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84
6화
리즈벨은 웃으며 그의 목에 뺨을 비볐다. 서로의 온기가 다정하게 섞였다.
“응. 내일은 뭐 할까?”
“글쎄요……. 아, 당신. 마법 배워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그랬던 것 같은데.”
리즈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가 가르쳐 줄 거야?”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요. 뭐, 가르쳐서 되는 종류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뭐야, 그건. 무슨 뜻이지?”
묘한 위화감에 푸른 눈에 서린 신난 기색이 금세 의심으로 바뀌었다. 아시어스는 짐짓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마법은 99%가 재능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보기에 당신은…… 마법에는 영 젬병일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아?”
“마력의 흐름을 눈으로 본 적 있어요?”
마법사가 아닌 이들에게 그 말은 곧 ‘바람을 본 적이 있어요?’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리즈벨의 인상이 찌푸려질수록 아시어스의 눈은 장난기를 품고 가늘어졌다.
“본 적 없지만……. 그래도 속단하지 마. 이러다가 내가 너보다 더 마력을 잘 다루면 어떡할 거야?”
“오…… 진심이에요?”
“…….”
리즈벨의 귀 끝이 약간 발개졌다. 발끈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지만, 자신이 몹시도 허무맹랑한 말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아시어스가 키득거리며 그녀를 놀렸다.
“어쨌든, 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대마법사의 유일한 제자가 되겠네요, 리즈벨. 미리 축하해요.”
“……너한테 안 배워. 유레인 님이랑 엘제 언니에게 배울 거야.”
“두어 달 에 한 번 만나서요? 그래서는 실력이 안 늘 텐데?”
몇 달 새 놀려 먹는 수가 아주 많이 늘었다. 그러나 리즈벨이 퍽 싸늘하게 노려보자 아시어스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농담. 당신은 뭐든 잘할 거예요. 언제는 안 그랬나.”
“…….”
“삐지지 말고, 안아 줘요.”
리즈벨은 마지막으로 그를 찌릿 흘겨보고 나서야 순순히 그가 당기는 대로 안겼다.
아시어스의 손이 그녀의 긴 금발을 부드럽게 빗어 내렸다. 입가가 저절로 나른하게 풀렸다. 어쩌다 보니 몸의 합부터 맞추는 것으로 시작된 관계라, 그들 사이에는 이런 사소한 접촉에 익숙해지는 단계가 통으로 빠져 있었다.
눈앞이 하얗게 되도록 정신없이 나누는 정사도 좋지만, 역시 리즈벨은 이렇게 가벼운 애정 표현에 조금 더 약했다. 물론 그 둘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턱 끝에 자잘하게 닿던 입맞춤이 입술로 올라온 순간, 아시어스가 그녀의 목에 손을 올렸다. 목덜미가 당겨지며 입술이 깊이 포개어졌다. 숨이 가빠 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녀가 숨이 모자랄 때쯤이면 아시어스는 귀신같이 눈치채고 틈을 벌렸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을 과하게 몰아붙이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제 본전을 못 찾을 때가 절반이 넘기는 했지만.
한번 불이 붙은 키스는 리즈벨의 눈이 몽롱하게 풀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푸른 눈에 이지가 조금 날아간 것을 볼 때면 아시어스는 늘 가슴이 뻐근해졌다. 가히 통증에 가까운 사랑이었다.
그는 달콤한 체향을 들이켜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너무 좋아. 부드럽고, 따듯하고, 향기롭고.”
그 말 한마디를 하는데 심장이 크게 들썩거렸다.
“당신을 볼 때 나는 종종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돼요.”
“나도 그래.”
리즈벨은 그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 눈을 맞추었다.
“나는 네가 이런 눈으로, 이런 표정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이게 정말 현실인가 싶어져.”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눈이 매 순간 저를 졸졸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잿빛 눈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불안이 어른거릴 때도 있었고, 아이 같은 질투나 해갈되지 못한 갈증이 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시어스는 리즈벨 역시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늘 품고 산다는 것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사랑해.”
하지만 늘 그렇듯, 그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졌다.
아시어스가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자정이 지났으니까, 내일이 된 거 알죠?”
남자의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아시어스가 대놓고 유혹하면 리즈벨로서는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리즈벨은 일단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 마탑 아니잖아.”
지난달 엘제의 아카데미를 방문했을 때, 교장실에서 키스를 나누다 학생들에게 들킬 뻔한 뒤로 ‘집’이 아닌 곳에서는 농밀한 스킨십을 나누지 않기로 약속했던 터였다.
“여긴 침대도 아니고. 옆방에 가족들이…….”
“괜찮아요. 이 집의 마법진을 누가 보수했다고 생각해요?”
아시어스가 조곤조곤 그녀를 얼렀다.
“방마다 튼튼하게 쳐 놨거든요. 접근 금지 마법부터 방음 마법까지. 전부 다.”
“……너 이러려고 가주님 결혼 선물로 저택을 수리해 주겠다고 한 거지?”
“겸사겸사. 나도 좋고 형도 좋고. 그래서 대답은요?”
말로는 그녀의 허락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손으로는 벌써 제 셔츠 단추를 풀고 있다. 쭉 뻗은 목이 슬쩍 비쳤다.
“얼른. 고개 한 번만 끄덕여 줘요.”
“…….”
리즈벨의 양심이 아우성쳤다.
여기는 반시간 전까지만 해도 정다운 담소가 오가던 화목한 가족의 공간인데. 심지어 오늘은 라나크와 로즈레아의 결혼식이었고, 여기는 그들의 신혼집이고, 더 심각한 건 침실도 아니고 응접실인데…….
“가끔은 이런 것도 좋잖아요.”
남자의 은근한 목소리에 밴 묘한 흥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배덕감을 부채질했다. 마음의 추가 기우는 건 순간이었다. 리즈벨은 눈을 굴려 문가를 살짝 쳐다보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조용히 하는 거야, 그럼.”
작정하고 유혹하는 남자도 문제지만, 그냥 넘어가 버리는 자신도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아무도 못 듣는다니까.”
“그래도.”
“알겠어요. 조용히라…… 누가 더 오래 참을 수 있나 한번 볼까.”
그 와중에도 승부욕을 자극당하니 망설임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내기하자는 거야? 네가 질 텐데.”
“그렇게 나를 속단하지 말라니까.”
“속단이 아니라 확신이지. 한번 해 볼래?”
리즈벨은 아시어스의 셔츠 아랫단추를 풀며 속삭였다.
“먼저 소리 내는 사람이 지는 거야.”
“대가는요?”
“소원 하나 들어주기.”
“좋아.”
아시어스의 입매에 종전보다 짙은 호선이 걸림과 동시에 리즈벨의 시야가 휙 돌았다. 등 뒤에 푹신한 소파가 닿고 리본이 홱 풀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를 삼켰다.
그 순간부터, 리즈벨은 더 이상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 * *
다음 날 라나크와 로즈레아가 조찬을 위해 응접실로 내려왔을 때, 이미 아시어스와 리즈벨은 먼저 와 앉아 있었다. 둘 다 방금 일어난 사람 같지 않게 말끔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쓰라고?”
“아니, 그건 너무 내용이 부자연스럽잖아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써야지.”
둘이서 뭘 하는지, 아침부터 편지지 한 장을 붙들고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로즈레아는 자리에 앉다 말고 의아하게 물었다.
“뭐 해, 리즈벨?”
“아, 편지를 쓰려고요…….”
“편지? 아, 오라버니에게?”
리즈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을 설쳤는지 눈가가 약간 빨갰다. 로즈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위기 좋았을 줄 알았는데, 어째 좀……?’
아시어스는 몹시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반면 리즈벨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리즈벨은 아시어스에게로 몸을 기울이고 부루퉁하게 소곤거렸다.
“반칙이야, 진짜. 너 힘세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내기였잖아요.”
“그렇다고 만질 기회도 안 주는 게 어디 있어. 불공정해.”
“알겠으니까 얼른 부르는 대로 써요. ‘나는 마탑에서 지내는 게 좋아. 아시어스가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거든. 불편한 점은 하나도 없어.’”
괴이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다. 리즈벨은 작게 투덜거렸다.
“대체 이런 편지를 왜 쓰라는 거야? 당장 전해 주지도 못하는데.”
“그런 게 있어요.”
이해할 수가 없다. 어제 그렇게 저를 괴롭혀 결국 울게 만들더니, 소원이라고 댄 게 로제스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리즈벨은 아시어스를 찌릿 노려보면서도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자, 됐지?”
“응. 이제 됐어요. 이리 줘요.”
아시어스는 흡족한 얼굴로 편지를 받아서는 손가락을 탁 튕겼다. 편지가 공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의 창고인 아공간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아침 먹고 돌아가요. ……리즈벨?”
“…….”
“왜 그래요?”
리즈벨은 새벽의 내기에서 결국 진 게 퍽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먼저 하자고 한 건 당신이면서 왜 이래. 그러게 날 속단하지 말라니까. 애초에 이길 수 없는 내기는 하는 게 아니죠.”
“그렇게 묶어 놓으면 당연히 내가 지는 게 뻔한 거 아냐?”
리즈벨이 투덜거리자 아시어스가 당장에 기겁했다.
“네? 묶다뇨.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요. 내가 언제 그랬어?”
“똑같잖아. 손 하나 꼼짝 못 하게 눌러 버렸으면서.”
“말 좀 조심해 줄래요? 그리고, 당신이 밀면 내가 언제 안 잡혀 줬나? 반항을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잖아요.”
“시끄러워.”
식사 내내 소리 죽여 아웅다웅 말싸움하는 그들을 본 라나크가 혀를 찼다.
“어제까진 서로 좋아 못 살더니. 왜들 저래, 또?”
“내버려 둬요. 귀엽잖아.”
로즈레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