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85
7화
외전 2. 길
라일라는 단언컨대 발디마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예였다.
루시페의 폭정이 정점을 찍었을 때, 그는 주변 약소국들을 침략하여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물과 미모가 빼어난 여인들을 볼모로 요구했다. 라일라는 그렇게 잡혀 온 여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원래 발디마르에게 가장 크게 패배한 남부의 아겔 왕국에서 촉망받는 무희였었다. 예술과 문화를 숭상하는 아겔에서 무희는 천한 직업이 아니었다. 무희는 몸으로 예술을 하는 직업이었다.
라일라는 인간의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아름다움을 구현해 내는 사람이었다. 손끝과 발끝 하나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우아하고도 부드러운 춤은 극상의 예술로 칭송받았다. 아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그 수식어는 그녀의 외모뿐 아니라 그녀라는 사람 자체를 내포하는 수식어였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아겔이 발디마르 전사들의 말발굽에 짓밟히며 급속도로 나락으로 치달았다. 폐허가 된 고국의 왕궁에서, 발디마르 역사상 첫손가락에 꼽히는 잔악한 폭군과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네 이름이 무엇이냐.”
“지엄하고 고결하신 발디마르의 정복왕께 알려 드릴 만큼 가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러하냐.”
라일라의 겁 없는 빈정거림에, 루시페가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안타깝구나. 나는 이미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라일라.”
“…….”
“네가 아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지.”
투구 속에서 루시페의 푸른 눈이 휘었다. 번뜩이는 안광에 일말의 다정함이 섞여 어떻게 봐도 미친 자의 눈이었다.
“천한 무희가 갖기에는 지나친 미색이다.”
아겔의 기사들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대검 끝이 라일라의 턱을 치켜들었다. 루시페는 눈이 멀도록 아름다운 무희를 내려다보며 잔혹하게 명령했다.
“아겔의 남은 황녀들의 목을 베어라. 내 여자로는 이것을 데려가겠다.”
라일라는 루시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는 굴종하는 법 따윈 몰랐다. 발디마르로 끌려간 뒤에도, 타락한 왕국의 주인에게 엉망으로 유린당하면서도 그녀가 루시페의 시선을 먼저 피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나라를, 그녀의 몸을, 자유를, 그녀의 춤에 대한 자긍심까지도 앗아 간 미친 폭군.
라일라를 보는 루시페의 눈에 사랑이 깃드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랑한다. 내가 가진 그 무엇보다 더.”
그러나 라일라는 발디마르에 잡혀 있는 7년 동안 단 한 번도 루시페를 향한 살의를 거두어 본 적이 없었다. 로제스를 낳고, 아들을 때마침 유산한 다른 첩의 소생으로 감쪽같이 위장한 뒤부터 라일라는 루시페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루시페가 어떤 병을 얻었는지, 그래서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 어떤 것인지까지 낱낱이 아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라일라는 루시페의 치세 아래 그에게 반기를 든 유일무이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의 계획은 예상치 못하게 다시 임신하고, 딸을 낳은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시도해야 하는 일이야.”
“그게 꼭 너일 필요는 없어, 라일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이대로 있다가는 전부 죽어. 너도 알잖아, 루시페가 그 검은 뱀에게 무엇을 제물로 바치는지!”
그의 애완동물인 거대한 뱀의 힘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다. 이미 발디마르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은 전부 그 뱀의 아가리 속으로 처넣어진 지 오래였다.
라일라는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루시페는 점점 미쳐 가고 있어. 타락한 인간의 시체를 구하기 위해 못 할 게 없는 인간이라고. 내가 그의 침실에 갈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듣고 오는 줄 알아?”
로제스와 바꿔치기한 죽은 갓난아이, 루시페는 라일라의 아이라고 알고 있는 그 어린 시체는 그대로 그 뱀의 먹이가 되었다. 그 왕족의 시체가, 꽤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날 저를 보던 루시페의 눈을 라일라는 잊을 수가 없었다.
왕족의 시체. 왕족의……. 루시페의 머릿속에 계승식의 초안이 적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엘리자벳. 너 이 썩어 빠진 왕가에서 그 악마에게 먹혀 생을 마감할 거야? 난 그렇게는 못 해. 난 내 죽음만은 내 손으로 택할 거고, 그리고…….”
“라일…….”
“내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 기회를 줄 거야.”
왕성에서 같은 남자의 첩으로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여자에게 라일라는 절규하듯 속내를 토했다.
“이 왕성을 나가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할 거야. 저 성벽 밖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눈물겹게 찬란한지 보여 줄 거고.”
후드득. 아름다운 얼굴 위로 악에 받친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할 거야.”
“라일라…….”
“그래. 성공할 수 없을 거라는 것 알아. 하지만 이건 시작이야. 누군가가 나서지 않으면 영원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라일라는 가장 용감한 여자였다. 과거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녀처럼 체제 자체를 바꿔 보려고 시도한 이는 없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죽고 나면 후회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눈에 밟히는 것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생에 아무 미련도 없었다면 일을 치르기 직전 어린 아들에게 딸을 안겨 주며 그렇게 피 토하듯 말하지 않았을 테다.
“살아야 해. 너희 둘 다. 알겠지…….”
그 말은 곧 라일라의 유언이 되었다. 라일라의 암살 기도가 실패한 뒤 왕성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한 바람이 불었고, 루시페의 부인들은 전부 나나크 홀에서 목이 베여 죽었다.
그들의 시체는 전부 이고르에게 먹혔다. 루시페의 치세 아래 있었던 최초의 반정은 그렇게 아무것도 끝맺지 못하고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 * *
“그땐 참 힘들었지.”
라일라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후회하기도 해. 그때 내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엘리자벳이나 우리 왕비님, 루시페의 다른 첩들은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로제스는 가만히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들 괜찮다고 하더라. 어차피 루시페 아래서는 얼마 못 살고 죽었을 거라고. 뭐, 그것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할 수 있었던 말이지만……. 지칼 그 애는 끝까지 나를 미워했다면서?”
“네. 좀 많이.”
라일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애초 정상이 아닌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온전히 그 애를 원망할 수만은 없지. 먼저 죽은 다른 아이들도 지칼과 그리 다르지 않았고…….”
그들은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희뿌연 안개가 가득 드리워져 보이는 것이라고는 몇 발자국 앞의 외길뿐이었다. 라일라가 투덜거렸다.
“하여튼 루시페, 그 개만도 못한 놈. 그에게 비석을 세워 준 건 아주 잘한 일이었단다, 로제스. 후대에 대대손손 남아야지. 루시페 발디마르가 얼마나 사악한 폭군이었는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로제스는 입술 끝을 올려 옅게 웃었다. 라일라가 기특하다는 듯 허리를 숙여 아들의 밀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때 너는 겨우 다섯 살이었는데. 키가 엄마 허리까지도 안 왔었는데……. 물론 아직도 내 눈에는 꼬맹이지만.”
로제스는 라일라를 올려다보았다. 늘 흐릿하게만 떠오르던 어머니의 얼굴이 오늘은 또렷했다.
“세월이 참 빨라. 그렇지?”
라일라는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잡고, 다른 팔로는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있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라타에.”
“라타에…….”
라일라의 목소리는 작은 흥얼거림과도 비슷했다.
“엄마의 나라는 이미 망국이라 갈 수가 없거든. 듣자 하니 서부의 라타에가 자유로운 분위기의 제국이라고 하더라. 옛날에 매일같이 생각했었지. 이 왕국을 부수어 버리고 나면 서부로 가야겠다고.”
로제스는 그가 아는 라타에를 생각해 보았다. 서부의 대제국은 한때는 여신 헬라르와 그녀의 성녀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신성 제국이었다. 그곳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세상 다른 어느 곳을 간다 한들…….
“족쇄 없는 곳이 있을까요?”
“응?”
“완벽히 자유로운 세상이 있기는 한 걸까요?”
어린 아들의 말에 라일라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로제스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모르지.”
“…….”
“있으리라 믿고 가는 거지, 뭐.”
“그렇게 끝까지 갔는데, 거기에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정말로 허망한 죽음일 뿐인데…….”
“음. 그건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어머니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에요.”
라일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로제스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물론 나는 실패했지. 하지만 네가, 그리고 리즈벨이 결국 성공했잖아. 루시페를 죽였고, 여신의 독재에서 벗어났고. 그러니 적어도 내가 찾아 헤맸던 자유가 존재하기는 했다는 게 증명된 셈 아냐?”
“…….”
“그리고 만약 너희들마저도 끝내 못 찾은 것들이 있대도…… 다른 누군가가 계속해서 찾아낼 테고, 결국 손에 넣을 테고.”
“으음…….”
“그렇게 이어지다 보면 점점 더 세상이 살 만해지겠지. 그 좋은 세상이 내 시대이기를 바라면서 사는 거고, 죽을 때까지 오지 않으면, 뭐 별수 없는 거고.”
라일라의 어조는 냉정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리부터 좌절한 채로, 꼭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 필요가 뭐 있겠어. 어쩌면 당장 내일이 그렇게도 바라던 좋은 날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니 그냥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면 되지 않을까?”
“…….”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거지. 잊지 않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타인이 걸어 나간 길을 꾹꾹 밟아 다지면서.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뒤따라 올 이들을 향해 새로운 흙을 퍼 올리면서.”
“…….”
“그렇게 내 발로 걸어 나가면 그게 자유고, 함께 사는 좋은 세상이지. 좋은 날이라는 게 뭐 별거니?”
“……그렇구나.”
“그렇지?”
“네.”
그들은 끝없이 어딘가로 걸어 나갔다. 로제스는 형체도 명확하지 않은 그 길을 걷는 내내 어머니의 따스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 * *
“어머니가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었어?”
로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즈벨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는 왜 오라버니 꿈에만 나오시고, 내게는 와 주지 않으실까?”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