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95
17화
* * *
커튼이 전부 걷힌 창가로 아침 햇살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머리 아파…….’
눈을 뜨지도 않았는데 눈앞이 뱅글뱅글 도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리즈벨은 머리를 살짝 흔들어 두통을 털어 내려 했으나 장렬히 실패했다.
‘몸도 좀 뻐근한 것 같고.’
이상하다. 허벅지 안쪽에서 익숙한 둔통이 올라왔다. 리즈벨은 부스스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베개에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이었다. 끝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아시어스가 씻겨 주고 잔 모양-.’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리즈벨은 잠이 전부 달아나 버렸다.
씻겨 주고 자? 뭘 했길래 씻었지? 그보다 어제는 로제스의 생일이었는데……?
무단 외박을 한 아시어스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하루 자고 올 거라고 선포하고 발디마르로 가 버렸었는데……. 그 사이의 기억이 전부 삭제되어 있었다.
“……뭐지.”
리즈벨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신히 한 장면을 떠올려 냈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두 개의 유리잔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던 장면이었다. 시간은 늦은 밤, 장소는 테라스. 그녀의 옆에는 아시어스가, 맞은편에는 로제스가 앉아 있다.
“그럼 건배라도 할래.”
“하게 두십시오. 하고 싶어 하잖습니까.”
“그럼 내 잔으로 같이 해요. 자, 손.”
“생생한 꿈이네.”
거기서 리즈벨은 그 기억이 꿈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들 셋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다시 마탑으로 돌아온 거지?
“아, 일어났네요.”
리즈벨의 의혹은 마침 침실로 들어오는 남자를 발견하며 더욱 거세졌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인데.”
아침에는 늘 가운만 걸치고 있는 남자가 오늘은 웬일인지 바지와 셔츠를 제대로 입고 있었다. 리즈벨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너 또 외박했어?”
“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아시어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어제 일 기억 안 나요?”
“…….”
“안 나나 보네. 이거 좀 억울한데요. 나를 그렇게 괴롭혀 놓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과 기억하는 사람이 붙으면 당연히 후자가 승자다. 아시어스의 얼굴에 여유가 스쳤다. 반면 리즈벨은 몰려오는 불안감에 낯을 굳혔다. 뭔가, 들으면 안 되는 일이 일어났었던 것 같은데…….
리즈벨은 아시어스를 꼼꼼히 살피다가, 그의 오른쪽 턱 밑과 목이 온통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걸 보고 나니 조금 머쓱해졌다.
“어…… 내가 널 좀 괴롭혔나 보다. 그렇지?”
아시어스의 눈초리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좀?”
“……‘많이’야?”
“‘엄청 많이’예요.”
아시어스가 제 목을 슥 문질렀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목뿐만 아니라 쇄골 아래까지 전부 가관이더라. 그는 침대 기둥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선 느른하게 웃었다.
“거의 나를 쪽쪽 빨아 드셨죠, 아가씨.”
“…….”
“이제 웬만하면 당신을 도발하는 건 안 하려고요. 이러다 진짜 잡아먹히겠다니까.”
나는 대체 뭘 한 걸까. 리즈벨의 상상이 굉장히 나쁜 쪽으로 뻗어 가기 시작했다. 아시어스는 웃음을 꾹 참고 리즈벨의 나쁜 상상을 잘라 냈다.
“그것보다, 리즈벨. 당신이 들으면 좋아할 만한 소식들이 있어요.”
“무슨 소식……?”
“골라 봐요. 기쁜 소식 하나랑 아마 당신이 아주 많이 행복해질 소식 하나. 뭐부터 들을래요?”
무엇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리즈벨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좋은 소식을 듣기 전에, 너한테 먼저 물어볼 게 있어, 아시어스.”
아시어스의 얼굴에 떠올랐던 여유가 파삭 깨졌다. 올 게 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리즈벨이 손짓하는 대로 침대가에 앉자마자 곧바로 질문이 들어왔다.
“어제…… 아니지, 그제는 왜 안 들어왔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게 나한테 어떤 의미가 될지 알면서.”
“알아요. 미안해.”
그는 구구절절 변명하는 대신 우선 사과부터 하는 쪽을 택했다.
“진짜 미안해요. 내가 직접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최대한 빨리 돌아오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어요.”
“무슨 일이었는데?”
“…….”
“네 대답 여하에 따라 내가 오늘부터 네 얼굴을 볼지 말지가 달렸어.”
아시어스는 잠깐 고민했다.
이게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서 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서 다른 말로 둘러댔다가는 리즈벨이 정말 내일까지 저를 안 볼 것 같았다. 그러면 다 무슨 소용인가. 아시어스는 결국 항복했다.
“그럼 잠깐 눈 감아 볼래요? 당신한테 줄 게 있거든요. 받으면 알 거예요. 내가 그제 밤에 왜 못 돌아왔는지.”
“……알겠어.”
리즈벨은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면서도 일단 눈을 감았다. 아시어스는 이른 아침에도 티 없이 맑고 예쁜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잿빛 눈이 서랍 속에 든 것들을 잠시 응시했다.
“…….”
짧은 고민 끝에 그가 먼저 집어 든 것은 얇은 봉투였다. 아시어스는 봉투 안에 곱게 접혀 있던 종이를 꺼내 리즈벨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 확인해 봐요.”
“……?”
리즈벨은 눈을 뜨고 제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두 번 접힌 종이를 펼쳤다가, 안에 쓰인 내용에 작게 소리를 질렀다.
“와……!”
아시어스가 쥐여 준 것은 바로 오늘 아침에 날아온 바스피타 나사즈 아카데미 학부 입학 합격증이었다. 아시어스가 잘했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축하해요. 뭐, 당연히 한 번에 될 줄 알았지만, 그래도.”
“와, 나는, 나는 예상 못 했는데…….”
설마 한 번에 붙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받은 합격 소식에 얼떨떨하면서도 한 단계를 넘어섰다는 뿌듯함이 치밀어 올랐다.
“이건 정말……. 정말 좋은 소식이 맞네. 진짜 기쁘다.”
리즈벨은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일어난 일에 비하면 합격 통지서를 받은 기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실은 세상 그 어떤 행복이 찾아오더라도 다음 순간 아시어스가 취한 행동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아시어스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두 번째 행복한 소식.”
리즈벨의 손에서 종이가 저절로 빠져나가 허공으로 나풀나풀 솟아올랐다. 리즈벨이 반사적으로 종이를 따라 시선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을 때, 그녀는 아시어스가 침대 아래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을 보았다. 눈높이가 반전된 잿빛 눈과 푸른 눈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아시어스? 왜…… 아.”
리즈벨의 의아한 물음은 곧장 짧은 탄성으로 바뀌었다.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단 몇 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감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녀에게 내밀어진 작고 검은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머리는 곧바로 직감했지만, 가슴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들이 다들 결혼이란 걸 한다고 했잖아요, 리즈벨.”
“…….”
“사실 생각을 많이 해 봤어. 우리한테 그런 의식이 필요할까. 그리고 그 생각의 결과가 이거예요.”
그녀의 당황을 달래 주듯, 느릿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우리는 당신이 아스테르반에서 나온 날 서로가 언제나 서로의 것이라고 약속을 했었지만…….”
잿빛 눈이 다정하게 휘어졌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그 말뿐인 약속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생각해요?”
검고 부드러운 벨벳 공단 위에 올려진 것은 반지뿐만이 아니었다. 반짝이는 녹빛 마법 수식이 반지 위에서 느리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작은 마법진이 내뿜는 기운은 리즈벨에게 익숙한 동시에 낯설었다. 멍하니 벌어져 있던 리즈벨의 입술이 달싹여졌다.
“종속…… 영혼의 종속…….”
“아냐. 비슷하지만 달라요. 이건 당신의 힘이 있어야만 완성될 수 있거든요.”
“무슨 말이야……?”
“내가 여기 걸어 둔 건 서로 다른 두 개의 기운을 하나로 묶어 두는 마법이에요.”
부드럽고 섬세한 녹빛 마력은 종속의 마법과는 달리 그도, 그녀도 결코 해치지 못할 것이다.
리즈벨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리즈벨의 몸에 휘감긴 시간의 실이 그녀의 마음에 이는 파장처럼 일렁거렸다.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의 몸에 둘린 실도 비슷하게 파도쳤다.
아시어스가 속삭였다.
“나와 같은 시간을 걸어 줘요. 평생.”
“…….”
“우리가 더는 불안하지 않게, 서로가 없는 시간에도 언제나 곁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
“나는 살아가는 매 순간 당신으로 인해 구원받고 싶어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직 이 남자의 목소리만이 백지에 쓰이는 유일한 글귀처럼 남았다.
리즈벨이 쉽사리 답하지 못하자 아시어스의 낯에 일말의 초조함이 어렸다.
그는 이번에도 그가 막다른 길에 몰려 있다고 생각될 때마다 늘 하는 말을 똑같이 고했다.
“사랑해요.”
“…….”
“사랑해요…….”
리즈벨은 그 답을 말로 되돌려 주지는 않았다. 대신 반짝이는 은빛 반지로 손을 뻗었다. 두 개의 시간의 실 끄트머리가 두 개의 반지에 각각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실은 크기가 더 큰 반지에, 그의 실은 더 작은 반지에.
녹빛 마법진이 천천히 발동했다. 각자의 시간을 머금은 반지가 결속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역할이 다한 마법진이 반짝이는 빛의 가루가 되어 허공에 맴돌았다.
아시어스의 낯에 그제야 환한 웃음이 번졌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