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23
23화
* * *
리켈리테의 기사단은 본성 아래로 그림자처럼 잠입했다. 그들은 본성을 방패처럼 두른 성벽의 북측, 1왕자 지칼의 구역으로 들어섰다.
가렛트 공작가의 사병들의 위치는 이미 전부 확인했다. 해가 질 때까지 5왕녀의 동쪽 탑을 줄기차게 공격해 대다 북쪽으로 후퇴했다는 보고 이후 사병들이 움직인다는 정보는 따로 없었다.
“형의 매가 사라져서 좀 곤란하긴 하군요.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영리한 녀석이었는데.”
죽은 기사단장의 매가 있었다면 조금 더 상황을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이 지칼에게 목을 베인 뒤 그 매는 자취를 감추었다.
‘고도로 훈련된 짐승이라 전투 시에도 제 역할을 잘해 내곤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없으니.’
로제스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검신에 낭자하던 핏자국을 털어 냈다. 그러나 피를 털어 내기 무섭게 달려드는 병사들 탓에 검은 물론이고 검 자루마저 시뻘겋게 물들었다.
“큭…….”
복부를 꿰뚫린 병사가 쿨럭이며 피를 토했다. 로제스는 굳은 얼굴로 검을 비틀어 뽑았다.
거슬린다. 그가 정말 죽여야 할 인간은 이런 졸병들이 아니었다.
짙은 푸른빛 눈이 복도를 훑었다.
말이 기습이지 실은 누가 먼저 검을 뽑느냐의 차이였을 뿐이다. 지칼 역시 기습을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맞대항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쯤 해서 얼굴을 내비쳐야 하는데…….’
로제스는 성벽 안쪽, 지칼의 거처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후원으로 빠져나왔다. 삭막하고 황량한 후원에 자리한 초록이라곤 중앙의 말라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가 전부였다.
그는 후원을 지나쳐 지칼의 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기묘한 위화감이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
‘왜…….’
왜 이렇게 사방이 고요한 거지?
바깥은 가렛트 공작가의 사병들과 리켈리테의 기사들이 맞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한 반면 안쪽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심지어 왕자의 침실 앞을 지키는 사병들조차 자리에 없다.
불안감이 최고치까지 다다랐다. 로제스는 지칼의 침실 문을 부숴 버릴 듯 세차게 열어젖혔다.
“…….”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정말 아무도.
로제스를 비웃듯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창가의 매 한 마리뿐이었다. 그가 그의 기사단장을 잃으며 함께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전령새였다. 매의 다리 한쪽에 풀리다 만 작은 리본이 묶여 있었다.
로제스는 리본 끝자락에서 달랑거리는 작은 쪽지를 발견하고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얼어붙었다.
img023_1
누구에게 보낸 쪽지인가.
img023_2
매가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향하는 곳은 동쪽이었다.
새벽. 동쪽 탑. 동쪽. 리즈벨의…….
로제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지칼은 새벽 내내 동쪽 탑 밑의 거대한 홀을 지켰다. 작은 규모의 왕실 행사가 열릴 때 주로 사용하는 연회장, 나나크 홀이었다.
그는 왕좌에 비딱하게 앉아 줄곧 기다리는 중이었다. 톡. 톡. 거친 손끝이 팔걸이를 일정하게 두드렸다.
“흐음.”
과연 낚여 올 것인가.
지칼은 비쭉 웃으며 천장에 난 창을 올려다보았다. 새벽빛이 밝기 전, 깊은 한밤중이다. 달이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과연 먼저 도착하는 건 어느 쪽일까?
그의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가쁜 숨소리와 함께 핏방울이 먼지 한 톨 없는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수놓았다.
“누가 먼저 올까 했더니…….”
지칼의 만면에 의기양양한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먼저로구나.”
지칼은 제게 바쳐진 제물을 앞에 둔 왕처럼 우아하게 왕좌에서 일어났다.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홀에 은신한 수십 명의 병사가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사방에서 쇠붙이가 번뜩이며 일제히 목표 대상을 겨냥했다.
“네가 가진 건 스치기만 해도 즉사할 정도의 맹독이 발린 화살촉이라고 했었지.”
지칼은 독 안에 든 형제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독을 구하지는 못했단다. 하지만 다른 것을 구했지. 퍼지는 속도가 조금 느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효과는 확실한 것으로.”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쪽을 노려보는 기세가 매서웠다. 곧 꺾어질 것이 자명한 아우를 마주하니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에 입술이 활짝 벌어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작별 인사를 하자꾸나. 사랑하는 아우야.”
탁, 지칼이 손가락을 튕겼다. 오래 경쟁해 온 형제의 최후를 일별할 때마다 늘 작별 인사처럼 건넸던 말과 함께였다.
“이제, 하나 남았군.”
* * *
아시어스는 곁눈질로 거대한 공간 내부를 훑었다.
보통의 침실 두세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침실은 둥근 원형이었다.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 역시 원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기둥 너머에는 열두 개의 검고 네모난 관이 침실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열두 개의 관. 그는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다.
“이제 좀 알겠군. 왜 저렇게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질 못해 안달인지.”
아시어스의 손가락 끝이 가장 가까이 있던 관을 훑었다. 반지르르한 관에는 먼지 한 톨 쌓여 있지 않았다. 관짝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시어스의 바로 옆에 있는 관에 적힌 이름은 ‘아이작 발디마르.’
아는 이름이다. 열람했었으니까. 아시어스는 어이가 없어 연신 실소를 터뜨렸다.
“5왕자라. 입구 쪽에 있는 걸 보니 가장 최근에 죽었나 보군요.”
“…….”
“관이 열두 개. 열 명의 왕족 중 살아남은 것이 셋, 그리고 죽은 것이 일곱. 나머지 다섯은…… 죽은 다섯 명의 부인인가?”
북쪽의 화려한 침상 위에 앉은 인영으로부터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의 푸른 눈은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흉흉하게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시어스는 천천히 그를 불렀다.
“루시페 발디마르.”
“…….”
“그리고 너는 누구냐. 이고르?”
루시페의 등 뒤에서 스르륵, 무언가 그의 어깨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뱀이었다. 성인 남자의 허벅지 굵기만 한 거대한 뱀.
“웬 놈이지?”
루시페가 입을 열었다.
아시어스는 왕의 눈이 생기 없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푸르스름한 낯빛은 이미 산 사람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 입을 열었을 때 언뜻 보인 혀는 뱀독에 시커멓게 절었다. 그 꼴을 확인한 후에야 아시어스는 마침내 이 비정상적인 왕가의 비밀을 알았다.
‘악마 소환.’
유리알 너머의 눈매가 서늘하게 굳었다.
“대체 누가 알려 줬습니까? 인간의 시체로 악마를 소환하는 법. 아니, 그 전에 누가 악마의 이름을 알려 주었지?”
루시페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나는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당신네 나라를 관리하러 온 사람이라고 해 두지요.”
“라타에의 사절?”
루시페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시어스는 기민하게 그 상태를 알아채고 실소했다.
발디마르의 왕이 여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라타에에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감히 여신의 성전에서 형제들의 피를 뿌린 것으로도 모자라 성전을 부수어 버렸다고 했다. 그 때문에 여신이 저주를 내렸다더라.
하지만 그것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이었다. 발디마르는 여전히 대륙의 화약고였고, 왕 루시페는 10년 전 라타에의 사절이 발디마르를 방문했을 적에도 여전히 호전적이며 과격한 언행을 일삼았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그때부터 죽어 가고 있었고 숨을 연명하기 위해 악마의 힘에 손을 댄 것이라니.
그러나 루시페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마계의 검은 마력을 다룰 줄 모른다. 그가 택한 것은 아주 위험한 방식의 소환이었다.
인간의 시체를 제물로 바쳐 악마를 소환하는 것. 그 방법은 오래전 아시어스가 직접 금지한 방법이기도 했다.
아시어스는 경멸스러운 눈으로 루시페를 훑었다.
“이고르에게 먹일 시체가 필요했군.”
악마가 좋아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부패한 사체다. 광기에 물들어 있거나 한이 짙게 배어 있을수록 좋았다.
“그런데 저주받은 몸으로는 나설 수가 없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계승 전쟁입니까?”
광기에 젖은 계승식에서 죽어 간 왕자와 왕녀들의 시체는 악마를 지상에 붙잡아 둘 제물로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단번에 그 모든 인과 관계들을 간파했다. 대륙에서 악마에 대해 그만큼 잘 아는 인간은 없었다.
“재밌네요.”
아시어스가 비쭉 웃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에 걸쳐져 있던 가는 테의 안경이 아지랑이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스스로를 가리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것이 사라지자마자 가감 없이 드러난 존재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명색이 헬라르를 모신다는 전사들의 왕이신데, 그녀가 가장 증오하는 방식으로 숨을 연명하다니. 헬라르가 아주 좋아하겠군.”