스해 줘요.”
아시어스가 그녀에게로 허리를 숙인 채 얌전히 눈을 감았다.
리즈벨은 잠시 그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내 툴툴대긴 했지만 그래도 형의 결혼식이라고, 늘 이마에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쓸어 올렸다. 그 덕에 잘생긴 이마까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리즈벨이 움직이지 않자 아시어스가 가늘게 눈을 떴다.
“감상 중이에요?”
“응. 다시 감아, 눈.”
“네.”
섬세하게 쌍꺼풀진 눈이 얌전히 다시 내리깔렸다.
리즈벨은 그의 마른 뺨을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그를 실컷 감상했다. 벽난로의 주황색 불빛이 어른거리며 아시어스의 얼굴에 평소보다 짙고 묘한 음영을 만들어 냈다. 하루 대부분을 보는 얼굴인데도 볼 때마다 늘 새롭게 사람을 홀린다.
리즈벨은 예쁜 모양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제 입술을 꾹 눌렀다가 천천히 뗐다. 만족하지 못했는지 곧장 칭얼거림이 따라왔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요, 리즈벨.”
리즈벨은 그가 조르는 대로 얼굴 구석구석에 잘게 키스를 흩뿌렸다. 깊은 접촉이 아니었는데도 남자의 얼굴에 나른한 만족감이 어렸다.
“아…… 좋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등과 허리를 감았다. 아시어스는 그녀를 꼭 안고선 뒤로 풀썩 쓰러졌다.
푹신한 소파가 부드럽게 출렁였다. 리즈벨을 제 위에 올린 채로, 아시어스가 다디달게 속삭였다.
“내일은 온전히 나한테 주기로 한 거 잊지 말아요. 종일 붙어서 안 떨어져야지.”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