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91
13화
* * *
리즈벨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아시어스에게 미치는 영향은 당연히 어마어마했다.
“왜 안 돌아오는 겁니까?”
아그네스는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는 잿빛 시선을 슬쩍 피했다.
“오랜만이잖아요. 쌓인 이야기도 많을 테고, 그리고 심지어 오늘은 생일이시니까.”
“쌓인 이야기는 늘 영상구를 통해 보내지 않습니까? 지난해에도 반나절을 넘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만.”
득달같이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리즈벨 앞에서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표정이었다. 그녀와 마주 앉은 이 한 시간 동안 입술을 얼마나 잘근잘근 씹어 댔는지, 불그스름한 입술 안쪽이 살짝 찢어져 있었다. 아그네스는 한숨과 함께 열 번째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며칠은 괜찮아요. 리즈벨도 괜찮을 거라고 장담하고 갔고. 그보다 생각은 좀 나셨어요?”
아시어스는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그들이 싸운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최근에 심각하게 싸운 적은 없다. 가벼운 말다툼이 몇 번 있었을 뿐이지.
아시어스는 기억을 더듬다 울컥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서운했던 일 하나가 떠오른 탓이었다. 아시어스는 애꿎은 이에게 벌컥 성을 냈다.
“이게 다 그쪽 오라버니 때문 아닙니까.”
“예? 우리 전하요?”
그거야말로 아그네스에게는 금시초문이었다. 아시어스가 매섭게 대꾸했다.
“리즈벨이 지난번에 술을 배워 온 뒤로 겁도 없이 양주에 손을 댄단 말입니다.”
“…….”
“술 먹여 보내지 말라, 저번에도 그쪽 왕에게 편지를 들려 보냈었던 것 같은데.”
아그네스는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술 때문에 싸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은 건 아시어스의 발치에 몸을 말고 있던 라제였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냐, 아시어스? 양주 몇 잔에 취하는 건 리즈벨이 아니라 너야.”
“역소환하기 전에 닥쳐.”
아시어스가 으르렁거렸다.
“리즈벨도 한 병을 다 비우면 취할 거야. 안 돼, 절대. 누가 데려가도 눈치 못 채면 어떡할 거야.”
“…….”
이번에는 라제도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시어스는 툭툭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에 손톱으로 테이블을 초조하게 긁었다.
“하지만 그 일은 잘 넘어갔는데……. 그 뒤로 말다툼한 거라고는, 내가 약속을 못 지- 아.”
아시어스는 거기까지 말한 뒤 퍼뜩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리즈벨과의 약속에 조금씩 늦은 날이 잦았다.
리즈벨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아카데미 입학시험 준비에 바빴고, 시험을 치른 다음에도 못 읽은 책을 읽겠다며 낮 시간을 전부 할애했다. 그리고 아시어스는 그동안 마탑의 관리와 여러 업무를 처리했다.
해서 자연히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은 저녁부터 밤이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건 이제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근 며칠 미처 연락하지 못하고 늦은 일이 몇 번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리즈벨이 미리 알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공을 들인 지 벌써 반년이 훌쩍 넘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물을 확인한 것이 간밤이었다. 마지막까지 온 신경을 다 쏟느라 새벽이 지나는 줄도 몰랐다. 아시어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오늘…… 아침에 들어오기는 했는데.”
“아, 그럼 원인은.”
아그네스는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리즈벨이 화가 난 지점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외박이네요.”
“외박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거의 동시에 라제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체 외박을 왜 했어.”
“…….”
그건 확실히 그의 실수다. 아시어스는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차피 오늘이 로제스의 생일이라 자리를 비웠을 텐데, 그냥 오늘 갈걸.
“됐어. 원인을 알았으니 돌아오면 잘 달래 줘.”
“안 오잖아. 무슨 일을 당했을 줄 어떻게 알고.”
“너는 아직도 리즈벨을 모르냐. 무슨 일을 냈으면 냈지 당하고 오지는 않을-.”
아시어스는 라제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손을 휙 내저었다. 라제가 도로 마계로 역소환되는 건 순간이었다. 아그네스가 진땀을 흘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별일 없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다면 제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
아그네스는 어떻게든 그를 안심시켜 보고자 했다. 여기서 더 심기를 거슬렀다간 자신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리즈벨은 대체 어떻게 이런 남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어르고 달랠 수 있는 걸까.
아시어스 뤼켄은 잘생긴 만큼 성질이 더럽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감을 잡기가 힘든 부류였다. 애초에 리즈벨과 제 가족 외에는 그 어떤 이에게도 유한 모습을 보이는 자가 아니기도 했다.
“내일 아침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으면 다시 신호를 보내 볼게요.”
뻘건 안광이 탁탁 튀는 잿빛 눈에 절로 오금이 저렸다.
“그러니까……. 일단, 안경 좀 써 주시고요.”
아그네스는 결국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남자가 테이블 위를 대강 더듬어 안경을 착용하고 나서야 아그네스는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 사람을 오래 보고 있다가는 수명이 줄어들겠다. 아그네스는 결국 입을 열었다.
“정 그렇게 걱정되시면, 한번 가 보실래요?”
그 말에 내리깔려 있던 잿빛 눈이 단박에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아시어스는 의자에 비딱하게 기대 있던 몸을 바로 하며 득달같이 물었다.
“내가 갈 수도 있습니까?”
“원래는 안 되지만요. 마탑주님은 특별하시니까.”
물론 아무나 시간 선을 건너다닐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시어스의 몸에 얽힌 시간 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굉장히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본래의 길이보다 늘어났던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 있고, 또 한 번 완전히 끊어졌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한 부분도 선명했다.
게다가 아시어스는 이 시간대와 미래의 시간대의 교집합이나 다름없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세계의 시간 선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악마 세 마리와 공명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아그네스는 그의 주위에 휘감긴 시간의 실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짙은 금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오래는 안 돼요. 이렇게 해 드릴 수 있는 건 아마 마지막일 거예요. 저도 힘들고…….”
아그네스는 말을 하다 말고 남자에게 더 효과적인 방향으로 바꾸었다.
“아니, 리즈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요. 위험 확률이 낮긴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가서 별일이 없다는 걸 확인하시면 바로 돌아오세요. 한 시간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아그네스는 그의 실에 자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미래에 뿌리를 둔 그녀의 성력이 아시어스를 인도할 것이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마탑주.”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아시어스의 모습은 방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11년 만에 다시 밟은 세계는 아시어스의 기억 속과 거의 비슷했다. 바뀐 채 봉합된 세계에서도 그만 한 천재는 다시 태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기를 타고 읽히는 강한 마력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아그네스의 성력은 그를 발디마르의 왕성으로 곧장 인도했다. 그가 발을 디딘 곳은 창밖으로 동쪽 탑이 멀찍이 건너다보이는 서쪽 탑. 리즈벨이 발디마르의 수치, 미친 5왕녀였던 때 쓰던 방이었다.
내부는 놀랄 만큼 아시어스의 기억과 비슷했다. 황량할 만큼 텅 빈 내부며 낡은 침대와 작은 티 테이블과 의자 두 개. 크지 않은 옷장과 서랍장. 벌써 11년이나 지났을 텐데 이 방을 그대로 둔 것을 보면 분명 로제스의 명령일 것이다.
‘하여튼, 팔불출이라니까.’
아시어스는 저나 로제스나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걸음을 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왕성의 구조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시어스는 투명 마법으로 모습을 가리고 당당하게 왕성의 중앙 복도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왕의 탄신일이라 어딘가에서 연회가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희미하게 악단의 연주 소리가 들렸다.
“연회…….”
아시어스는 문득 솟는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연회라는 게 어떤 것인가. 술과 노래가 빠지지 않는 자리 아닌가. 설마 자신을 버리고 여기로 와서 술이나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좀 화가 날 것 같은데.”
아니겠지?
사실 라제의 말마따나, 리즈벨은 웬만큼 술을 먹어도 취하는 법이 없었다.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 그보다 세 배 정도는 술에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눈에 닿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과 술을 하고 온다는 게 싫다. 당연한 거 아닌가?
아시어스의 걸음에 점차 힘이 실렸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점이 그의 초조함을 부채질했다. 그는 환하게 밝혀진 회랑을 걷다 결국 신경질적으로 마력을 엮었다.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