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20
20화
“…….”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니라면, 넌 상당히 기분파 같은데. 너 좋을 때만 가까이 오잖아.”
내가 그랬나? 아시어스가 혼란스럽게 제 행적을 돌아보는 사이, 리즈벨이 돌연 화제를 바꾸었다.
“아래는 다 정리했니?”
생뚱맞기까지 한 물음이었다.
거침없이 제 얼굴과 입술을 만지는 손에 얼어붙어 있던 아시어스는 리즈벨의 입가에 미미하게 남은 호선을 발견했다.
그린 듯한 미소. 아름답지만 의미는 없다. 그녀는 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 흥미가 있는 건 그의 능력치가 발휘된 현장일 뿐.
유치한 장난기는 물론이고 순간의 충동까지 전부 사그라들었다. 그는 다소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직접 봐요.”
마음대로 키스할 수 없다는 건 짜증스러운 일이다. 뭔가를 참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는 원래부터 참을성이 많다거나 관대한 편도 못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 이전에, 상대가 자신만큼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거슬렸다.
채신머리없이 혼자 안달 난 것처럼 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리즈벨의 눈을 가린 손이 냉랭할 정도로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리즈벨은 다시 밝아진 시야에 눈을 깜빡거리다 곧바로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아래를 확인한 그녀에게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탑 아래는 깨끗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폐허 같던 탑 아래의 작은 건물들이며 성벽, 본성으로 향하는 다리의 끝부분이 통째로 사라졌다. 파편에 깔렸던 지칼의 살기등등한 병사들도, 흥건했던 핏자국들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아시어스가 체리 꼭지를 따듯 쉽게 뜯어 버린 다리는 지지대가 간데없이 사라졌는데도 허공에 버티고 서 있었다.
“마음에 들어요?”
“어디로 보낸 거야?”
“글세, 아무 좌표나 찍어서 이동시켰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지옥으로 갔든 심해로 가라앉았든 내 알 바는 아니지요.”
아시어스의 목소리에 약간의 신경질이 묻었다.
“말 안 듣는 개에겐 매가 약이라고 당신이 안 그랬습니까.”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커튼을 내렸다. 리즈벨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의 옆얼굴에 달라붙었다.
힘들이는 기색 하나 없다. 손가락과 손동작만으로 정교한 마법진을 엮어낸다. 마법사라는 족속이 원래 다 이런 걸까? 원래 다 숨 쉬듯 성벽을 부숴 버리고, 손가락을 튕겨 사람을 폐허 아래에 묻어 버리고…….
저렇게 압도적으로 상대를 짓밟아 버릴 수 있는 건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아는 게 없어도 자신이 무슨 줄을 잡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역시.’
리즈벨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걸렸다. 이쯤 되면 의심하는 게 무가치했다. 그녀는 정말로 라타에의 대마법사를, 대륙에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쥔 것이다.
리즈벨은 마법사의 시선이 한참이나 머물렀던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어제의 일로 잠시 냉정해졌나 싶었던 남자는 듣기 좋은 몇 마디에 금세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 더 잦은 횟수로, 그녀를 갈망하는 눈으로 보았다.
그 나름대로는 자제한다고 하는 모양이지만 타인이 표정을 읽는 데 도가 튼 그녀를 상대로는 헛된 노력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마법사의 눈은 사실 사랑을 느끼는 대상을 보는 눈이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의미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처음 받아 보는 타인의 호의가 생각보다 달콤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를 넘어설 만큼 위험스러웠다.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들을 전부 조각조각 내어 공들여 먹어 치우고 싶어 하는 눈빛. 손아귀에 단단히 가두고 단숨에 녹여 버릴 것만 같은 덥고 습한 욕망. 그러다 결국에는 목숨까지 갈취해 갈 살육자의 눈.
그것은 사랑이나 애정이라기보다는 매혹적인 살의에 가까웠다. 잿빛 눈동자 속에 이는 진득한 감정의 파도를 리즈벨은 애써 외면했다.
‘굳이 확인하려 들지 말자.’
가까이해서 좋을 부류가 아니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어찌 해석했는지, 북풍이 쌩쌩 불던 남자의 표정이 조금 녹았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습니까?”
“뭐?”
“눈을 못 떼길래.”
리즈벨은 방금까지 하던 생각을 잠시 접고 풋 웃었다.
“맞아. 난 너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봐. 진심이야.”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꽤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남자는 그녀가 조금만 밀어내도 서운한 티를 풍기며 짜증을 냈다. 그러다 그녀가 한 번 손을 내밀기라도 하면 거짓말처럼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알기 쉬워 좋다고 해야 하나.
‘뭐, 어차피 이 이상 가까워질 생각도 없고.’
적당히 친근감 있으면서도 경계는 확실한 관계. 마음에 든다.
잠잠해졌던 탑 아래서 다시금 기척이 들려왔다.
“끈질김 하나는 알아줘야겠군요.”
붉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다시 다리를 건너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척진 사람이 대체 몇입니까?”
“둘.”
“하나는 그때 그 둘째 왕자. 나머지 하나는?”
“첫째 오라버니.”
“2왕자는 몰라도 1왕자는 당신에게 몹시 유감이 있는 모양이군요.”
“내가 너를 얻었다는 사실을 안 모양이지. 지칼 오라버니도 머리가 좋거든. 하지만 사실 로제스와 먼저 맞붙을 줄 알았는데…….”
리즈벨은 말을 흐렸다. 자신이 돌아왔고, 그간 자신을 눈 뒤집고 찾고 있던 지칼이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이미 로제스와 팽팽하게 겨루고 있던 참이 아닌가. 분명 두어 번은 전면전이 있었을 것이다.
로제스 쪽에서도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칼을 노리고 있을 텐데, 그쪽에 신경을 쓰기도 버거울 와중에 자신을 노린다. 그것도 결코 적다고는 볼 수 없는 수의 병사들을 보내서.
“…….”
로제스를 떠올리자 다시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목의 동맥을 정확하게 겨눈 단검. 그러나 전혀 느껴지지 않던 살기. 목에 들이밀어진 것은 무딘 칼등.
“로제스는 말이야.”
아시어스는 신중하게 마력을 퍼뜨리다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왕녀는 손에 턱을 괸 채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내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어.”
“…….”
“단 한 번도.”
리즈벨은 자신이 눈치가 꽤 빠르다고 생각했다. 로제스가 그녀를 정말 죽일 마음이 없었다면 진작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눈치가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로제스가 속을 감쪽같이 숨겼던 것인가.
리즈벨은 로제스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렸다가 픽 실소했다. 후자다. 어떻게 봐도 후자였다.
“정정할게.”
“무엇을?”
“물어는 봐야겠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얼굴을 했는지. 언제부터 내게 그리 물렀는지. 죽일 땐 죽이더라도 답은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의미 없다고 수천 번 되뇌어 봐도 불안감이 잔재처럼 남아서…….
대체 뭐에 이렇게 끌리는 걸까. 로제스와 그녀 사이에 있으면 뭐가 있다고.
“원수나 다름없는 이복 남매인데, 이상하지. 왜 그랬을까. 왜…….”
리즈벨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내려앉았다. 그녀가 자조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난 아주 독한 년은 못 되나 봐.”
“역시 말리지 않았다면 후회했겠네요. 그런 주제에 내 탓이나 하고. 솔직하지 못하긴.”
“상처받았어?”
“……그 말이 아니라.”
아시어스가 할 말 많은 눈을 하고선 입을 다물자 리즈벨이 실없이 키득거렸다.
“다행이네. 어쨌든, 지칼을 만나러 가야겠어.”
“직접?”
“응. 저렇게 대놓고 얼굴을 보여 달라 성화를 부리는데.”
장난기 어린 웃음이 점차 조소로 변했다.
“누이로서 당연히 응해야지.”
그래서 그 까만 심장에 칼을 꽂아야지.
작은 콧노래가 흥얼흥얼 뒤따랐다. 지칼 발디마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형제.
로제스를 떠올릴 때와는 정반대의 감정이 리즈벨을 휩쌌다. 짧은 순간 놀랍도록 분노가 솟구치며 손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독살당할 때의 그 감각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목구멍을 태우고 몸 안으로 들어가 내장을 전부 불사르는 고통. 꺽꺽대며 몸부림치던 그녀를 으깬 벌레 보듯 멸시하던 형제의 눈을 잊을 수가 없다.
‘딱 그만큼만 되돌려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칼과 로제스가 맞붙는다면 리즈벨은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살아남은 한 명만 상대하면 된다.
하지만 지칼은 그녀를 먼저 노릴 모양이고, 그건 그녀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얻은 무기의 능력치로 보건대 지칼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지칼이 죽고 나면 상대는 로제스 한 명뿐이다. 그리고 로제스는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 그렇다면 승자는 이미 정해졌다. 간단하고 깔끔한 결말이었다.
‘로제스만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다면…….’
그러면 자유야.
희열과 망설임이 함께 리즈벨을 덮쳤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간절한지는 너무나 당연했다.
리즈벨은 형제의 무심한 표정을 털어 버리려 애썼다. 로제스 발디마르에 대한 생각을 전부 지칼을 향한 분기로 채웠다.
탑 안은 안전하지만, 지칼을 직접 대면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제 그녀가 직접 움직인다 해도 곁에 이 마법사만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피할 이유가 없지.’
“내일.”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에 끼어들었다.
아시어스가 무감한 얼굴로 창을 밀어 닫았다. 푸른 마법진이 창문에 휙 떠올랐다가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그가 천천히 말을 맺었다.
“내일 새벽 동이 틀 때.”
나쁘지 않다. 리즈벨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이 틀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