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96
18화
“아, 나 순간적으로 당신이 거절할 줄 알고 놀랐……. 리즈벨?”
아시어스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시야에 온통 금빛이 가득했다. 아침 햇살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칼로. 침대 밖으로 상체를 기울인 여자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늘 안아 보아도 한없이 가볍기만 한 무게가 그에게 한가득 안겼다.
“고마워…….”
셔츠 깃이 서서히 축축하게 젖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하얀 양 뺨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으리란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리즈벨이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나랑 같은 시간을 걸어 줘.”
“네.”
“평생 내 옆에 있어.”
“네.”
그 대답을 듣고 나자 결국엔 흐느낌이 터졌다.
“전혀…… 나 전혀 몰랐……. 언제부터…….”
“이거 때문에 외박한 거예요. 이제 화내지 않을 거죠?”
리즈벨이 고개를 흔들었다. 화를 냈다는 사실조차 기억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아시어스는 그를 힘껏 끌어안은 팔을 떼어 냈다. 그리고 상자에서 두 개의 반지 중 더 작은 것을 꺼내 리즈벨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며칠을 신중한 보람이 있었다. 반지는 마법을 걸 필요 없이 그녀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아시어스는 반지 위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반지, 잃어버리면 안 돼요. 그럼 내 시간을 버리는 거야.”
리즈벨은 입술을 꾹 앙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양 뺨이 여전히 눈물범벅이었다. 아시어스가 다정하게 재촉했다.
“나도 끼워 줘.”
리즈벨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왼손 약지에 남은 반지를 끼웠다. 반지가 미끄러지듯 끼워지는 장면이 망막에 새겨지는 듯했다. 두 개의 반지가 모두 주인에게 돌아가고 나서야 주위를 맴돌던 녹빛 마력이 마침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각자의 반지 속에 스며든 서로의 시간 선이 맥동하는 것이 온 감각에 닿았다. 어느 한쪽의 시간이 완전히 끝이 날 때까지 그는 그녀를, 그녀는 그를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설사 한쪽의 실이 먼저 끊어진대도 그 흔적만은 영원히 남을 것이고. 그러니 그들이 나눈 것은 그 자체로 생의 증거였다.
리즈벨은 한동안 저와 아시어스의 손에서 빛나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의 광채에 눈이 부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이 부신 건 세상에 오직 그녀 하나만이 존재한다는 듯 황홀감이 가득 깃든 눈을 한 눈앞의 사람이었다.
리즈벨은 여전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 키스했다.
* * *
리즈벨이 울음을 그친 건 약 한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왜 울고 그래요. 마음 아프게.”
“무슨 그런 거짓말을……. 마음 아픈…… 흑, 표정도 아니면서…….”
아시어스는 참 성격 나쁘게도 그녀가 우는 게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응. 사실 기분 엄청 좋아요. 당신이 우는 걸 보니까 보람이 있네요. 수식을 만들고 섬세하게 다듬느라 꽤 오래 공을 들였거든요.”
미소하는 표정이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토닥이는 손길, 심지어 들뜬 목소리에까지 온통 만족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리즈벨은 아직도 울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그를 힐난했다.
“진짜 놀랐단 말이야…….”
“성공적인 청혼이라 다행이야. 그래도 이제 뚝 해요. 눈이 엄청 빨개.”
아닌 게 아니라 갑자기 눈물을 쏟아 낸 눈이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바일. 이리 가져와.”
방 저편에서 신나게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던 회색 안개가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진한 장미 향을 맡자마자 리즈벨은 눈을 감았다. 이제는 찻잔이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안에 든 것을 마실 수 있다.
아시어스가 뺨을 도닥이자 리즈벨은 얌전히 입을 벌렸다. 따듯한 차가 한 모금 넘어가니 그제야 울렁이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리즈벨은 갑작스러운 청혼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아…….”
그래서 어제 저가 취한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그녀는 숨을 들이켜며 아시어스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잠깐만, 그런데 아시어스.”
“네?”
“나…… 혹시 어제 무슨 짓 했어……?”
푸른 눈이 흔들렸다. 아시어스는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가 씩 웃었다. 기회다. 그가 리즈벨을 놀려 먹을 몇 안 되는 기회였다.
“당분간은 밑에 내려가지 말아요. 지금쯤 내 제자들이 당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면서 시시덕거리고 있을 게 분명하거든.”
“…….”
“그리고 마탑주가 아내에게 절절 목을 맨다는 걸 다들 필요 이상으로 잘 알게 되었겠죠, 아마?”
리즈벨은 말없이 이불을 도로 뒤집어썼다.
“안 해.”
“응? 뭘?”
“너랑 결혼 안 해.”
“아냐!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는 손바닥 뒤집듯 태세를 바꿔 침대맡에 붙었다. 그리고 이불 밑으로 튀어나온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살살 달랬다.
“농담이었어요. 아무도 안 마주쳤으니까 걱정 마요. 진짜예요.”
“거짓말하지 마. 내가 이상한 짓을 하면 말렸어야지 왜 그냥 뒀어? 너랑 안 살아. 마탑에도 안 있을래.”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나를 좀 괴롭히고…… 그리고 얌전히 자기만 했어요. 나 못 믿나?”
“……진짜?”
“응.”
그 말에 약간 안심했는지, 리즈벨이 이불을 살짝 내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창가에 옹기종기 모여 킬킬대는 세 마리의 악마를 보고 말았다. 가장 크게 낄낄거린 건 라제였다.
[이 주정뱅이 같으니라고. 아주 그냥, 낯 뜨거워 죽는 줄 알았네. 리즈벨.]그다음은 티스였다.
[괜찮아. 리즈벨은 예쁘니까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돼.]“…….”
[색다른 모습이었습니다.]바일까지 한마디 얹고 나자 리즈벨은 말없이 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정뱅이. 라제가 지껄인 그 한 단어 때문에 귀에 확 열이 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로제스와 아시어스와 잔을 부딪치던 장면이 마지막이었다.
제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으니 리즈벨은 딱 죽을 맛이었다.
그녀를 놀려 먹을 건수를 잡은 악마들이 돌아가며 외쳤다.
[야, 그래도 괜찮아. 이런 모습 저런 모습 다 보고 사는 거지. 우리 사이에! 난 좋았어. 귀여웠어! 나도 너 되게 많이 사랑해!] [괜찮아! 귀여웠어! 리즈 좋아!] [괜찮습니다! 저도 좋아해요, 리즈벨!]‘뭐가 괜찮아. 안 괜찮아!’
리즈벨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아예 돌아누워 버렸다.
술은 다신 입에도 대지 말아야겠다……!
“방해하지 말고 나가, 다.”
아시어스는 손을 휙 내저어 세 마리의 악마를 전부 마계로 역소환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리즈벨의 머리카락을 쥐고 살살 당겼다.
“애들이 장난치는 거예요. 그냥 귀여웠어.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었어요.”
실제로도 깨물었다. 하얀 목에 남아 있는 건 분명 그가 잘근잘근 씹었던 잇자국이었다. 여전히 리즈벨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자, 아시어스는 약간 초조해졌다.
“무르는 건 안 돼요. 알죠? 이미 계약 완료야. 나는 당신 거예요.”
“……지워, 그럼.”
“응? 안 들려요.”
“기억 다 지워…….”
너를 포함해서 어제 나를 본 사람들 기억 전부 지워 놔. 깨끗하게 없애 버려. 너는 진짜, 나를 말렸어야지! 다시는 술 안 마실 거야. 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오라버니도 진짜 너무한다. 아니, 물론 마시겠다고 한 건 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자조 섞인 온갖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시어스는 그 모든 말들을 즐겁게 들었다. 이불이 꼼지락거렸다. 이불 밖으로 눈만 내민 리즈벨이 작게 웅얼거렸다.
“그리고 반지 고마워……. 오해해서 미안해…… 어제 내가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미안하고…….”
“음, 안 들려요. 좀 더 크게 말해 주면 안 될까?”
“……사랑해.”
언제나처럼 그 말 한 마디에는 수십 개의 감정과 수백 마디의 말이 녹아 있었다. 아시어스는 결국 하얀 이불을 끌어 내리고 그녀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나도 사랑해요.”
“응…….”
“그러니까 이제 얼굴 좀 보여 주면 안 될까?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어젯밤에 부끄러워서 죽을 뻔한 건 난데.”
“어제 대체 뭘 했……. 아냐, 말하지 마. 그냥 내가 미안해.”
“미안할 거 없어요. 좋았으니까. 그러면 된 거지, 뭐. 사랑한다고 한 번만 더 말해 줄래요?”
꿀에 절인 듯 달콤한 입맞춤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더 다디단 발음의 세 글자가 몇 번이고 더 오갔다.
아시어스 특유의 마력의 향이 리즈벨에게로 배어 들어갔다. 리즈벨이 가진 꽃과 풀 내음도 아시어스를 한가득 물들였다. 각자의 왼쪽 넷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들이치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그들의 약속이 비로소 영원해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