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2
2화
왕녀의 목소리는 오묘했다. 종달새의 지저귐처럼 가벼운 음률을 띤 달큼한 음성이었다.
“다들 여기 있었구나.”
왕녀가 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마구 헝클어진 채 등허리까지 길게 풀어 헤쳐진 금발이 작열하는 샹들리에 아래 온전히 드러났다. 머리에는 엉성하게 엮인 색색의 화관을 썼다.
그녀의 눈가와 입술은 붉었다. 핏기없이 창백하던 뺨도 내부의 열기에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왕녀가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발이 입구에 깔린 붉은 양탄자를 밟았다. 이어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밟고 거침없이 중앙으로 나아간다.
아무도 왕녀를 막는 이가 없었다. 막을 수 없었다는 것에 가까웠다.
“……생긴 건 정말 천사 같군.”
누군가 마지못해 입 밖에 낸 중얼거림에 좌중이 소리 없이 동의했다. 리즈벨 발디마르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친년일 것이다.
연회장의 가장 상석, 왕좌 옆에 서 있던 왕의 직속 보좌관이 안절부절못하며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저, 전하. 왕녀님께서 또…….”
“…….”
발디마르의 왕, 루시페는 연회장의 댄스 플로어 한가운데로 날아들 듯 올라선 딸을 탐탁잖게 내려다보았다.
저건 그의 다섯 번째 딸이었다. 원래라면 누가 몇 번째 자식인지 관심도 없었겠지만 ‘저것’은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 하는 짓이 하도 기가 막혀 뇌리에 박혀버린 것이다.
발디마르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식. 전사의 긍지를 모르는 왕녀. 왕가에 연약한 초식동물 따위는 필요 없었다. 원래의 그였다면 진작 왕성 밖으로 내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저것이 아무리 활개를 치고 다닌대도 함부로 치워 버릴 수 없었다. 혹시라도 왕위 계승전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이 끔찍한 저주를 풀어 줄 자식일지도 모르니까.
‘물론 저것일 리가 없지만.’
천덕꾸러기인 주제에 생긴 것만은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어미를 닮아 그럴 것이다.
루시페는 왕좌의 팔걸이를 움켜쥐며 짜증스럽게 호흡을 토해냈다.
“두어라.”
“예? 하, 하지만…….”
늘 발디마르의 수치라며 치를 떨던 왕이 뜻밖에 선선히 대답하니 놀란 쪽은 보좌관이었다.
왕은 평소 이런 공개적인 무도회에 왕녀를 내보이는 걸 절대 불허했다. 미친 딸이 주제를 모르고 대귀족들이 전부 자리한 연회 자리에까지 기어들어 왔는데 그냥 두라니?
“오늘은 어떤 짓을 할지 퍽 기대가 되는구나.”
“…….”
보좌관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늘 있던 변덕이려니 하고 납득했다. 어쨌거나 방금 그 말로 5왕녀의 숨은 하루 더 연장된 셈이었다.
“아버지!”
왕녀가 왕좌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높이 쳐들어 하늘하늘 흔들었다.
“오늘은 아버지께 춤을 춰 드리려고 왔어요.”
루시페의 푸른 눈에 이채가 돌았다. 왕녀의 목소리는 작고 가늘었는데도 희한하게 장내를 가득 채우는 울림이 있었다.
“춤이라.”
루시페의 얼굴에 미미한 균열이 일었다. 저것이 저것은 얼굴도 모를 제 어미와 같은 짓을 하려나 보다.
왕녀가 선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흰 치맛자락과 헝클어진 금발이 나풀거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춤이라기보다는 몸짓에 가까웠지만 이제 어디에서도 비웃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가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달빛 동산 위에는 흰 달맞이꽃이 피어 있지요.”
왕녀가 입에 달고 사는 발디마르의 오래된 동요였다. 음정도 박자도 제멋대로였지만 노랫소리는 묘하게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환하게 미소짓는 달님 아래서 춤을 추어요. 밤새도록. 밤새도록.”
붕대가 감긴 발에는 상처가 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흰 붕대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붉은 발자국이 왕녀가 발을 디디는 곳마다 선명하게 찍혔다.
“이 밤이 끝날 때까지. 달이 지고 꽃이 모두 시들 때까지. 나는 홀로 남아 기다려요…….”
머리 위로 쏟아지는 샹들리에 빛에 휩싸여 춤추는 왕녀의 모습은 말 그대로 고운 광인이었다.
* * *
“아…… 망할.”
방으로 돌아온 리즈벨은 험악한 욕설을 내뱉으며 허리를 숙였다. 발에 대충 감아 놓았던 붕대가 피에 절어 찐득거렸다.
“생각보다 더 아프잖아.”
리즈벨은 왕족이 입에 담기도 민망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시뻘건 붕대를 풀어 방구석에 휙 던져 버렸다. 옷자락 끝으로 발바닥의 피를 닦아 내 보려고 했지만 이미 갈색으로 말라붙은 핏자국 위에 새로 흐른 피가 번져 점점 더 엉망이 될 뿐이었다.
결국 의자에서 일어난 리즈벨은 절뚝이며 욕실로 들어갔다. 미지근한 물이 담긴 욕조에 첨벙 발을 담그자 눈앞에 번쩍 불길이 일었다.
“아읏…….”
발바닥 가죽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리즈벨은 화끈거리는 통증을 겨우 참아가며 마른 천으로 불린 피딱지를 살살 걷어 냈다.
발의 상처는 며칠 전 가시덩굴로 뒤덮인 성벽을 타다가 생긴 것이었다. 손바닥에도 비슷한 모양의 상처들이 빽빽하게 나 있었다.
그나마 손은 쓰질 않으니 금세 딱지가 앉고 아물었지만, 신도 신지 않고 왕성 이곳저곳을 쏘다닌 발은 회복이 느렸다.
“……아프다.”
리즈벨은 따끔거리는 발의 상처를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광인으로 사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다.
미친 척을 한다는 것은 그냥 앞뒤 없이 온갖 기행들을 다 벌이고 다니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미친 짓에도 계획이란 게 필요했다.
아버지, 왕의 흥미가 떨어질 때쯤 되면 화끈한 사건을 하나씩 터트려 그의 관심을 환기해야 한다.
남은 왕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민하게 엿보는 건 일상이었다.
그러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미심쩍게 여기거나 슬슬 처리해버리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온몸을 바쳐 자신이 이 왕성의 미친년이라는 것을 피력해야 했다.
그 미친 짓들은 대담하고 위험할수록 더 좋았다. 가시가 빽빽하게 돋아난 덩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밟고 까마득한 성벽을 타는 정도는 되어야 ‘아, 저년이 정말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를 정도로 미쳤구나.’ 하는 것이다.
그에 더해 주기적인 발작 증세, 사람을 보면 손을 뻗고 짐승을 보면 따라 우는 사소한 습관, 시녀들이 자리를 비울라치면 사납게 횡포를 부리는 것까지.
그 모든 연기는 후천적으로 길러진 눈치와 치밀한 계획의 합작이나 다름없었다.
왜 머리를 굴려 가며 이 위험한 짓거리를 해야 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그것이 리즈벨의 유일한 살길이었기 때문이었다.
1왕자가 2왕녀의 목을 베는 것으로 시작을 알리는 바람에 본질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배틀 로열로 변질되기는 했지만, 계승식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발디마르의 기이한 계승식은 기본적으로 가장 강한 왕족을 가리기 위한 경쟁이다. 그러니 형제들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장 강하지 않은 왕족이 되면 된다.
광증은 리즈벨이 자신의 가치를 가장 효과적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가엾게도 미쳐 버린 누이.
강한 전사와는 거리가 먼, 왕좌를 넘보기는커녕 어느 날 돌연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막내 왕녀.
경계할 가치조차 없는 최약체.
리즈벨이 연기한 그녀의 모습은 그랬다.
“가여운 리즈벨. 아름다운 발디마르의 수치.”
“더러운 천출. 전사의 긍지를 더럽히는 누이야. 그리 사는 것보다야 차라리 자결하는 쪽이 덜 고통스럽지 않겠니?”
형제들의 조소와 경멸로 연장한 하루가 모이고 모여 어느덧 9년이 되었다.
리즈벨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열다섯을 하루 남기고 살해당한 과거와는 다르게 리즈벨은 이번에는 열아홉이 되도록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사이 5왕자가 2왕자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남은 왕족의 수는 셋이었다.
1왕자 지칼.
2왕자 로제스.
그리고 5왕녀 리즈벨.
“저것은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저러다 혼자 죽겠구나.”
며칠 전 아슬아슬하게 성벽을 오르는 그녀를 보고 큰 오라버니 지칼이 툭 던진 말을 기억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눈물겹도록 기쁘던지.
‘그래, 로제스와 둘이 영원히 그렇게 치고받고 하다가 나 같은 건 잊어 줘. 그냥 도망갈 수 있도록 놔둬!’
속으로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쳤었다. 그러다 정말 안심해서는 발을 헛디뎌 성벽 아래로 추락하긴 했지만.
리즈벨은 문득 떠오른 의문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몸에는 상처 하나 없네.’
그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부러진 곳 하나 없다. 다친 곳이라곤 가시넝쿨을 쥐고 밟았던 손바닥과 발바닥뿐이었다.
“여신께서 보호하는 미친년인가 보지, 뭐.”
왕성의 사용인들이 그렇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리즈벨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그래. 그렇게 더 욕해 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