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94
16화
물론 리즈벨이 귀여운 것과 그가 걱정하는 건 전혀 별개다.
“내가 제명에 못 살죠. 당신 때문에.”
“너 그거 금기어야.”
“그거 생각할 정신은 있나 보네요.”
아시어스는 리즈벨을 침대에 기대앉히고 그녀의 가는 등을 쓸어내렸다. 다홍빛 드레스가 하얀 슬립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씻고 자야 할 텐데.”
아시어스는 잠시 고민했다.
바로 재우는 게 나을까, 아니면 씻기는 게 나을까. 상태를 보아 하니 아직 술이 단단히 오른 건 아닌 것 같았다. 살짝 취기가 도는 모양인데, 그러면 빠르게 씻은 다음에 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아시어스는 그 생각을 1초 만에 수정했다. 그가 잠시 욕실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사이, 리즈벨이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것이다.
“라제!”
[응……?]침대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던 라제가 어리둥절한 소리를 냈다. 리즈벨은 커다란 흑사자를 답싹 끌어안고는 검은 갈기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많이 사랑해.”
[엥?]“말하는 게 가끔 옆구리를 걷어차 주고 싶을 정도로 재수 없기는 한데…… 그래도 나는 너를 정말 정말 좋아해.”
[어, 그래?]라제는 입을 떡 벌리더니, 이내 낄낄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야, 나도 너 좋아해! 아시, 그냥 둬 보자. 얘가 이러는 거 너도 처음 보잖아. 나한테도 이러는 거 보니까 너 오늘 평생 들을 사랑 고백은 다 듣겠는데?]라제가 그러거나 말거나, 리즈벨의 관심은 이제 옆에 앉은 붉은 머리 소녀에게로 향했다. 리즈벨이 돌아옴과 동시에 인간화한 티스는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리즈. 나도 사랑하지?”
“응. 티스도 많이 사랑해.”
리즈벨의 주사는 아무래도 온 사람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아시어스는 웃음을 삼키며 팔짱을 끼고 리즈벨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리즈벨은 짙은 회색 안개 바일에게까지 사랑한다고 말해 준 후에야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시-어-스.”
리즈벨이 예쁘게 웃었다. 글자 사이사이가 길게 늘어졌다. 그녀의 코끝과 양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시어스는 신음을 삼키며 단숨에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가는 몸을 휙 안아 도로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괜한 걱정이 아니었죠, 역시. 평소보다 더 예쁘잖아요.”
“너도 사랑해.”
“말도 예쁘게 하고. 앞으로 술 마시러 갈 때는 나를 꼭 데려가요. 그렇지 않으면 안 보낼 거야.”
지금 이렇게 말해도 이 사람이 한 번 웃어 주기만 하면 물거품이 될 다짐이라는 걸 알지만, 아시어스는 이번만은 물러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당신도 내 말 안 들었으니까, 내일 아침에 머리 아프다고 해도 절대 마법 안 걸어 줄 거예요. 듣고 있어요?”
리즈벨은 잔소리가 듣기 싫은지 커다란 베개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대답.”
“……그렇지만.”
베개 밑에서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어스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렇지만, 뭐?”
“너어는.”
리즈벨이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아직도 양 뺨이 발갰다.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너는…… 술, 을, 못 하-잖아.”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같이 술을 안 마셔 줘서 멀리까지 가서 잔뜩 마시고 왔다는 건가?
아시어스는 술을 즐기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면 술에 약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평균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엘제니아가 단언한 적이 있다. 우리 막내는 술을 잘 못 해-라고.
게다가 술에 취하는 느낌도 싫고, 마시고 난 뒤에 몰려오는 두통도 싫어 웬만해서는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게 내심 불만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거 말도 안 되는 변명인 거 알죠?”
아시어스는 반 박자 늦게 힐난하며 동시에 심각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주량을 늘려야 하나?
“말이 왜 안 돼? 너는 술이 들어가면…… 안 돼.”
“왜요. 한 잔도 못 하는 건 아닌데.”
“안 돼……. 이상하게 위험해져서…… 아무튼 안 돼. 이리 와 봐.”
멀쩡한 얼굴로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남매가 참 닮았다. 아시어스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면서도 순순히 몸을 숙여 주었다. 쓰담 쓰담. 리즈벨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성 없이 쓸어내렸다. 검은 머리칼이 금세 부스스 일어났다.
리즈벨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활짝 웃었다.
“내 강아지.”
강아지…… 나쁘지 않은데. 아시어스는 머리칼을 파고드는 손길을 느끼며 나른하게 생각했다.
“말은 무지하게 안 들어먹는…… 강아…… 개…….”
하지만 개새끼는 좀 너무하다. 만족감에 노곤히 풀어지려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개…….”
아시어스는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조곤조곤 얼렀다.
“그래요. 당신 강아지 여기 있네.”
“내 거.”
“응. 네 거.”
“잘생겼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라제의 말이 맞았다. 리즈벨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을 얼른 씻기고 재우려는 생각을 접고 그녀를 좀 더 감상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생겼어요?”
“응.”
“당신이 더 예쁜데.”
“알아.”
“…….”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리즈벨이 싱긋 웃었다.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해도 위화감이 없는 건 리즈벨이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예쁘기 때문이다. -라고 아시어스는 생각했다.
“잘 아네.”
“그럼. 네가 맨날 그렇게 말해 주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반말이야?”
갑자기 그게 또 신경에 거슬렸나 보다. 아시어스는 잠시 헛웃음을 지었다. 화제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확확 튄다. 취한 사람이 고전적으로 보이는 모습 중 하나였다.
“반말하지 마.”
푸른 시선이 도로 뾰족해졌다. 그것조차 너무 벅차게 예뻐서, 아시어스는 따끈한 볼에 입술을 연신 내리누르며 대답했다.
“반말 안 했어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하네.”
“뭐가?”
“생각해 보니까 나 너보다 한참 어린걸.”
이젠 이 여자까지 이런 말을 하네. 아시어스는 다소의 서운함에 작게 불평했다.
“안 그래도 엘제 누나랑 당신 오라버니가 그걸로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압니까?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나 그렇게 안 늙었어요. 이 시간대의 나이로 당신하고 네 살밖에 차이 안 나는-.”
“그래, 그러니까. 반말해 봐.”
아시어스는 눈을 깜빡였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가…… 갑자기요?”
늘 지나가듯 툭툭 뱉을 때는 잘만 나왔는데, 하라고 깔아 주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리즈벨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물었다.
“내가 존대해 볼까?”
“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에 아시어스가 적잖이 당황한 사이, 리즈벨이 대뜸 그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사랑해요.”
“……?!”
훅 들어온 고백에 잿빛 눈이 크게 뜨였다. 아시어스는 잠시 굳어 있다가, 급하게 리즈벨의 양어깨를 잡고 몸을 바짝 붙였다.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돼요?”
“사랑해요. 알죠?”
그의 말투를 따라 하는 듯, 색다르면서도 꽤 자연스러웠다. 리즈벨이 다정하게 눈을 찡끗했다.
“당신은 늘 이렇게 말하잖아요. 따져 보면 이게 맞는 건데. 안 그래요?”
“와, 뭐야……. 기분 이상해.”
아시어스가 생경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그 표정을 본 리즈벨이 실없이 웃었다.
“너 표정 되게 웃긴다. 아니, 되게 웃겨요.”
금세 어색해진 말투에 아시어스는 겨우 둥둥 떠다니는 듯한 설렘의 바다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리즈벨을 당겨 안았다.
“취하니까 이런 모습도 다 보고……. 설레 죽겠다. 하지만 당신은 역시 내게 하대하는 게 더 어울려요.”
“그거 되게 극악한 취향 아니야?”
“당신이 더 극악하죠.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건 반칙이잖아요.”
그에게 숨 막히게 끌어안긴 리즈벨이 불명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이제 네 차례야. 너라고 불러 봐.”
“너?”
아시어스는 리즈벨을 잠시 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를 내뱉는 기분이다. 아시어스는 몇 초 만에 포기했다.
“당신한테 너라니. 나는 못 하겠는데. 죄짓는 기분이에요.”
“왜? 몇 번 한 적 있잖아. 나 분명히 들은 적 있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거랑 의식적으로 하는 거랑은 달라요. 그게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올 때가 있단 말이야.”
“할 때?”
“……주로 그때죠.”
아시어스는 얼결에 대답하며 리즈벨의 술버릇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평소에도 언행이 거침없지만, 술이 들어가면 좀 더 직설적으로 된다. 그리고 이상하게 고집이 세진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리즈벨이 생글 눈을 휘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온통 장난기가 가득했다.
“좋아, 그럼.”
“뭐가 좋은데요?”
별생각 없이 던진 물음 이후로, 아시어스는 꽤 오랫동안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